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비야의 새벽은 강에서 온다.
과달키비르강 위로 물안개가 낮게 깔리고, 부두의 널판 사이로 밤새 스민 소금기가 발밑에서 서걱거렸다. 아직 해는 없다. 다만 동쪽 하늘 끝이 재를 문지른 것처럼 희끄무레했다.
포르투갈 카라벨 한 척이 그 잿빛을 밀며 들어왔다.
낡은 배였다. 돛폭은 기웠고 뱃전엔 따개비가 두껍게 앉았다. 산루카르에서 강을 거슬러 온 밀무역선 냄새가 났다. 배가 계류주에 밧줄을 걸자, 갑판에서 여윈 사내 하나가 천천히 내렸다.
키는 컸으나 뼈만 남았다. 볕에 그을렸다기보다 볕에 태워진 얼굴. 뺨은 패었고, 눈은 깊었다. 그 눈이 문제였다. 그 눈만은 죽지 않았다.
사내가 널판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부두가 그를 보았다.
처음엔 짐꾼 하나였다. 등에 진 대구 통을 내려놓다 말고 얼어붙었다. 다음은 밧줄을 감던 늙은 사공. 그다음은 아침 생선을 받으러 나온 아낙.
웅성거림이 물 번지듯 퍼졌다.
"저게…"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마테오 카브레라잖아."
이름이 나오자 부두가 한 박자 멈췄다. 갈매기 울음까지 멎은 듯했다.
*마테오 카브레라.*
3년 전 산 크리스토발 원정 함대와 함께 대양에서 익사한 사내. 세비야가 장례 미사까지 올린 사내. 통상원 명부에 붉은 줄이 그어진 이름. 죽은 자.
그 죽은 자가 지금 제 발로 걸어 부두 위에 서 있었다.
마테오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안 된다는 걸 몸이 먼저 알았다. 표류하던 넉 달, 그는 배웠다. 멈추는 자가 가라앉는다. 물 위에서든, 사람들 사이에서든.
그는 웅성거림 사이를 걸었다. 사람들이 성호를 그었다. 누군가는 물러섰고, 누군가는 반대로 목을 빼고 그의 얼굴을 확인하려 했다. 유령을 보듯. 아니, 유령을 확인하듯.
*그래. 나를 봐라.*
*나는 돌아왔다.*
여윈 어깨에 걸친 것은 낡은 뱃사람 외투 하나뿐이었다. 그 안쪽, 가슴께에 손바닥만 한 것이 딱딱하게 배겼다.
불탄 항해일지 조각.
가장자리가 검게 그을어 부스러지는 양피지 한 장. 거기 남은 것은 문장이 아니었다. 반쯤 타다 만 해안선 하나. 곶이 뻗고 만이 패인, 어떤 공식 해도에도 없는 해안의 윤곽.
그것이 그의 전부였다. 이름도, 배도, 자격도 없이 돌아온 사내가 손에 쥔 단 하나.
*나는 왜 살았나.*
넉 달을 표류하며 백 번을 물었다. 함께 탄 백여 명이 다 죽고 그만 살았다. 그 이유를 그는 이제 안다. 아니, 안다고 믿는다.
이 해안선을 세상에 다시 그리기 위해서.
그리고 이것을 지운 자들의 목을 잡기 위해서.
부두 끝, 그늘진 아치 아래에서 두 눈이 그를 좇고 있었다.
통상원의 문지기 서기였다. 회색 옷, 허리춤의 잉크통, 그리고 옆구리에 낀 명부. 그자는 웅성거림에 이끌려 나왔다가, 마테오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표정을 지웠다.
너무 빨리 지웠다.
마테오는 그 '너무 빨리'를 놓치지 않았다. 놀란 자는 입을 벌린다. 저자는 입을 다물었다. 놀란 게 아니라, 확인한 것이다. 예상하던 무언가를.
서기는 슬그머니 뒤로 빠졌다. 걸음이 급했다. 명부를 낀 팔이 아치 안쪽으로 사라졌다.
*벌써 알리러 가는군.*
마테오의 입가가 희미하게 비틀렸다. 웃음은 아니었다.
*빠르다. 좋아. 너희가 얼마나 빠른지 재 두마.*
그는 서기가 사라진 아치를 눈에 새겼다. 그리고 다시 걸었다. 마치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처럼.
강가를 따라 트리아나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물비린내에 익숙한 냄새 하나가 섞여 들었다. 파이프 담배. 값싼 것.
"…설마."
쉰 목소리였다.
마테오가 고개를 돌렸다. 그물 더미 옆, 등이 굽은 늙은 사내가 파이프를 문 채 굳어 있었다. 얼굴 반쪽에 옛 화상 흉터. 왼손 새끼손가락이 없다.
블라스.
아버지의 갑판장. 마테오가 아기 때 그의 무릎에서 밧줄 매듭을 배운 사람. 세비야에서 그를 이름이 아니라 얼굴로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
블라스의 파이프가 손에서 떨어졌다. 널판 위에 불똥이 튀었지만 늙은이는 밟을 생각도 못 했다.
"도련님…"
목소리가 갈라졌다.
"도련님이… 물에 잠겼다고, 내가 이 손으로 위패를…"
"블라스."
마테오가 그의 팔을 잡았다. 늙은 팔이 나뭇가지처럼 떨렸다.
"위패는 태워도 돼요. 나는 여기 있으니."
노인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그러나 마테오의 눈은 젖지 않았다. 젖을 여유가 없었다. 그의 눈은 이미 블라스의 어깨 너머, 아치 쪽을 살피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
"블라스. 조용한 데가 필요해요. 지금."
노인은 아직 얼떨떨했지만, 뱃사람의 몸은 명령에 먼저 반응했다. 그가 고갯짓으로 좁은 골목을 가리켰다.
"이쪽…"
두 사람이 그물 더미 뒤 골목으로 몸을 숨긴 그 순간이었다.
마테오의 눈앞에서, 세상이 한 번 하얗게 접혔다.
*물이다.*
*사방이 물이다. 검은 물. 밤보다 검고 기름보다 매끄러운 물.*
*배가 그 위를 미끄러진다. 바람도 없는데 미끄러진다. 뭔가가 배를 끌어당긴다. 앞쪽. 수평선. 그런데 수평선이 없다.*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선이 없다. 온통 검다. 검은 수평선.*
*키를 잡은 손이 하얗게 질린다. 도선사장의 목소리가 들린다. 침착해라. 침로를 지켜라. 여기가 여울이다. 유령 여울.*
*그런데 그 목소리가— 왜 저렇게 차분하지?*
*갑판 아래, 물이 든다. 비명. 나무가 찢기는 소리. 그리고 뱃전 난간, 손이 닿는 자리에—*
*밀랍 봉인 하나가 찍혀 있다. 붉은 밀랍. 물고기를 움켜쥔 발톱. 물수리.*
*그게 왜 거기 있지? 그게 왜—*
"도련님! 도련님!"
