BLACK HORIZON · 1717

검은 수평선

세 항해자, 하나의 그림자 — 전 39장(場) 스토리 스크립트
서장 1717년의 바다

1530년. 대발견의 시대. 세비야의 통상원(카사)이 신대륙으로 가는 모든 배를 셈하고, 세계의 원본 해도 '파드론'을 자물쇠 뒤에 가둔다.

해도는 곧 권력이다. 그리고 그 권력을 사사로이 쥔 자들이 있다 — 물수리 문장을 쓰는 비밀 결사, '도해방'. 진짜 바다를 감추고 가짜를 파는 자들.

3년 전, 함대 하나가 있지도 않은 여울에서 통째로 사라졌다. 살아 돌아온 자는 단 하나. 세상은 그를 죽은 자로 안다.

「지워진 해안」
마테오 카브레라
에스파냐 세비야 · 죽었다 돌아온 부(副)도선사
서막 프롤로그 에스파냐 세비야

세비야, 과달키비르 강의 새벽 안개. 포르투갈 카라벨에서 여윈 사내 하나가 부두에 내려섰다. 부두가 유령을 본 듯 웅성였다.

마테오 카브레라. 한 세대에 한 번 나올 항해 천재라 불리던 부도선사. 3년 전 '산 크리스토발' 함대와 함께 유령 여울에서 익사했다던 사내.

블라스

…도련님. 정말 도련님이십니까. 이 늙은 눈이 헛것을 보는 게 아니라면.

마테오

블라스. 아버지의 갑판장이었지. …나는 죽지 않았어. 보내진 거야. 해도에 없는 여울로, 누군가의 손에.

마테오

함대는 폭풍에 진 게 아니야. 우리가 든 해도가, 눈앞의 바다와 달랐어. 그 명령서엔 검은 봉인이 찍혀 있었지 — 물수리.

블라스

물수리라니… 도련님, 그 이름은 부두에서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게 아닙니다.

마테오는 품속의 불탄 항해일지 조각을 쥐었다. 돌아온 이유는 하나 — 진실. 그리고 그들은, 벌써 그를 다시 죽이려 하고 있었다.

1장 라 소르다의 석판 세비야 트리아나

트리아나의 뒷골목 선술집. 촛불 하나가 낡은 해도들을 비췄다. 귀 먹은 정보상 '라 소르다'가 손짓으로 마테오를 앉혔다.

라 소르다

(석판에 분필로 적는다) 산 크리스토발? …그 배의 기록은 통상원 장부에서 통째로 지워졌어. 누군가 값을 치렀지.

마테오

지워졌다고. 침몰한 배의 기록을 지울 이유가 뭐지 — 감출 게 없다면.

블라스

도련님, 이건 도련님 혼자 싸울 상대가 아닙니다. 통상원 안에 무언가 있어요.

지워진 기록은 곧, 지울 만한 진실이 있다는 뜻이었다.

2장 첫 칼 외해

그날 밤 외해. 등을 끈 작은 배 한 척이 소리 없이 산타 페에 붙었다. 어둠 속에서 칼이 번뜩였다.

마테오

블라스, 좌현! 놈들은 갑판 구조를 몰라 — 밧줄 사이로 몰아넣어!

마테오는 칼잡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배와 사람의 움직임을, 그는 해도처럼 읽었다. 자객은 제 발에 걸려 넘어졌다.

블라스

…도련님, 이 자의 팔뚝을 보십시오. 물수리 낙인입니다.

마테오

물수리. 죽은 자를 이렇게까지 지우려 한다면 — 내가 아는 그 해안이, 그만큼 무섭다는 거지.

3장 불탄 항해일지 어느 항구 — 이네스와의 동맹

불탄 항해일지 조각은 손바닥만 했다. 기억의 해안선을 해도로 되살리려면 조각사가 필요했다. 마테오는 몰락한 제도사 한 사람을 찾아냈다.

이네스

죽은 도선사가 해도를 그려 달라. …재미있네요. 나도 도해방에 아비를 잃고 판을 뺏긴 사람이라.

마테오

이 해안선을 기억나는 대로 불렀소. 그런데 어떤 공식 해도에도 이런 해안은 없더군.

이네스

당연하죠. 이건 '지운' 해안이니까. …그리고 이 가짜 여울 수법, 나는 알아요. 같은 손이 그린 거예요.

몰락한 두 사람의 이해가 맞물렸다. 조심스러운, 그러나 단단한 동맹이었다.

4장 지워진 해안 세비야 — 1막

이네스가 통상원 파드론의 사본 여러 장을 펼쳤다. 서로 다른 시기, 서로 다른 필경사의 것이었다.

이네스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 모든 해도에서 같은 해안이 똑같이 뭉개져 있어요. 우연이 아니라 — 하나의 손이 계속 지운 거죠.

마테오

실재하는 땅을 지도에서 없앤다. 함대까지 죽여 가며. …그렇게까지 감출 가치가 있는 해안이라는 거군.

이네스

증명하려면 거기 가야 해요. 그런데 당신에겐 배도, 도선사 자격도, 이름도 없죠.

마테오

이름은 되찾으면 돼. 방법은 하나 — 아무도 못 하는 항해를, 모두가 보는 앞에서 해내는 것.

5장 산루카르 모래톱 과달키비르 어귀 — 실력의 증명

산루카르의 모래톱. 과달키비르가 대양과 만나는 그곳은, 물때를 잘못 읽은 배들의 무덤이었다. 폭풍이 몰려오는데 상선 한 척이 발이 묶여 있었다.

상선 선장

미쳤소? 이 물때에 저 모래톱을 넘겠다고? 도선사들도 다 손을 뗐소!

마테오

손을 뗀 게 아니라, 읽지 못하는 거요. …키를 내게 맡기시오. 물이 어디로 빠지는지, 나는 눈이 아니라 발바닥으로 아니까.