블라스가 그의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마테오는 골목 벽에 등을 대고 미끄러져 앉아 있었다. 식은땀이 등을 적셨다. 숨이 가빴다.
"또… 그거요?"
블라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마테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기억은 부서진 거울 같았다. 조각조각. 순서도 없이. 만질 때마다 손이 베였다. 넉 달을 표류하며 머리를 얻어맞은 탓이라고, 산루카르의 의원은 그랬다. 어떤 건 영영 안 돌아올 거라고.
하지만 방금 그 조각.
물수리 봉인.
그건 새로 떠오른 조각이었다. 그리고 그 조각이 모든 걸 바꿨다.
"블라스."
마테오가 벽을 짚고 일어섰다.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산 크리스토발은 침몰한 게 아니에요."
노인이 눈을 크게 떴다.
"폭풍이 아니었어. 여울도 그냥 여울이 아니었고." 마테오의 눈이 번득였다. "누군가 우리를 그리로 몰았어. 그리고 뱃전에… 표식을 남겼어. 침몰 전에."
"표식이라니, 그게 무슨—"
"물수리요."
블라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화상 흉터마저 하얗게 보였다. 늙은 갑판장은 반사적으로 골목 밖을 살폈다.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 벽에 귀가 돋는다는 듯이.
"도련님. 그 말은…" 그가 목소리를 더 낮췄다. "그 문양은, 함부로 입에 담는 게 아닙니다. 통상원 안쪽에서 그 말을 꺼냈다가 조용히 사라진 사람을, 나는 압니다."
"사라졌다고요?"
"바다에서. 잔잔한 날에." 노인의 눈이 흔들렸다. "잔잔한 날에 사라지는 배가, 세비야엔 있습니다."
마테오는 그 말을 삼켰다. 목구멍이 뜨거웠다.
*잔잔한 날에 사라지는 배.*
*산 크리스토발처럼.*
골목 저편, 부두 쪽에서 발소리가 늘었다.
한둘이 아니었다. 절도 있는, 여럿의 발소리. 구경꾼의 어수선한 걸음이 아니라, 목적이 있는 자들의 걸음.
마테오는 벽에 붙어 골목 어귀를 엿보았다.
아치 아래, 회색 옷의 서기가 돌아와 있었다. 이번엔 혼자가 아니었다. 그 뒤로 사내 넷. 뱃사람 차림이었지만 뱃사람이 아니었다. 뱃사람은 저렇게 손을 허리에 붙이고 걷지 않는다. 저건 칼자루에 손이 익은 자들의 걸음이다.
서기가 부두를 훑었다. 마테오가 사라진 자리를. 그리고 사내들에게 뭔가를 나직이 일렀다. 넷이 흩어졌다. 강가로, 골목으로, 트리아나 다리 쪽으로. 부챗살처럼.
*찾고 있다.*
*나를.*
마테오의 심장이 차갑게 뛰었다.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보다 선명한 것. 확인이었다.
3년 전, 그는 함대와 함께 지워졌다. 그리고 오늘 새벽, 발을 딛자마자 그들은 벌써 그를 다시 지우러 나섰다.
이것이 답이다. 그가 넉 달간 물 위에서 백 번 물었던 그 질문의 답.
*내가 살아 돌아온 걸, 저들은 반기지 않는다.*
*왜? 죽은 자는 말이 없어야 하니까. 지워진 해안은 다시 그려지면 안 되니까.*
블라스가 그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도련님, 가야 합니다. 저놈들—"
"알아요."
마테오는 골목 안쪽으로 물러서며,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 사내들을 눈에 담았다. 넷의 얼굴을, 걸음을, 어느 쪽으로 흩어지는지를.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안개 낀 머릿속 어딘가에서, 부서진 항해도의 한 귀퉁이가 제자리를 찾아 딸깍 맞물리는 느낌이었다.
그는 이름을 되찾으러 온 게 아니었다. 편히 살러 온 것도 아니었다.
단 하나를 위해 돌아왔다.
진실.
함대를 죽이고, 해안을 지우고, 그를 죽은 자로 만든 자들의 진실.
*좋아.*
*그렇게 나를 찾아라.*
*내가 먼저 너희를 찾을 테니.*
골목 끝, 트리아나의 미로가 어둑하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마테오는 블라스를 앞세우고 그 어둠 속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등 뒤에서, 칼을 익힌 발소리 하나가 골목 어귀로 꺾어 드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벌써, 그를 다시 죽이러 오고 있었다.
3년 전.
*그날 밤도 바다는 검었다.*
산 크리스토발 함대의 다섯 척이 좁은 수로로 들어서던 순간, 마테오는 이물에 서 있었다. 손에는 아버지가 물려준 놋쇠 나침반. 발밑으로는 잔잔한, 너무 잔잔한 물이 흘렀다.
"부도선사님." 키잡이가 불렀다. "해도대로라면 여기 여울이 없어야 합니다."
없어야 했다.
파드론 레알을 베껴 그린 공식 해도에는, 이 위도의 이 수로에 모래톱 하나 없었다. 깊고 안전한 물길. 그래서 기함이 앞장서 들어섰다.
그런데 바다가 달랐다.
마테오는 물빛을 읽었다. 좌현으로 흐르는 물의 결이 미세하게 갈라지고 있었다. 표면 아래에서 무언가가 물을 쪼개고 있다는 뜻. 여울이었다. 해도에 없는 여울.
*여울이 있는데 해도엔 없다.*
*아니—*
*해도가 틀린 게 아니다. 이 여울이 해도에서 지워진 거다.*
"수심 재!" 그가 소리쳤다.
납추가 던져졌다. 밧줄이 풀려 나갔다. 그리고—
"열두 길… 여덟 길… 네—"
납추 소리가 멎었다. 밧줄이 갑자기 느슨해졌다. 바닥이 코앞이라는 뜻.
"타를 꺾어! 전부 후진!"
늦었다.
기함의 용골이 모래에 박히는 소리를, 마테오는 평생 잊지 못했다.
배 전체가 신음하며 멈췄다. 뒤따르던 두 번째 배가 기함의 고물을 들이받았다. 나무가 찢어지고, 사람들이 갑판에서 굴렀다.
그때 하늘이 열렸다.
폭풍이었다. 여울에 걸린 배를 향해, 마치 기다렸다는 듯 서쪽에서 몰려온 검은 구름. 파도가 벽처럼 일어섰다.
*이건 우연이 아니다.*
여울로 유인하고, 폭풍이 삼킨다. 누군가 이 자리를, 이 시각을, 이 물길을 알고 있었다. 지워진 여울을 아는 자가.
"부도선사!"
선장이 그를 붙잡았다. 늙은 얼굴이 빗물과 공포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마테오의 손에 쥐여 주었다.
명령서였다. 밀랍으로 봉인된.
봉인 위에, 검은 밀랍으로 찍힌 문양 하나.