마테오는 폭풍 속에서 보이지 않는 물길을 따라 배를 몰았다. 모래톱이 뱃전을 스치고 지나갔다. 부두가 숨을 죽였다가, 터져 나왔다.

블라스

…도련님. 부두가 온통 도련님 이야기입니다. 죽은 도선사가, 전보다 더 강해져 돌아왔다고.

소문은 통상원 깊은 곳까지 닿았다. 그리고 그곳의 누군가가, 조용히 사람을 불렀다.

6장 재의 손, 살라사르 외해 — 2막 개시

수평선에 검은 돛이 떠올랐다. 뱃머리가 낮고 포문이 많은 배. 도해방의 칼, 엔리케 살라사르였다.

살라사르

죽은 자가 바다를 걸어 다닌다기에 구경 왔다. …카브레라. 바다는 두 번 살려 주지 않아.

마테오

너는 배를 '사고'로 만드는 자로군. 산 크리스토발도 네 솜씨였나?

살라사르

글쎄. 오늘은 인사만 하지. 다음엔 네 배 밑바닥에 구멍을 뚫어 주마.

검은 돛은 바람을 잡고 멀어졌다. 마테오는 알았다 — 적에게는 바다 위의 칼이 있다. 그에게도 배와 사람이 필요했다.

7장 나오 에스페란사 어느 항구 — 배와 사람
이네스

아버지가 도해방에 뺏긴 배가 있어요. 나오 '에스페란사'. 압류돼 부두 구석에서 썩고 있죠. 되찾아요 — 우리 손으로.

낡았지만 뼈대는 튼튼한 나오였다. 블라스가 밑창을 두드려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부둣가의 낙오자들이 하나둘 밧줄을 잡았다.

마테오

오합지졸이군. …하지만 좋아. 잃을 게 없는 자들이 제일 멀리 간다. 돛을 올려.

나오 '에스페란사'가 함대에 합류했다. 희망이라는 이름의 배였다.

8장 거짓 해도 외해 — 함정을 뒤집다

도해방이 미끼를 던졌다. 마테오에게 흘러든 '새 해도' 한 장. 그 해도는 그를 또 다른 여울로 이끌고 있었다 — 함대를 죽인 바로 그 수법으로.

마테오

…이 해도, 수심선이 실제 물빛과 어긋나. 여기 이 여울은 종이에만 있는 거짓이다. 한 번 당한 덫에 두 번 걸릴 것 같나?

마테오는 가짜 해도가 이끄는 반대로 키를 꺾었다. 뒤따르던 선단이 그 덕에 여울을 피했다. 그리고 그는 그 가짜 해도를, 모두가 보는 앞에서 펼쳐 보였다.

마테오

보시오! 통상원이 내준 해도가 사람을 죽인다. 누군가 바다를 위조하고 있소!

부두가 들끓었다. 도해방의 수장은, 더는 숨어서 놀지 않기로 했다.

9장 도해방의 얼굴 어느 항구

물수리는 조직이었다. 통상원 안에 숨은 비밀 결사, 도해방. 마테오와 이네스는 중간급 일원 하나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도해방 일원

나… 나는 시키는 대로 판을 지웠을 뿐이오! 수장이 누군지는 몰라. 다만… 산 크리스토발에서 살아 돌아온 게, 당신 하나가 아니오.

마테오

…뭐라고? 또 다른 생존자가 있다고?

이네스

그 사람이 명령을 내린 자를 봤다면 — 수장의 얼굴을 아는 유일한 증인이에요.

죽은 줄 알았던 자가, 어딘가에서 부서진 채 숨을 쉬고 있었다.

10장 또 다른 생존자 외딴 어촌

외딴 어촌. 다리를 저는 사내가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산 크리스토발의 견습 항해사, 죽은 자 명단에 오른 이름.

생존자

카브레라 님… 살아 계셨군요. 저는 그날 밤, 명령서를 든 자의 얼굴을 봤습니다. 부두의 등불 아래서.

마테오

말해라. 누구였나. 우리 함대를 죽음으로 보낸 자가.

생존자

…믿지 못하실 겁니다. 그건, 도선사장이었습니다. 돈 암브로시오 벨라스코. 당신의 스승.

파도 소리가 멀어졌다. 마테오는 오래도록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11장 스승의 이름 세비야 통상원 — 반전

통상원 깊은 곳, 파드론이 걸린 방. 도선사장 벨라스코가 등을 돌린 채 세계지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벨라스코

돌아왔구나, 마테오. 내가 가르친 것 중에 네가 제일 뛰어났지. …그래서 너를 보내야 했다. 네가 그 해안을 그리기 시작했으니까.

마테오

스승님이… 함대를 죽였습니까. 나를 아들처럼 여긴다던 분이.

벨라스코

해도는 권력이다. 진짜 지도를 쥔 자가 세계를 가져. 그 해안은 우리 것이 될 땅이야. 들어오너라, 마테오. 함께 수평선을 지키자.

마테오

수평선은 지키는 게 아니라, 여는 겁니다. …나는 당신 편에 서지 않아요.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이제 바다보다 넓은 것이 놓였다.

12장 무법자 어느 항구

다음 날, 세비야 곳곳에 방이 붙었다. 마테오 카브레라 — 사칭과 선동의 죄로 수배. 벨라스코의 손이었다.

블라스

도련님, 통상원이 등을 돌렸습니다. 이제 우린 왕국의 적입니다.

마테오

법을 쥔 자가 거짓말쟁이면, 진실은 무법자의 것이 되는 법이지. …이길 방법은 하나뿐이야.

이네스

지워진 해안에 직접 닿아서, 부정할 수 없는 증거를 가져오는 것.

쫓기는 자가, 도리어 세상 끝을 향해 뱃머리를 돌렸다.

13장 진짜 해도 어느 항구 — 3막

이네스가 오래 숨겨 온 것을 꺼냈다. 아버지가 목숨과 바꾼, 진짜 해안의 원판 판각. 도해방이 그토록 지우려 한 바로 그 그림이었다.

이네스

아버지는 이걸 지키다 돌아가셨어요. 이제… 당신에게 맡길게요. 세상에 되돌려 줘요.

마테오

…고맙소, 이네스. 이 판각과 내 기억을 겹치면, 유령 여울 너머의 진짜 항로가 나와.

가짜 해도 아래 숨은 진짜 바다의 지도가, 마침내 완성되었다. 침로는 하나 — 서쪽, 세상이 지운 해안으로.

14장 유령 여울 외해 — 트라우마를 넘다

유령 여울의 해역. 3년 전 함대가 부서진 바로 그 바다. 가짜 해도는 여기 여울이 있다 했고, 진짜 바다는 깊은 물길을 열어 두고 있었다.

마테오

…여기서 다들 죽었지. 하지만 그때 우리가 든 해도가 거짓이었을 뿐, 바다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 물길을 따라간다. 전속!

폭풍과 안개 속에서, 마테오는 오직 진짜 바다만을 믿고 배를 몰았다. 그를 죽일 뻔한 여울이, 뱃전 양쪽으로 갈라졌다.

블라스

넘었습니다… 도련님, 우리가 유령 여울을 넘었어요!

그리고 안개가 걷힌 자리에 — 어떤 해도에도 없는 육지가, 검은 수평선 위로 솟아올랐다.

15장 지워진 땅 지워진 해안

지워진 해안. 그것은 실재했다. 푸른 강과 높은 나무, 연기가 오르는 마을. 도해방이 함대를 죽여 가며 감춘 진실이 눈앞에 있었다.

이네스

여기를… 저들은 사사로이 차지하려 했어요. 그래서 세상의 눈에서 통째로 지운 거예요.

마테오

측량한다. 위도, 해안선, 물길 하나까지. 이 땅이 여기 있다는 걸, 아무도 부정 못 하게.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해도 위에 쌓여 갔다. 그때, 수평선에 검은 돛이 무리 지어 떠올랐다.

살라사르

여기까지 왔군, 카브레라. 하지만 벨라스코 나리는 너희를 살려 보내지 말라 하셨지.

16장 최후의 해전 지워진 해안 앞바다

지워진 해안 앞바다. 살라사르의 함대는 화력이 앞섰다. 그러나 이 바다의 여울과 해류를, 마테오만이 알았다.

마테오

정면으로 붙지 마라. 놈들을 얕은 여울로 유인한다. 조류가 바뀌는 순간 — 저 큰 배들은 제 무게에 갇힐 거야.

마테오는 대포가 아니라 바다로 싸웠다. 살라사르의 기함이 보이지 않는 모래톱에 얹혔다. 화력은 항해술 앞에 무릎 꿇었다.

살라사르

…바다를… 읽는 놈이었나. 이런…

도해방의 칼이 꺾였다. 이제 남은 것은, 이 증거를 세비야로 가져가는 일. 그리고 세비야는, 벨라스코의 손안에 있었다.

17장 도해방의 재판 세비야 통상원 — 엔딩

통상원 대회의실. 왕실 감독관 앞에, 마테오가 모든 것을 펼쳤다. 진짜 해안의 해도, 같은 손이 그린 가짜 여울들, 살라사르의 증언, 그리고 살아 있는 증인.

마테오

이 해안은 실재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지우기 위해, 도해방은 함대 하나를 통째로 수장시켰습니다. 그 명령을 내린 자는 — 이 방에 있습니다.

벨라스코

…네가 이렇게까지 올 줄은 몰랐다, 마테오. 나는 세계를 손에 쥐려 했지. 그런데 정작 나는, 내가 그린 거짓 해도가 어디까지 뻗었는지도 다 알지 못했어.

벨라스코의 성이 무너졌다. 도해방은 해체되었고, 파드론의 자물쇠는 부서졌다. 스승은 제가 세운 거짓의 무게에 스스로 짓눌려, 조용히 방을 떠났다.

마테오

…해도는 감추려 그리는 게 아닙니다, 스승님. 누군가 돌아올 수 있으라고 그리는 거예요. 당신이 제일 먼저 가르쳐 주셨죠.

지워졌던 해안이, 마침내 세상의 해도 위에 이름을 얻었다.

18장 검은 수평선 너머 바다 위 — 대단원

몇 달 뒤. 마테오 카브레라의 이름은 복권되었고, 지워졌던 해안은 진짜 파드론에 올랐다. 도해방은 사라졌다.

이네스

이제 죽은 자를 쫓지 않아도 되겠네요. …다음엔 어디로 갈 거예요, 도선사님?

마테오

아직 해도의 절반은 비어 있어. 감추는 자가 없으니, 이번엔 진짜로 그리러 가는 거지. 살아 있는 바다를.

새벽. 산타 페가 검은 수평선을 넘어갔다. 이번에는, 아무도 그 항로를 지우지 못했다.

— 검은 수평선 너머로, 당신의 바다는 계속된다.

19장 아버지의 판각도 카디스 — 이네스 곁이야기 1

카디스의 부두 시장. 압류품이 흘러나오는 골동 좌판이었다. 낡은 연장 상자 앞에서, 이네스의 걸음이 뚝 멈췄다.

이네스

…이 판각도. 손잡이의 물결 문양 — 아버지 거예요. 공방이 압류될 때 뺏긴 연장이, 왜 여기 좌판에 나와 있죠.

마테오

압류품은 창고에서 썩거나, 누군가의 주머니로 새는 법이지. …주인장, 이 칼 값은 내가 치르겠소.

이네스

아버지는 이 칼로 해안선을 새겼어요. 종이가 아니라 나무에, 지워지지 않게. 어릴 때 내 손을 잡고 첫 획을 그어 준 것도 이 칼이었죠.