*물수리.*
물고기를 발톱으로 움켜쥔 새.
"이걸 받은 뒤로 침로가 바뀌었네." 선장이 소리쳤다. 파도 소리에 목소리가 찢겼다. "산루카르에서… 도선사장 각하의 봉인으로… 이 수로로 들라고—"
"각하라니, 누구—"
세 번째 파도가 배를 넘었다.
선장이 사라졌다. 갑판이 사라졌다. 세상이 검은 물로 채워졌다.
마테오의 마지막 기억은, 물에 젖어 번지는 검은 물수리 문양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던 그 명령서였다.
*그리고 지금.*
세비야. 통상원의 대기실.
마테오는 젖은 밤을 걷어 내고, 마른 낮의 한복판에 앉아 있었다.
블라스가 구해 준 낡은 웃옷은 몸에 맞지 않았다. 삼 년 만에 처음으로 면도를 했고, 처음으로 거울을 봤다. 거울 속 사내는 스물일곱보다 열 살은 늙어 보였다. 관자놀이에 흰 것이 섞여 있었다.
그래도 그는 여기 왔다.
이름을 되찾으려고.
*이름이 있어야 배를 얻는다. 배가 있어야 그곳에 간다. 그곳에 가야 증명한다.*
순서는 단순했다. 문제는, 그 첫 단추가 이 사자 굴 안에 있다는 것뿐.
높은 천장 아래, 서기 하나가 그를 불렀다.
"다음."
서기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깃펜을 잉크에 적시며 물었다.
"용건."
"복권을 청합니다." 마테오는 목소리를 낮게, 단단하게 유지했다. "이름과 도선사 자격의 복권. 나는 마테오 카브레라. 산 크리스토발 함대의 부도선사였습니다."
깃펜이 멈췄다.
서기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마테오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픽 웃었다.
"산 크리스토발." 그가 되뇌었다. "삼 년 전에 사라진 그 함대 말인가."
"그렇습니다."
"전원 사망으로 기록됐지. 부도선사 마테오 카브레라 포함." 서기가 장부를 뒤적였다. 손가락이 한 줄에 멈췄다. "여기 있군. '사망'. 통상원 인장까지 찍혀서."
"나는 살아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자가 자네가 처음이 아니야."
서기는 다시 깃펜을 들었다. 지루한 얼굴이었다.
"죽은 도선사의 이름은 값이 나가거든. 유족 연금, 미지급 급료, 조합 자격. 매달 한둘씩 와. 자기가 그 사람이라고. 어떤 자는 서류까지 위조해 오지." 그가 마테오를 위아래로 훑었다. "자네는 서류도 없군."
"불탔습니다. 전부."
"증인은."
마테오는 입을 열려다, 다물었다.
블라스. 늙은 갑판장 하나. 그의 말을 통상원이 믿을 리 없었다. 오히려 블라스까지 위험해진다.
"…지금은 없습니다."
"그럼 없는 거야." 서기가 장부를 덮었다. "이보게. 자네가 진짜 카브레라라 쳐도, 죽은 자로 기록된 사람을 되살리려면 도선사장 각하의 재가가 있어야 해. 각하께서 사칭꾼 하나 때문에 시간을 내실 것 같나?"
*도선사장.*
그 단어가 마테오의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산루카르에서 온 봉인. 도선사장 각하의 봉인.
"…도선사장이 누굽니까." 그가 물었다.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마른 침 위로 긁혔다. "지금."
서기가 이상하다는 듯 그를 봤다.
"모르고 왔나? 삼 년 전부터 쭉 같은 분이시네. 통상원 도선사장, 파드론 레알의 수호자."
"이름을."
"돈 암브로시오 벨라스코 각하."
세상이 아주 잠깐, 소리를 잃었다.
*벨라스코.*
암브로시오 벨라스코.
*스승님.*
마테오에게 별을 읽는 법을 가르친 사람. 물빛으로 여울을 읽는 법을, 해도의 선 하나에 목숨이 걸린다는 것을 가르친 사람. 아버지가 죽은 뒤, 그를 거둬 도선사의 길로 이끈 사람.
그가.
산루카르에서 봉인을 보낸 그 '도선사장 각하'가.
마테오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삼 년 전 그 밤, 검은 밀랍 위의 물수리가, 이제야 얼굴을 가졌다.
*아니. 아직 모른다.*
*봉인은 위조될 수 있다. 이름이 도용됐을 수도 있다. 스승님이… 그럴 리가.*
머릿속에서 두 개의 목소리가 싸웠다. 하나는 확신했고, 하나는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확인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그의 얼굴을 보는 것.
"각하를 뵙겠습니다." 마테오가 말했다.
서기가 코웃음을 쳤다. "지금 무슨—"
"각하께 전하시오." 마테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처음으로, 목소리에 부도선사였던 시절의 무게가 실렸다. "산 크리스토발이 돌아왔다고."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서기가 어이없어하며 안쪽으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회랑 저편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여럿의 발소리. 그리고 그 한가운데, 한 사람의 걸음.
느리고, 무겁고, 익숙한 걸음.
마테오는 그 걸음을 알았다. 갑판을 걷던 스승의 걸음. 아무리 배가 흔들려도 결코 흔들리지 않던.
회랑 끝에서 그가 나타났다.
암브로시오 벨라스코.
삼 년이 그를 비껴가지 않았다. 머리는 완전히 셌고, 검은 벨벳 옷은 예전보다 화려했다. 도선사장의 목걸이가 가슴 위에서 무겁게 빛났다. 얼굴은 여전히 조각처럼 단정했고, 눈은 여전히 깊고 차분했다.
그 눈이, 마테오를 향했다.
그리고—
마테오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놓칠 수 없었다. 삼 년간 물과 별과 사람의 얼굴을 읽으며 살아남은 자였다.
벨라스코의 눈이 마테오의 얼굴에 닿는 그 찰나.
동공이 흔들렸다.
아주 미세하게. 눈꺼풀이 한 번, 필요 이상으로 깜빡였다. 목의 힘줄이 순간 팽팽해졌다가 풀렸다. 조각 같은 얼굴 위로, 얼음판에 스치는 실금처럼—
*두려움.*
죽은 자를 보는 얼굴이 아니었다. 죽은 줄 알았던 자가 살아 있는 걸 본 얼굴. 있어서는 안 될 일을 마주한 얼굴.
반가움이 아니었다. 놀라움조차 아니었다.
*두려움이었다.*
그것은 한순간이었다. 벨라스코는 곧 얼굴을 다스렸다. 실금은 사라지고, 다시 잔잔한 물이 되었다. 그가 입가에 옅은, 슬픈 미소를 띠었다.
"세상에." 그가 낮게 말했다. 목소리는 따뜻했다. 너무 따뜻해서, 오히려 서늘했다. "마테오. 정말… 네가 살아 있었구나."
그가 두 팔을 벌리고 다가왔다. 스승이 제자를 맞는 걸음으로.