이네스는 판각도를 천에 싸서 품에 넣었다. 그 손이 아주 오래, 떨렸다.

이네스

고마워요. …언젠가 이 칼이 마지막으로 새겨야 할 판이 있어요. 그때가 오면 — 도와줄래요?

20장 지우게 한 손 리스본 — 이네스 곁이야기 2

리스본의 오래된 인쇄 골목. 잉크와 참나무 냄새. 이네스 아버지의 옛 동료라는 늙은 판각공이 문을 열었다.

노판각공

그 눈매… 세비야 판각공의 딸이구나. 언젠가 올 줄 알았다. 아버지 이야기를 물으러.

이네스

아버지가 왜 판을 뺏기고 무너졌는지, 이제는 알아야겠어요. 도해방이 아버지에게 무엇을 시켰죠?

노판각공

'지우는 일'이다. 실재하는 여울을 판에서 파내고, 없는 여울을 새겨 넣는 일. …네 아버지는 처음엔 몰랐고, 알고 나서는 거부했지.

마테오

거부한 판각공의 공방은 압류되고, 이름은 지워졌다… 함대를 지운 것과 같은 손이군.

노판각공

그이는 지우라는 판이 올 때마다 몰래 진판(참된 판목) 한 벌을 더 파서 숨겼다. …마지막 한 판은 끝내 다 못 새겼지만. 카디스 어부들의 여울목이었지.

이네스

…그래서 그 칼이 남은 거군요. 아버지가 못 새긴 획은, 이제 내가 새겨야죠.

21장 진판(眞版) 카디스 — 이네스 곁이야기 3

카디스, 바다가 보이는 언덕의 작은 예배당. 이네스가 밤을 새워 새긴 목판 하나를 안고 있었다. 아버지의 판각도는 그 손에 꼭 맞았다.

이네스

아버지가 지우라 강요받던 어부들의 여울목이에요. 마지막 획까지 아버지의 칼로 새겼어요. 이제 이 해안은 — 어떤 손도 못 지워요.

마테오

…나는 스승의 손에 바다를 지워졌지. 당신 아버지는 끝까지 새기는 쪽에 남았고. 부럽소 — 좋은 유산이오.

이네스

복수가 아니라 상속이에요. 지우는 손의 시대는 저들이 살았고 — 새기는 손의 시대는 내가 살 거니까.

이네스는 첫 인쇄본 한 장을 예배당 벽에, 뱃사람들이 다 보도록 붙였다. 그리고 판각도를 처음으로, 허리춤이 아니라 연장 상자에 넣었다.

이네스

고마워요, 마테오. 이제 아버지 꿈을 꾸면 — 빚진 얼굴이 아니라, 웃는 얼굴을 볼 것 같아요.

22장 아버지의 항적 포르투 — 블라스 곁이야기 1

포르투의 부두 주점. 도루 강의 포도주가 잔에 돌았다. 블라스가 낡은 뿔피리를 만지작거리다, 드물게 먼저 입을 열었다.

블라스

도련님 아버님과 처음 탄 배가 포르투에서 떴습죠. 나오 '산 아마로'. 나는 갓 스무 살 밧줄쟁이였고, 선장님은… 바다를 무서워할 줄 아는 분이었습니다.

마테오

아버지가 바다를 무서워했다고? 평생을 바다에서 산 분이.

블라스

무서워할 줄 아는 것과 겁내는 건 다릅니다. 아조레스 앞바다에서 큰 폭풍을 만났을 때, 선장님은 짐을 다 버리게 하고 이러셨죠 — '배는 다시 사도, 자네들은 다시 못 산다.'

블라스

그날 산 자들은 평생 선장님 배만 탔습니다. 나도 그중 하나고… 그 아들이 지금 내 앞에서 키를 잡고 있는 겁니다.

블라스는 잔을 비우고, 창밖의 검은 강물을 오래 바라보았다.

23장 산 아마로의 위도 외해 — 블라스 곁이야기 2

외해. 블라스가 드물게 침로에 참견했다 — 반 리그만 남쪽으로. 그리고 그 자리에서, 노인은 모자를 벗었다.

블라스

여깁니다. 산 아마로가 누운 위도. …선장님이 돌아가시고 몇 해 뒤, 그 배는 다른 선주 밑에서 과적으로 가라앉았습죠. 내 전우 아홉이 같이 내려갔습니다.

마테오

…그때 자네는 뭍에 있었군.

블라스

무릎이 상해 그 항차만 빠졌습니다. 그 뒤로 뭍에서 삼 년을 마셨죠. 죽은 놈들 몫까지 마신다는 핑계로. …조타수 파블로 그놈은, 수영도 못 했는데 말입니다.

블라스는 낡은 뿔피리를 — 파블로의 것이었다 — 뱃전 너머로 내려놓았다. 피리는 물결 위에 잠깐 떠 있다가, 조용히 가라앉았다.

블라스

이제야 돌려주는구나, 이 사람아. …도련님, 침로 원래대로. 산 사람은 산 사람의 바다로 가야죠.

24장 바다에 남는 이유 리스본 — 블라스 곁이야기 3

리스본, 밤의 부두. 돛을 손보는 블라스에게 마테오가 물었다. 이 나이가 되도록, 왜 바다를 떠나지 않느냐고.

블라스

뭍에선 세 번 살아 봤습니다. 세 번 다 술통 바닥에서 끝났죠. 바다가 좋아서 남은 게 아니라… 바다에서만 내가 쓸모 있는 인간이라 남은 겁니다.

마테오

…나는 스승에게 바다를 배웠고, 그 스승의 손에 바다에 묻힐 뻔했지. 그런데도 이 바다가 싫어지질 않아. 이상한 일이야.

블라스

바다는 아무 죄가 없으니까요. 죄는 늘 뱃머리 이쪽에 탑니다. …선장님이 그러셨죠 — '바다는 소유가 아니라 동행이다.'

블라스

도련님이 태어나던 해에 선장님과 약조했습니다. 이 아이가 제 바다를 찾을 때까지 곁에 있어 달라고. …이제 찾으셨으니, 나는 약조를 지킨 늙은이로 죽으면 됩니다.

마테오

약조는 안 끝났어, 블라스. 내 바다는 이제 시작이니까 — 갑판장이 없으면 곤란하지.

노인은 대답 대신, 돛줄 매듭을 한 번 더 단단히 당겼다. 그것이 블라스의 대답이었다.

25장 석판의 어제 세비야 트리아나 — 라 소르다 곁이야기 1

트리아나, 향신료 창고 이층. 라 소르다의 방은 늘 촛불 하나뿐이었다. 마테오가 정보값을 치르러 들렀을 때, 벽에 걸린 낡은 석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마테오

저 석판은… 글씨가 지워지지 않았군. 다른 건 다 깨끗이 닦아 두면서, 저것 하나만은.

라 소르다

(분필 쥔 손이 잠깐 멈춘다. 이윽고 적는다) 건드리지 마. 저건 파는 물건이 아니야.

석판에는 오래된 글씨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아이의 것처럼 서툰 획. 그 아래, 다른 손으로 적힌 한 줄.

마테오

…당신, 처음부터 듣지 못한 건 아니었군. 이건 소리 내어 읽던 사람의 손끝이야.

라 소르다

(오래 마테오를 응시하다, 천천히 적는다) 죽은 자는 눈치가 빠르군. …오늘은 여기까지. 값은 받았으니 가 봐.

26장 소리 없는 항구 세비야 — 라 소르다 곁이야기 2

세비야, 통상원 뒷골목의 불탄 창고 터. 라 소르다가 처음으로 값을 받지 않고 마테오를 그곳으로 데려왔다.

라 소르다

(불탄 벽을 가리키며 적는다) 여기가 소리가 멈춘 곳이야. 스무 해 전, 나는 저 통상원에서 짐 목록을 베끼던 계집아이였어.

라 소르다

(분필이 빨라진다) 어느 밤, 베끼면 안 될 명령서를 봤지 — 있는 해안을 장부에서 파내라는. 물수리 봉인이 찍힌.

마테오

…그래서 저들이 당신 입을 막았군. 산 크리스토발처럼, 증인을 지우려고.

라 소르다

(고개를 젓는다) 아니. 입을 막은 게 아니야. 그날 밤 증거를 태우다 창고가 무너졌고 — 나는 그 굉음 속에 갇혔지. 깨어나니 세상의 소리가 전부 사라져 있었어.

라 소르다

(희미하게 웃으며 적는다) 저들은 귀먹은 계집을 죽일 값어치도 없다 여겼지. 그 덕에 나는 살았고 — 소리를 잃은 자가, 이 항구의 모든 소리를 듣는 자가 됐어.

마테오

함구가 아니라 청각이었군. 저들이 당신에게서 앗은 건 목소리가 아니라, 세상의 소리였어.

27장 침묵의 값 세비야 — 라 소르다 곁이야기 3

벨라스코의 이름이 드러난 뒤였다. 마테오가 찾아갔을 때, 라 소르다는 벽에서 그 낡은 석판을 내리고 있었다.

라 소르다

(석판을 마테오 쪽으로 돌린다) 스무 해를 안 지운 글씨야.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내게 소리 내어 읽어 준 구절. 그리고 내가 마지막으로 들은 말.

마테오

…이제 와서, 왜 내게 보여 주는 거요.

라 소르다

(분필을 내려놓는다) 함대를 지운 손과 내 귀를 앗은 손이 같은 손이었어. 네가 그 손의 임자를 세상에 끌어냈지. …이제 이 석판을 지워도 될 것 같아서.

라 소르다는 젖은 헝겊으로 스무 해 묵은 글씨를 천천히 닦아 냈다. 석판이 처음으로,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검정이 되었다.

라 소르다

(빈 석판에 새로 적는다) 이건 값을 받지 않는 첫 소식이야 — 통상원 야간 서기가 뒷문 열쇠를 쥐고 있어. 조심해서 써. …죽은 자, 고마웠어.

마테오

소리를 잃고도 이 항구에서 가장 멀리 듣는 사람이었소. 당신의 침묵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지. …고맙소, 라 소르다.

28장 truus_side1

안트베르펜, 환전상 거리. 북방 무역의 대심장답게 이 골목에서는 배 한 척보다 종이 한 장이 더 무겁게 오갔다. 양모 값도 아마포 값도, 여기서는 환어음 한 장으로 셈해졌다.

하르먼

포르투갈 배에서 온 손님이라. …환어음을 헐어 드릴까, 새로 끊어 드릴까. 늙은 하르먼의 장부는 리스본에서 뤼베크까지 닿는다오.

마테오의 눈이 펼쳐진 장부의 한 줄에 걸렸다. 다른 잉크로 덮인 자리. 칼끝으로 긁어내고 그 위에 다시 쓴 흔적이었다.

마테오

…이 줄은 긁어낸 자리군. 나는 지워진 걸 읽는 데 이골이 난 사람이오. 여기, 원래 무슨 채권이 적혀 있었소?

하르먼

눈도 밝으시지. …어느 젊은 계집이 반년째 그 자리를 물으러 온다오. 제 아비가 함부르크의 한 상관 앞으로 끊은 환어음이었는데 — 어느 날 세 장부에서 한꺼번에 사라졌지. 갚을 채무가 종이째 없어진 게요.

트라위

(문간에서) 또 그 이야기군요, 하르먼. …당신, 지워진 걸 읽는다 했죠. 나는 트라위. 그 지워진 채권이 우리 아버지의 마지막 거래였어요.