마테오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재회의 미소를. 목이 메는 척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조금 전 본 것을 두 번, 세 번 되짚고 있었다.
*봤다.*
*분명히 봤다.*
*스승님은 내가 살아 돌아온 걸 두려워한다.*
*왜 두려워하지? 제자가 살아 돌아왔는데. 기뻐야 할 사람이. 슬퍼야 할 사람이. 왜, 두려워하지?*
답은 하나뿐이었다. 그 하나뿐인 답이, 마테오의 심장을 천천히, 얼음물처럼 채워 갔다.
내가 살아 있으면 안 되는 이유를 아는 사람만이, 살아 있는 나를 두려워한다.
내가 죽었어야 한다는 걸 아는 사람만이.
벨라스코의 팔이 그의 어깨를 감쌌다. 늙은, 그러나 여전히 단단한 팔이었다. 향유 냄새가 났다.
"돌아왔구나, 아들아." 스승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마테오는 그 어깨 너머로, 검은 벨벳 위에서 흔들리는 도선사장의 목걸이를 보았다. 그리고 삼 년 전 그 밤, 물에 젖어 번지던 검은 물수리를 겹쳐 보았다.
두 개의 그림이, 딸깍, 하고 맞물렸다.
그 두려움이 모든 걸 말하고 있었다.
배신은, 사실이었다.
금과 배신은 이제 확실했다. 이 화를 이어서 집필한다.
향유 냄새가 코를 찔렀다.
마테오는 스승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흐느끼는 시늉을 했다. 어깨가 떨렸다. 목이 메었다. 3년 만에 돌아온 제자의, 죽었다 살아난 자의 눈물이었다.
전부 거짓이었다.
"돌아왔습니다." 그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스승님. 저… 돌아왔습니다."
*이 팔이 함대를 죽음으로 보냈다.*
*이 손이 산 크리스토발의 침로를 그렸다.*
*지금 나를 안고 있는 이 사람이.*
벨라스코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천천히, 다정하게. 마치 진짜로 안심하는 것처럼.
하지만 마테오는 느꼈다. 그 손끝이, 그의 등뼈를 따라 무언가를 재고 있다는 걸. 살이 붙었는지. 근육이 남았는지. 이 죽었던 자가 아직도 위험한지.
*재고 있어.*
*내가 얼마나 남았는지.*
"어떻게 살았느냐." 스승이 몸을 떼며 물었다. 눈에는 물기가 어려 있었다. 완벽했다. 그 물기마저 완벽했다. "산 크리스토발이 통째로… 하나도 돌아오지 못했는데. 어떻게, 너 혼자."
"기억이 없습니다." 마테오는 눈을 내리깔았다. "표류했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카나리아의 어느 어촌이었습니다. 배도, 사람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거짓말.*
*나는 전부 기억한다.*
*유령 여울의 검은 물을. 부서지던 용골을. 그리고 그 해안선을.*
"기억이 없다." 벨라스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도였다. 너무나 분명한 안도. "그래.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런 지옥을 봤으니."
*안심하는군.*
*내가 기억하지 못한다니, 스승님은 안심하는군.*
그 순간, 마테오는 알았다. 자신이 살아남을 유일한 길을. 그는 기억을 잃은 채로 있어야 했다.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채로. 위협이 되지 않는 넋 나간 표류자로.
그래야 도해방이 두 번째 칼을 뽑기 전에, 그가 먼저 움직일 수 있었다.
통상원의 대리석 계단을 내려올 때, 세비야의 저녁 빛이 과달키비르 강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마테오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등 뒤에서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벨라스코가 창가에 서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아마도 이미, 다른 누군가가.
*엔리케 살라사르.*
이름만 들어도 뱃사람들이 술잔을 내려놓는 사략선장. 배를 '사고'로 가라앉히는 자. 마테오는 그의 얼굴을 본 적 없었다. 하지만 확신했다. 산 크리스토발을 여울로 몰아넣은 손이 그였다는 걸.
*스승이 침로를 그렸고, 살라사르가 배를 몰았다.*
*머리와 칼.*
강가로 내려가는 골목은 좁고 어두웠다. 세비야의 부(富)는 대성당 쪽에 있었다. 강 건너, 트리아나에는 그 부를 만드는 손들이 있었다. 도공, 밧줄 꼬는 자, 뱃밥 메우는 자, 그리고 이름 없이 바다에서 죽는 자들.
마테오가 돌아갈 곳도 그곳이었다.
그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통상원의 명부에서 마테오 카브레라는 3년 전에 지워졌다. 죽은 자였으니까. 다시 이름을 되찾으려면 서류가, 증인이, 돈이 필요했다. 그에게는 셋 다 없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불탄 항해일지 한 조각과, 머릿속에 새겨진 해안선 하나뿐.
그리고 사람 하나.
트리아나의 밤은 강 이쪽과 달랐다.
기름 등잔이 문마다 흔들렸고, 골목에서는 값싼 포도주와 생선 튀기는 냄새가 났다. 어디선가 기타 소리가 났다. 취한 뱃사람의 노래. 여자의 웃음.
마테오는 후드를 눌러쓰고 골목을 걸었다. 세비야에는 그를 아는 얼굴이 아직 많았다. 죽은 자가 걸어 다니는 걸 보면 소문이 날 것이고, 소문은 강을 건너 통상원까지 갈 것이다.
'닻과 등불'이라는 낡은 선술집 뒷문을 두드렸다.
세 번. 멈추고. 두 번.
문틈으로 늙은 눈 하나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눈이, 크게 벌어졌다.
"……도련님."
문이 벌컥 열렸다. 백발이 성성한, 손등에 검버섯이 핀 노인이 서 있었다. 어깨는 여전히 넓었지만 세월에 굽었다. 40년을 갑판 위에서 산 사람의 등이었다.
블라스.
아버지의 갑판장이었고, 마테오를 무릎에 앉혀 별자리를 가르친 사람이었고, 온 세상이 그를 죽었다 할 때 유일하게 초를 켜 둔 사람이었다.
"블라스." 마테오는 후드를 벗었다.
노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이번에는 진짜였다. 향유 냄새 나는 거짓 눈물이 아니라, 소금기 밴 진짜 눈물.
"살아 있었구나. 살아 있었어." 블라스가 그의 두 팔을 붙잡았다. 손이 떨렸다. "내가 알았다. 내가 알았어. 저 강물이 널 데려가지 못했다는 걸. 카브레라의 아들을."
마테오는 목이 메었다. 오늘 처음으로, 정말로.
"들어와요." 블라스가 그를 안으로 끌었다. "빨리. 누가 봐."
뒷방은 좁았다. 낡은 해도 몇 장이 벽에 붙어 있었고, 구석에는 부서진 아스트롤라베가 굴러다녔다. 블라스가 포도주 한 잔을 따라 밀었다.
마테오는 마시지 않았다. 대신, 품에서 불탄 일지 조각을 꺼내 탁자에 놓았다.
블라스의 얼굴이 굳었다.
"이게 뭔지 알아요?" 마테오가 물었다.
노인은 그 그을린 종이를, 반쯤 타 버린 해안선 스케치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몰라. 이런 해안은… 어떤 해도에서도 본 적이 없다."
"나도 그래요." 마테오가 낮게 말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있어요. 눈을 감으면 보여요. 여기 만이 있고, 여기 암초가 두 줄로 서 있고, 물이 유리처럼 맑아요. 나는 그곳을 알아요, 블라스. 가 본 것처럼."
"산 크리스토발이 갔던 곳이냐."
"가려던 곳이죠." 마테오의 눈이 어두워졌다. "가지 못한 곳."
침묵이 흘렀다. 밖에서 기타 소리가 끊겼다.
"블라스." 마테오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알아야 할 게 있어요. 산 크리스토발의 기록. 통상원 명부에 뭐가 남아 있죠?"
노인이 눈을 감았다. 오래.
"아무것도 없다."
"……뭐라고요?"
"석 달 전이었다. 나도 알아보려 했어. 늙은 서기 하나가 내게 빚이 있었지. 명부실을 뒤졌다더라." 블라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산 크리스토발이라는 배는… 명부에 없어. 출항 기록도, 선원 명단도, 침몰 보고도. 전부. 마치 처음부터 그런 배가 없었던 것처럼."
마테오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지웠구나.*
*배 한 척을, 사람 이백 명을, 통째로 세상에서 지웠어.*
"그 서기는요?" 마테오가 물었다. "명부를 뒤진 서기."
블라스가 마테오의 눈을 보았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말했다.
"강에서 떠올랐다. 보름 뒤에. 술에 취해 빠졌다더라."
방 안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술을 입에도 안 대는 사람이었는데." 블라스가 덧붙였다.
마테오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누군가 값을 치렀다.*
*내가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이미 사람이 죽었다.*
그는 탁자 위의 일지 조각을 다시 품에 넣었다. 이제 이것은 종이 한 장이 아니었다. 사람 목숨의 무게가 실린 물건이었다.
"블라스." 그가 일어섰다. "확인할 사람이 있어요. 강 건너 명부가 정말 지워졌는지, 누가 지웠는지. 통상원 안쪽 소문까지 사고파는 사람."
블라스의 얼굴이 흐려졌다. "라 소르다냐."
"알아요?"
"트리아나에서 그 여자를 모르는 뱃사람은 없다." 노인이 마른침을 삼켰다. "귀머거리라 불리지만, 세비야에서 그 여자보다 잘 듣는 귀는 없어. 다만……" 그가 말끝을 흐렸다. "값이 비싸다. 돈이 아니라도, 반드시 값을 받아 내는 여자야."
"나한테 돈은 없어요." 마테오가 후드를 다시 썼다. "하지만 정보라면, 그 여자도 못 가진 게 나한테 있죠."
"뭐냐."
마테오는 대답 대신 옅게 웃었다. 그 웃음에, 블라스는 옛날 그 소년을 보았다. 열두 살에 이미 별을 읽고 조류를 읽던, 온 세비야가 한 세대에 한 번 나올 재능이라 부르던 그 아이를.
"죽은 자가 뭘 봤는지." 마테오가 말했다. "그건 세상 누구도 못 가진 정보예요."
라 소르다의 방은 '닻과 등불'에서 세 골목 떨어진, 향신료 창고 이층에 있었다.
계피와 정향 냄새가 계단까지 배어 있었다. 블라스가 앞장섰다. 좁은 나무 계단을 오르자, 구슬 발이 드리운 문이 나왔다.
그 안에, 여자가 있었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마흔일 수도, 예순일 수도 있었다. 검은 숄을 두르고, 촛불 하나에 의지해 무언가를 세고 있었다. 동전이 아니었다. 작게 접힌 종이쪽지들이었다. 세비야의 비밀들.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하지만 마테오가 들어서자, 세던 손을 멈췄다.
"죽은 사람 냄새가 나는군." 라 소르다가 말했다. 목소리는 쇳소리처럼 낮았다. "소금하고, 재하고, 오래된 두려움. 삼 년쯤 묵은."
마테오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귀머거리가 아니야.*
*이 여자는 냄새로 듣는다.*
"산 크리스토발." 마테오가 곧장 본론을 꺼냈다. "그 배에 대해 알고 싶소."
라 소르다가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촛불에 비친 눈이 깊고 검었다. 그녀는 마테오를 오래 보았다. 위아래로. 마치 무게를 다는 저울처럼.
"그 이름을 이 방에서 꺼낸 사람이." 그녀가 천천히 말했다. "너로 셋째다. 첫째는 늙은 서기였고, 둘째는 그 서기의 여자였지."
"그 둘은 지금 어디 있소."
"강바닥." 라 소르다가 다시 종이쪽지로 눈을 내렸다. "그러니 셋째는 조심하는 게 좋아. 나는 강바닥에 친구 늘리는 취미가 없거든."
블라스가 마테오의 소매를 잡았다. 그만두자는 눈빛이었다.
마테오는 움직이지 않았다.
"값을 말하시오." 그가 말했다.
라 소르다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스쳤다.
"돈은 없어 보이는데."
"돈 말고." 마테오가 후드를 벗었다. 촛불이 그의 얼굴을, 관자놀이의 흉터를 비췄다. "죽은 자가 유령 여울에서 뭘 봤는지. 그걸 아는 사람은 세상에 나 하나요. 통상원이 지우고 싶어 하는 그 진실을, 당신은 어디서도 못 사."
여자의 손이 다시 멈췄다.
이번에는, 오래.
방 안에 계피 냄새와 침묵만 흘렀다. 아래층에서 술꾼의 노랫소리가 아득하게 올라왔다.
"앉아." 마침내 라 소르다가 말했다. "죽은 자."
그녀가 촛불을 자기 쪽으로 당겼다.
"산 크리스토발의 기록은 지워졌다. 네 말이 맞아. 명부에서, 세관에서, 항만 대장에서. 한 사람의 손이 한 것이 아니야. 통상원 안에서, 여럿이, 조직적으로 지웠어."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건 세비야에 하나뿐이다. 도선사장의 인장(印章)이 찍힌 명령."
*벨라스코.*
마테오는 이를 악물었다. 놀랍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빨리 그 이름에 닿을 줄은.
"그리고 값을 치른 사람들이 있지." 라 소르다가 손가락으로 종이쪽지 하나를 밀었다. "묻고 다닌 사람들. 서기. 그 여자. 그리고 반년 전, 항만에서 산 크리스토발의 짐 명세를 봤다고 떠든 부두 인부 하나."
"그 인부는."
"짐수레에 깔렸다더라."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세비야는 위험한 도시야. 특히 그 배 이름을 아는 자들에게는."