마테오

지도를 지우는 손과 장부를 지우는 손은 버릇이 같소. 나도 지워진 바다에서 돌아온 사람이라 남 일 같지 않구려. …그 종이, 되살리는 걸 도와도 되겠소?

29장 truus_side2

런던, 템스 강가의 양모 창고. 강물 비린내에 기름때 밴 양모 냄새가 얹혔다. 잉글랜드의 양모가 바다를 건너 안트베르펜으로, 함부르크로 실려 나가는 첫 관문이었다.

창고지기

함부르크로 나간 양모 짐? 그런 건 다 나뭇조각에 새겨 두지. 태리 막대 — 창고 몫 반쪽, 실은 배 몫 반쪽. 쪼갠 두 조각이 딱 맞물려야 셈이 맞는 게요.

트라위

(막대 더미를 뒤지다 하나를 집어 든다) …여기. 아버지 표식이에요. 양모 스무 짐, 함부르크의 그 상관 앞. 실려 나간 건 장부만이 아니라 이 나무에도 새겨져 있었어요.

마테오

한쪽 장부를 칼로 긁어도 맞은편 장부까지 긁을 수는 없는 법이오. 안트베르펜에선 채권을 지웠지만 — 런던의 이 나뭇조각은 양모가 떠난 걸 아직 기억하고 있소.

트라위

아버지는 이 양모 값을 함부르크에서 받기로 하고 환어음을 끊었죠. 그런데 배가 닿기도 전에 돌아가셨고 — 그 틈에 누군가 채권을 종이째 지웠어요. 양모는 상관 창고로 들어갔는데, 갚을 빚만 사라진 거예요.

마테오

양모는 받고 값은 치르지 않는다. …깔끔한 도둑질이군. 이 나뭇조각과 하르먼의 뒷장부, 그리고 함부르크가 양모를 받아 적은 수령부. 세 쪽을 겹치면 지워진 채권이 도로 살아나오.

트라위

함부르크로 가요. 저들이 제 손으로 적은 수령부가 저들의 도둑질을 증언할 테니까. …뱃삯은 내가 낼게요. 아버지가 못 받은 값의, 아주 작은 선불로.

30장 truus_side3

함부르크 부두. 북해 상업의 자존심이라는 이 항구에서, 한자 상관의 붉은 벽돌 창고가 강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트라위는 아버지의 표식이 찍힌 태리 막대와 하르먼의 뒷장부 사본을 품에 안고 있었다.

상관 서기

지워진 채권을 물으러 왔다고? …여긴 뤼베크에서 런던까지 셈이 한 치도 안 틀리는 한자의 집이오. 없는 빚을 있다 우기면 곤란하지.

트라위

그럼 당신들 수령부를 펴 봐요. 그해 그날, 잉글랜드 양모 스무 짐이 이 창고로 들어온 기록. …받은 건 적어 두고 갚을 값만 지운 거죠. 그 빈자리가 곧 증거예요.

서기가 두꺼운 수령부를 넘겼다. 양모는 분명 들어와 있었다. 그런데 그에 맞물려야 할 지급 기록만, 딱 한 줄이 비어 있었다. 안트베르펜의 뒷장부와 런던의 태리가 그 빈 줄을 정확히 메웠다. 한 장부는 속여도, 세 장부는 속이지 못했다.

트라위

(서기를 똑바로 본다) 나는 빚을 탕감받으러 온 게 아니에요. 우리 아버지가 정직한 상인이었다는 걸 당신들 장부로 증명하러 온 거예요. 이 채권을 도로 적어요. 마지막 한 줄까지.

상관의 원로들이 세 기록을 맞대 보고는 오래 침묵했다. 지워진 채권은 그날, 함부르크의 수령부에 다시 한 줄로 적혔다. 트라위 아버지의 이름과 함께.

마테오

…나는 지워진 바다를 도로 해도에 올리러 여기까지 왔소. 당신은 지워진 이름을 장부에 도로 올렸고. 지우는 손의 시대는 짧고, 적는 손의 시대는 기오. 잘 가시오, 트라위.

31장 miriam_side1

이스탄불, 세관의 검량 마당. 향신료와 비단 카라반이 여기서 길을 끝냈다. 후추 자루도 명주 필도, 이 커다란 대저울을 지나야 값이 매겨졌다. 마테오는 보급을 셈하러 들렀다가, 텅 빈 저울 접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테오

…저 대저울, 빈 접시가 수평이 아니오. 반 톨쯤 한쪽으로 처졌군. 눈금이 어긋난 게 아니라, 기준으로 얹는 추 자체가 가벼워진 거요.

미리암

(곁에서 낮게) 목소리를 낮춰요, 낯선 손님. 그걸 알아본 사람은 이 마당에서 당신이 세 번째예요. 앞의 둘은 다시 안 보이고요. …나는 미리암. 이 시장의 검인관이에요. 저울이 정직한지 봐 주라고 세워진 사람이죠.

마테오

검인관이 아는데도 못 고친다. …그럼 저 가벼운 추에, 진짜 봉인이 찍혀 있다는 뜻이군.

미리암

봉인은 진짜예요. 추만 감쪽같이 바꿔치기됐죠. 자루마다 반 톨씩. 카라반이 반년을 걸어 온 후추에서 그 반 톨을 떼어 먹는 거예요. 하루면 티끌이지만, 한 해면 창고 하나. 봉인이 진짜니 아무도 못 건드려요.

마테오

봉인이야 베끼면 되고 추야 깎으면 되지. 하지만 물은 못 속이오. …나는 종이가 거짓말을 해도 바다는 거짓말을 안 한다는 걸, 배 밑바닥으로 배운 사람이오. 그 빼앗긴 반 톨, 물의 무게로 되찾는 걸 도와도 되겠소?