마테오의 심장이 천천히 뛰었다. 분노가 아니라, 확신으로.
*하나하나, 값을 치르게 하는군.*
*묻는 자마다, 아는 자마다.*
*그런데 나는, 아는 것도 아니고 물은 것도 아니야. 나는 거기 있었어.*
*내가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지워지지 않은 마지막 기록이다.*
그 순간 라 소르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세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검은 눈이 문 쪽을, 정확히는 아래층 계단 쪽을 향했다.
"……조용." 그녀가 속삭였다.
블라스도 굳었다. 마테오도 숨을 죽였다.
아래층의 노랫소리가, 어느새 그쳐 있었다.
기타도. 웃음도. 술잔 부딪는 소리도.
트리아나의 밤이 통째로, 숨을 멈춘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정적 속에서, 마테오는 들었다.
나무 계단을 밟는 소리. 아주 느리게. 한 발. 또 한 발. 무게를 죽여, 소리를 죽여, 그러나 죽이지 못한 삐걱임.
한 사람이 아니었다.
셋. 어쩌면 넷.
라 소르다가 촛불을 손바닥으로 덮어 껐다. 방이 완전한 어둠에 잠겼다.
"뒷문." 그녀가 숨소리보다 낮게 말했다. "죽은 자. 너, 벌써 냄새를 묻히고 왔구나."
마테오의 손이 허리춤의 단검으로 갔다.
계단의 삐걱임이 멈췄다. 문 바로 앞에서.
구슬 발 너머,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차갑게 번뜩였다.
칼이었다.
구슬 발이 흔들렸다. 짤그랑, 하는 소리보다 먼저 마테오는 몸을 낮췄다.
*생각하지 마라. 읽어라.*
방은 좁았다. 세 걸음이면 벽에서 벽. 창은 하나, 등 뒤 왼편. 뒷문은 라 소르다가 말한 자리, 침상 뒤 휘장 너머. 문은 하나뿐, 그리고 지금 그 문으로 칼이 들어오고 있었다.
*문은 좁다. 한 번에 하나씩만 들어온다.*
그것이 첫 번째 읽기였다.
첫 그림자가 구슬 발을 젖히고 들어섰다. 어둠에 익은 마테오의 눈이 윤곽을 잡았다. 어깨가 벌어졌고, 오른손이 낮게 칼을 쥐었다. 발끝이 먼저 들어왔다. 싸움에 익은 자의 걸음.
블라스가 짐승처럼 낮게 으르렁댔다.
"죽은 자를 두 번 죽이러 왔나."
--
칼이 어둠을 갈랐다.
마테오는 피하지 않았다. 대신 옆으로, 창 쪽으로 굴렀다. 등 뒤의 창. 바깥의 희미한 달빛. 그 빛을 등지면, 상대는 그를 그림자로만 본다. 그러나 그는 상대를 빛 속에서 본다.
*빛을 등져라. 그것이 유일한 무기다.*
두 번째 읽기.
첫 자객이 마테오를 쫓아 창 쪽으로 붙었다. 순간, 사내의 얼굴이 달빛에 걸렸다. 광대뼈에 흉터. 무심한 눈. 죽이는 일을 밥 먹듯 하는 눈이었다.
칼이 다시 왔다. 위에서 아래로. 마테오는 앉은 채 벽을 박찼다. 칼끝이 어깨를 스쳤다. 뜨거운 줄이 그어졌다. 아프지 않았다. 아직은.
*이자는 나를 찌르려는 게 아니다. 몰아가려는 것이다.*
*몰아가면, 뒤에서 두 번째가 찌른다.*
마테오는 몰리는 척, 그러나 몰리지 않았다. 두 번째 그림자가 휘장 뒤에서 돌아 나오는 소리를 이미 들었으니까. 삐걱. 나무 바닥. 왼발.
그가 오른쪽으로 도는 순간, 마테오는 왼쪽으로 몸을 던졌다.
두 번째 자객의 칼이 허공을 갈랐다. 제 동료의 등 뒤로.
"틀렸어." 마테오가 숨을 뱉었다.
--
블라스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늙었어도 갑판장이었다. 삼십 년을 밧줄과 도끼와 성난 바다 사이에서 산 몸이었다. 블라스가 침상의 낮은 걸상을 집어 첫 자객의 관자놀이에 내리꽂았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
첫 자객이 무릎을 꺾었다. 완전히 쓰러지진 않았다. 그러나 흔들렸다.
"마테오!" 블라스가 외쳤다. "네 뒤!"
세 번째였다.
*셋. 역시 셋이었다.*
세 번째 자객은 문가에 서 있었다. 앞의 둘과 달랐다. 서두르지 않았다. 칼을 낮게 들고, 마테오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이자가 우두머리였다.
라 소르다는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 어딘가로 스며들었다. 정보상은 싸우지 않는다. 정보상은 살아남는다.
방 안에 이제 다섯. 마테오, 블라스, 그리고 셋.
*무기는 저쪽이 낫다. 수도 저쪽이 많다. 힘도 저쪽이다.*
*내가 가진 건.*
마테오의 눈이 방을 훑었다. 창. 걸상. 흩어진 촛대. 벽에 걸린 그물. 바닥의 물동이. 좁은 문.
*내가 가진 건, 이 방이다.*
--
"블라스. 창 쪽으로."
마테오가 낮게 말했다. 블라스가 곧장 움직였다. 오래 함께 배를 탄 자들의 말없는 신뢰. 갑판장은 도선사의 명령에 토를 달지 않는다. 특히 그 도선사가 무언가를 읽었을 때는.
세 번째 자객이 다가왔다. 첫 자객이 관자놀이를 짚으며 다시 일어섰다. 두 번째가 옆으로 벌어졌다. 셋이 반원을 그리며 마테오와 블라스를 창 쪽 구석으로 몰았다.
*그래. 몰아라.*
*몰린 자가 유리한 자리가, 세상엔 있다.*
구석. 등 뒤는 창. 좌우는 벽. 셋은 정면에서만 올 수 있다. 좁은 부채꼴. 한 번에 하나, 많아야 둘.
*문은 좁다. 구석은 더 좁다. 너희 셋의 수(數)를 여기선 못 쓴다.*
마테오는 발밑의 물동이를 가만히 밟아 끌어당겼다. 그러곤 흩어진 촛대 하나를 발끝으로 툭 찼다. 촛대가 바닥을 굴러 두 번째 자객의 발치로 갔다.
"불을 봐라." 마테오가 말했다.
두 번째 자객의 눈이 반사적으로 바닥으로 갔다. 촛불은 이미 꺼졌는데도. 어둠 속에서 인간의 눈은 빛의 잔상을 좇는다. 아주 짧은 찰나.
그 찰나에 마테오가 물동이를 걷어찼다.
물이 쏟아졌다. 바닥이 미끄러워졌다. 두 번째 자객이 헛디뎠다. 크게는 아니었다. 반 뼘. 그러나 좁은 구석에서 반 뼘은 목숨이었다.
블라스의 손이 뻗었다. 벽의 그물을 잡아채 두 번째 자객에게 던졌다. 낡은 어망이 사내의 칼 든 팔에 엉겼다. 갑판장의 손. 평생 그물을 던지고 당긴 손.
"지금!" 블라스가 소리쳤다.
--
마테오는 우두머리를 노리지 않았다.
*우두머리는 판을 읽는다. 판을 못 읽는 놈부터.*
그물에 엉킨 두 번째 자객에게 그가 파고들었다. 싸움꾼의 몸놀림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확했다. 상대의 균형이 무너진 각도, 칼이 엉킨 방향, 발이 미끄러진 순간. 마테오는 그 모든 선(線)을 한 장의 해도처럼 보았다.
그는 단검을 찌르지 않았다. 손잡이로 사내의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한 번. 두 번.
두 번째 자객이 무너졌다.
동시에 우두머리가 움직였다. 빨랐다. 앞의 둘과 격이 달랐다. 칼끝이 마테오의 옆구리를 향해 곧게 뻗어 왔다.
피할 수 없었다.
블라스가 몸을 던졌다.
늙은 갑판장이 제 몸으로 그 칼을 막았다. 칼이 블라스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둔탁한 소리, 그리고 신음.
"블라스!"
--
시간이 느려졌다.
마테오의 눈에 모든 것이 정지한 해도처럼 펼쳐졌다. 블라스의 어깨에 박힌 칼. 그것을 뽑으려 뒤로 당기는 우두머리의 팔. 그 팔이 만드는 순간의 빈틈. 사내의 열린 몸통. 노출된 목.
*여기다.*
마테오가 단검을 고쳐 쥐었다. 그리고 배운 적 없는 몸짓으로,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각도로, 우두머리의 목덜미를 향해 팔을 뻗었다.
날이 멈췄다. 살갗 바로 앞에서.
우두머리가 얼어붙었다. 뽑다 만 칼을 쥔 채. 그 목에 마테오의 단검이 닿아 있었다.
"움직이지 마." 마테오가 속삭였다. 제 목소리가 낯설 만큼 차가웠다. "네 동료 둘은 바닥에 있다. 너는 내 칼 아래 있고. 셈은 끝났어."
방이 고요해졌다. 블라스의 거친 숨소리만이 어둠을 채웠다.
--
마테오는 왼손으로 우두머리의 칼을 쥔 손목을 비틀어 꺾었다. 칼이 바닥에 떨어졌다. 블라스가 신음하며 물러났다. 다행히 어깨였다. 급소는 아니었다.
"누가 보냈나." 마테오가 물었다.
우두머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마테오를 노려보았다. 두려움이 아니라, 다른 무엇이 그 눈에 있었다. 놀라움. 마치 있어서는 안 될 것을 본 얼굴.
"너……" 사내가 낮게 뇌까렸다. "정말 살아 돌아왔군. 유령 여울에서."
마테오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자는 안다. 유령 여울을. 산 크리스토발을.*
"누가 보냈어." 마테오가 다시, 더 낮게 물었다. 칼이 살갗을 조금 더 눌렀다.
사내가 웃었다. 피 섞인 웃음이었다.
"넌 이미 죽은 몸이야. 세 번을 살아도, 네 번째엔 죽어. 우린 바다처럼 많으니까."
--
그때 마테오의 눈이 사내의 목덜미에 닿았다.
칼에 눌려 옷깃이 젖혀진 자리. 쇄골 아래. 거기, 어둠 속에서도 보이는 것이 있었다.
낙인이었다. 살에 지진 문양.
발톱. 물고기를 움켜쥔, 맹금의 발톱.
*물수리.*
마테오는 그 문양을 안다. 아니, 안다기보다 몸이 기억했다. 불탄 항해일지의 마지막 장. 산 크리스토발이 사라지기 전, 아버지 같던 늙은 도선사가 마지막으로 넘겨준 그 한 조각. 그 귀퉁이에, 누군가 손톱으로 긁어 그린 듯한 같은 문양.
물고기를 움켜쥔 발톱.
그때는 몰랐다. 뜻을 몰랐다. 그러나 지금, 죽이러 온 자의 살에 새겨진 그것을 보는 순간—
*이거였어.*
*이 표식이 함대를 죽였다.*
*폭풍이 아니었어. 여울이 아니었어. 이 발톱이었어.*
마테오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분노 때문이 아니었다. 3년 만에, 부서진 기억의 조각 하나가 제자리를 찾아 들어맞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
"이 문양." 마테오가 말했다. 목소리가 잠겼다. "어디서 받았지."
사내의 눈이 커졌다. 마테오가 그것을 알아본다는 사실에, 처음으로 진짜 두려움이 스쳤다.
"넌 몰라야 했어." 사내가 뇌까렸다.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몰라야—"
문밖에서 소리가 났다.
계단. 여러 발. 이번엔 소리를 죽이지 않은 발소리. 급하게 올라오는.
*지원이 온다. 저쪽의.*
라 소르다의 목소리가 휘장 뒤에서 날아왔다. 어느새 돌아와 있었다.
"뒷문. 지금. 안 그러면 다 죽어."
마테오는 이를 악물었다. 우두머리의 목에서 칼을 떼는 순간, 이자는 다시 칼이 된다. 그러나 데려갈 수도, 여기서 답을 받아낼 시간도 없었다.
그가 단검 손잡이로 사내의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우두머리가 무너졌다.
"블라스, 일어설 수 있나."
"이깟 어깨로 안 죽어." 늙은 갑판장이 이를 갈며 일어섰다.
--
뒷문 너머는 좁은 나무 계단이었다. 트리아나의 뒷골목으로 이어지는. 라 소르다가 앞장섰다. 어둠 속을 고양이처럼 짚어 내려갔다.
골목의 찬 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등 뒤 이층에서 고함이 터졌다. 쓰러진 자들을 발견한 소리. 그리고 뒤쫓는 발소리.
셋은 뛰었다. 좁은 골목을, 빨래가 널린 처마 밑을, 강 냄새가 나는 방향으로.
라 소르다가 어느 어두운 아치 아래에서 멈췄다. 숨을 골랐다. 그녀의 검은 눈이 마테오를 훑었다. 어깨의 상처, 손에 쥔 피 묻은 단검, 그리고 그 눈빛.
"넌 싸움꾼이 아니야." 그녀가 말했다. "그런데 셋을 눕혔어. 어떻게."
마테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떨리는 손. 그러나 그 떨림 아래, 무언가가 단단하게 굳어 가고 있었다.
*나는 싸움꾼이 아니다.*
*나는 읽는 사람이다. 바다를, 사람을, 방을, 판을.*
*그리고 오늘, 나는 그들의 표식을 읽었다.*
--
블라스가 벽에 기대 어깨를 눌렀다. 피가 손가락 사이로 배어 나왔다. 그러나 늙은 눈은 형형했다.