미리암

물로 무게를 되찾는다… 처음 듣는 말이네요. 좋아요, 죽은 사람 같은 얼굴을 한 손님. 사람 빠진 새벽에 와요. 저울은, 아무도 안 볼 때 제일 정직하니까.

32장 miriam_side2

이즈미르, 에게 해의 비단 상관. 새벽의 물 검량이 이스탄불의 추가 반 톨 가볍다는 걸 증명한 뒤였다. 미리암은 그 가짜 추를 '진짜'라 검인해 준 예비 봉인추의 자취를 좇아, 마테오와 함께 이 항구까지 왔다.

미리암

검인추는 늘 두 벌이에요. 하나는 마당에 걸고, 하나는 원본으로 금고에 재워 두죠. 마당 추가 가짜라면 — 그걸 진짜라 도장 찍어 준 원본이 어딘가 또 있다는 뜻이에요. 이즈미르 상관 금고에. 그것마저 가짜면, 부정은 한 도시가 아니라 바다 양쪽에 뿌리내린 거예요.

그러나 상관의 금고 앞에서 그들을 기다린 것은 예비추가 아니라, 세관의 검량 감독이었다. 미소가 부드러웠고, 그래서 더 서늘했다.

검량 감독

미리암 검인관. 당신 가문에 이 상관의 검량 자리를 평생 보장하리다. 눈금이란 원래 서로 조금씩 눈감아 주는 것 아니오. 소란 피우지 말고, 편히 사시오. …앞의 두 검인관처럼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고 싶지 않다면 말이오.

미리암

(마테오에게, 아주 낮게) 평생 편한 자리… 우리 가문은 이 바다에서 늘 손님이었어요. 세비야에서 쫓겨 온 뒤로, 어느 항구에서도. 뿌리 없는 사람에겐 '조용히'가 제일 안전한 말이죠.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어요.

마테오

나도 세계를 손에 쥔 사람에게 꼭 그런 편한 자리를 권유받았소. 거절하고 무법자가 됐지. …저울을 읽는 눈은 타고난 재능이오. 하지만 기울어진 걸 바로 세우는 건 재능이 아니라 선택이오. 아무도 대신 골라 줄 수 없는.

미리암

(감독을 똑바로 보며) 우리 가문은 삼대째 이 저울을 지켰어요. 손님으로 살망정, 저울까지 손님으로 두진 않아요. …예비추는 여기서 몰래 달지 않겠어요. 알렉산드리아 옛 시장, 모두가 보는 앞에서 물에 답니다.

33장 miriam_side3

알렉산드리아, 옛 등대가 무너져 내린 곶. 부서진 대리석 사이로 향신료 시장이 섰다. 미리암은 새로 부어 만든 놋추 하나와 마테오의 물통을 마당 한복판에 놓았다. 카라반 상인들이 하나둘 빙 둘러섰다.

미리암

여러분이 반년을 걸어 온 후추가, 저울 위에서 자루마다 반 톨씩 사라졌습니다. 봉인은 진짜였지만 추가 가짜였죠. 오늘은 봉인이 아니라 물로 답니다. 물은 뇌물을 받지 않으니까요.

마테오가 정해진 부피의 물을 되로 되질해, 그 무게로 저울의 한쪽을 채웠다. 물의 무게는 이스탄불에서도 알렉산드리아에서도 같았다. 그 물무게로 새로 부은 놋추가, 가짜 봉인추보다 정확히 반 톨 무거웠다. 마당이 술렁였다.

마테오

종이는 위조되고 봉인은 베껴지오. 하지만 물 한 되의 무게는 어느 바다 어느 항구에서도 똑같소. 세상에서 끝내 거짓말을 못 하는 기준은 — 이 물 한 되뿐이오.

미리암

저울은 물건을 다는 게 아니에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믿음을 다는 거죠. 나는 그 믿음이 반 톨씩 새는 걸 알면서도, 오래 편한 쪽에 서 있었어요. 당신이 이 마당에 들어서기 전까지.

마테오

나도 스승이 바다를 위조하는 걸 알면서도, 오래 그를 스승이라 불렀소. 아는 것과 바로 세우는 것 사이가 — 내가 건넌 가장 긴 항로였지. 당신은 그 항로를, 나보다 빨리 건넜소.

미리암은 물로 검인한 새 놋추를 무너진 등대의 주춧돌 위에 올려 두었다. 등대는 다시 불을 밝히지 못해도, 그 자리에서 저울 하나는 오랜만에 수평을 되찾았다. 마테오는 닻을 올렸다. 기울었던 것이 바로 서는 소리를, 그는 먼바다의 파도 소리처럼 들었다.

34장 seiba_side1

아바나 부두. 은 선단이 모이는 항구답게 돛과 돛이 숲을 이뤘다. 마테오는 짐을 부리다 말고 문득 코를 들었다. 바람 한 점 없는데, 바다에서 비린내가 아니라 쇠 냄새 같은 것이 밀려왔다.

마테오

…이 냄새. 그리고 저 너울, 바람도 없는데 결이 길어졌어. 하늘 끝이 노랗군. 나는 이런 바다를 딱 한 번 봤소 — 살아 돌아온 게 운이었지.

세이바

(부두에서 어선을 단단히 붙들어 매며) 운이 아니에요, 뱃사람. 사흘 안에 우라칸이 와요. 바다가 냄새로 먼저 이르고, 새들이 뭍으로 먼저 달아나죠. …나는 세이바. 이 해안에서 나고 자랐고, 어머니 쪽 사람들은 지도가 이 바다에 이름을 붙이기 훨씬 전부터 저 냄새를 읽었어요.

항만 서기

또 그 소리군, 세이바. 통상원 달력엔 이달 내내 맑음이라 적혀 있고, 은 선단은 예정대로 뜬다. 계집 하나 코가 종이보다 정확하다는 게냐.

마테오

종이는 사람을 죽이오. 나는 맑다고 적힌 바다에서 함대 하나를 통째로 잃은 사람이오. …저 사람 말이 맞소. 뜰 배는 오늘 안에 뜨고, 못 뜰 배는 닻을 셋 내리고 항구 안쪽으로 더 들어가시오.

몇몇은 비웃었고, 몇몇은 말없이 닻을 옮겼다. 사흘째 밤, 우라칸이 아바나를 통째로 뒤흔들었다. 항구 안으로 파고든 배들은 살았고, 달력을 믿고 외해로 나간 배들은 새벽이 되도록 돌아오지 못했다.

세이바

(폭풍이 지나간 부두에서) 종이보다 바다를 믿는 손님은 참 오랜만이네요. …저 냄새 읽는 법은 팔지 않아요. 그래도 당신 같은 사람에겐 — 언젠가 보여 줄 수도 있겠죠.

35장 seiba_side2

산토도밍고. 서인도의 첫 도시라는 이 항구엔 돌로 올린 종루가 있었다. 폭풍이 오면 그 종이 뭍과 어촌에 위험을 알리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세이바가 올려다본 종에는, 입술에서 어깨까지 긴 금이 가 있었다.

세이바

저 종은 스무 해째 저렇게 갈라진 소리로 울어요. 힘껏 쳐도 소리가 멀리 못 가죠. 어촌까지 겨우 닿을 즈음이면 우라칸이 먼저 닿아 있고요. …다시 부어 달라 몇 번을 청했는지 몰라요.

항무관

종을 새로 부으려면 놋쇠가 드는데, 그 놋쇠는 은을 재는 저울추로 먼저 가야 하거든. …세이바, 자네를 이 항구의 '날씨 보는 사람'으로 앉히지. 봉급도 주고 자리도 주마. 대신 어부들 앞에서 우라칸이 어떻고 떠들어 선단 일정을 흔들진 말고. 조용히, 편하게 살게.

마테오

(낮게) …나도 꼭 저런 자리를 권유받은 적이 있소. 세계를 손에 쥔 사람이, 편한 자리를 줄 테니 진실은 덮으라 했지. 거절하고 무법자가 됐소. 당신이라면, 어찌하겠소.

세이바

(항무관을 똑바로 본다) 편한 자리라. …저 종은 금이 갔어도 종이에요. 나를 봉급으로 사서, 어머니 사람들의 지식을 '항구가 베푸는 은혜'로 바꿔치기하려는 거죠. 종은 끝내 안 고치면서요. 사양하겠어요. 소리 못 내는 종이라면, 소식은 내가 발로 나르죠.

그날부터 세이바는 어촌을 하나하나 돌며, 갈라진 종을 기다리지 말고 바다가 보내는 냄새와 너울과 새들을 스스로 읽는 법을 어부들에게 나눠 주었다. 마테오는 그 신호를 뱃사람이 한눈에 알아보도록, 해안마다 올릴 봉화와 깃발의 자리를 함께 짚어 주었다.

세이바

안 고쳐 주는 종을 붙들고 우느니, 저 종이 없어도 되는 사람들을 만들면 돼요. …다음엔 베라크루스로 가요. 본토 정착지엔 이 냄새를 아는 이가 하나도 없거든요. 그리고 그곳에, 내가 오래 찾던 상자가 하나 있어요.

36장 seiba_side3

베라크루스. 누에바에스파냐의 은이 바다로 나가는 관문이었다. 부두엔 은괴 궤짝이 산처럼 쌓였고, 그 그늘에 낡은 나무 상자 하나가 짐 목록에서 밀려나 버려져 있었다. 세이바가 오래 찾던 상자였다.

세이바

(상자를 연다) 은이 아니라서 배에서 내던져진 거예요. …씨앗이에요. 카사바, 옥수수, 그리고 세이바 — 사람들이 모여 그늘을 얻는 큰 나무. 어머니 사람들이 먹고 살던 것들, 정착지 사람들도 심으면 뿌리내리고 살 수 있는 것들이죠.

마침 앞바다에 또 한 번 하늘 끝이 노래졌다. 항구의 도선사들이 배를 묶고 손을 뗐다. 그러나 씨앗은 심을 철을 놓치면 한 해를 통째로 버리는 법. 세이바가 마테오를 보았다.

마테오

우라칸의 앞자락과 뒷자락 사이엔 늘 숨 한 번 쉴 물길이 열리오. 종이엔 없어도 바다엔 있지. …그 창을 내가 읽으리다. 당신 씨앗을, 폭풍이 닫히기 전에 뭍에 올려놓겠소.

마테오는 은도 대포도 아닌 씨앗 상자를 싣고, 우라칸이 잠시 숨을 고르는 그 좁은 물길을 따라 배를 몰았다. 폭풍의 뒷자락이 부두를 때리기 직전, 상자는 젖지 않고 뭍에 닿았다.

세이바

(정착지 사람들과 원주민 어부들 앞에서 첫 씨앗을 흙에 묻으며) 이 냄새 읽는 법도, 이 씨앗도 어머니 사람들의 것이에요. 항구가 베푼 은혜가 아니라. 그렇게 적어 두세요, 지우지 못하게. …어머니가 내게 이 나무의 이름을 줬어요. 그늘은 심은 사람이 아니라, 뒤에 오는 사람이 앉는 거라고.

마테오

…나는 지워진 바다를 도로 해도에 올리러 여기까지 왔소. 당신은 아직 오지 않은 사람들의 밥과 그늘을 심는군. 지우는 손의 시대는 짧고, 심는 손의 시대는 기오. 저 어린 세이바가 그늘을 드리울 즈음이면 — 우리는 없어도, 이 해안은 있겠지.

닻을 내릴 시간이다. — 항해일지의 마지막 장을 편다.

— 한 항해자의 시대가 저문다. 이제, 새로운 이름이 수평선에 오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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