"마테오." 그가 낮게 말했다. "저놈들, 그냥 도둑이 아니었어. 널 정확히 노렸다. 이름을 알고 왔어."
"알아." 마테오가 말했다.
"세비야 전체가 널 죽이려 들 거다. 저들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싸워."
마테오는 강 쪽을 보았다. 어둠 속에 과달키비르가 검게 흘렀다. 그 강을 따라 내려가면 산루카르, 그리고 대양. 산 크리스토발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그 바다.
*블라스의 말이 맞다.*
*나는 저들이 누군지 모른다. 얼마나 많은지,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모른다.*
*통상원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도 모른다.*
*맨손으로는 못 싸운다. 이름도, 배도, 사람도 없이는.*
*그런데.*
마테오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그리고 부서진 기억 속에서, 하나의 선이 떠올랐다. 3년 전 표류하던 뗏목 위에서, 열에 들뜬 채 몇 번이고 손끝으로 허공에 그리던 선.
어떤 해안선이었다.
굽이치는 만(灣). 세 개의 곶. 안으로 파고든 깊은 물길. 그 어떤 파드론 레알에도, 그 어떤 공식 해도에도 없는 형태.
그러나 그의 눈꺼풀 안쪽에는, 불로 지진 듯 선명한 해안.
*저들이 감추려는 것이 저 표식이라면.*
*저들이 함대를 죽여서까지 지우려 한 것이 있다면.*
*그건 저 해안이다.*
*내 기억 속에만 남은, 지워진 해안.*
마테오가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 그 눈이 낯설게 빛났다.
"블라스." 그가 말했다. "우리에겐 해도가 필요해."
"해도?" 늙은 갑판장이 상처를 짚은 채 그를 보았다. "통상원이 파는 해도야 널렸다. 그딴 게 무슨—"
"아니." 마테오가 고개를 저었다. "통상원이 파는 해도 말고."
그가 제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짚었다.
"아무도 못 가진 해도. 세상 어디에도 없고, 오직 여기에만 있는 해도."
라 소르다의 검은 눈이 가늘어졌다. 블라스가 숨을 삼켰다.
강물이 어둠 속에서 검게 흘렀다. 그 너머 어딘가, 지워진 해안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과 싸우려면.*
*내 머릿속의 그 해안을, 다시 그려야 한다.*
블라스는 오래 말이 없었다.
강물 소리만이 창고 바닥의 침묵을 채웠다. 늙은 갑판장은 마테오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았다. 마치 3년 전 뗏목 위에서 열에 들떠 헛것을 그리던 그 사내를 다시 보는 것처럼.
"머릿속의 해안을." 블라스가 천천히 되뇌었다. "그려서 뭘 어쩌겠다는 거냐."
"물증으로 만든다." 마테오가 말했다.
"물증?"
"저들이 함대를 죽여서까지 지운 해안이 실재한다는 증거. 그걸 손에 쥐면—" 마테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우린 저들의 급소를 쥐는 거야."
라 소르다가 벽에 기댄 채 코웃음을 쳤다. 트리아나 뒷골목의 정보상. 그 여자의 검은 눈은 밤보다 어두웠다.
"머릿속에 있는 선 하나로 해도를 만든다. 열에 들떠 표류하던 자의 기억으로." 그녀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젊은 도선사 나리. 기억은 거짓말을 해."
"기억은 거짓말을 해도, 해안선은 안 해." 마테오가 그녀를 마주 보았다. "곶의 개수. 만의 각도. 물길의 깊이. 그건 내가 지어낼 수 있는 게 아니야. 본 것만 그릴 수 있어."
"그걸 누가 믿고—"
"제도사." 마테오가 말을 끊었다. "손끝으로 그리면, 제도사는 안다. 지어낸 선인지, 본 선인지."
라 소르다의 눈이 가늘어졌다.
*손에 남은 건 두 가지다.*
마테오는 품속에서 그것을 꺼냈다. 기름먹인 천에 싸인, 손바닥만 한 조각.
불탄 항해일지.
가장자리가 숯처럼 검게 오그라들었고, 중앙만 겨우 살아남았다. 3년 전, 유령 여울에서 불길이 배를 삼킬 때 그가 가슴에 품고 뛰어든 단 하나의 물건. 뗏목 위에서도, 표류하는 내내 죽음보다 먼저 지켰던 것.
"아직도 그걸 갖고 있었나." 블라스의 목소리가 잠겼다.
마테오는 대답하지 않고 조각을 펼쳤다. 촛불에 기울였다.
불에 지워진 글자들 사이로, 살아남은 것이 있었다. 숫자 몇 개. 수심을 재는 단위. 그리고 한 귀퉁이에, 손톱만 하게 살아남은 선 하나.
해안선의 파편.
*내가 그날 밤 급히 베껴 그린 것.*
*산 크리스토발이 침몰하기 전, 마지막으로 본 해안.*
그 파편만으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곶 하나의 곡선. 물길의 시작. 전체의 백분의 일도 안 되는 조각. 그러나—
"이게 열쇠야." 마테오가 속삭였다. "내 머릿속의 해안과, 이 조각이 맞물리면."
그는 손끝으로 허공에 그 선을 이었다. 조각에서 시작해, 기억 속으로. 굽이치는 만. 세 개의 곶. 안으로 파고든 깊은 물길.
*맞물린다.*
*이 파편은, 내가 미친 게 아니라는 증거다.*
"제도사가 필요하다고 했지." 라 소르다가 벽에서 몸을 뗐다.
"솜씨 좋은 자로. 그리고 입이 무거운 자로." 마테오가 말했다. "통상원과 얽히지 않은 자."
라 소르다가 짧게 웃었다. 비웃음에 가까웠다.
"통상원과 안 얽힌 제도사? 세비야에서? 나리, 이 도시의 해도쟁이는 죄다 통상원 밥을 먹거나, 통상원이 죽였거나 둘 중 하나야."
*통상원이 죽였거나.*
마테오의 눈이 번뜩였다. "그럼 후자를 찾아줘."
라 소르다가 멈칫했다.
"통상원에게 당한 자. 잃을 게 없는 자. 그런 자가 가장 정직하게 그린다." 마테오가 말했다. "돈은 있어. 블라스가—"
"돈 문제가 아니야." 라 소르다가 낮게 말했다. 그 여자의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웃음기가 걷혔다. "그런 자를 건드리면, 자네가 그 자를 두 번 죽이는 꼴이 될 수도 있어. 통상원은 자기가 밟은 자를 계속 지켜보거든."
침묵.
강물이 창고 밑을 훑고 지나갔다.
"…한 사람 있긴 해." 라 소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트리아나 강변, 무너진 도자기 가마 뒤편. 조각칼 하나로 근근이 먹고사는 제도사가 있어. 아버지가 통상원 최고의 해도 조각사였다지. 그런데 어느 날 아비가 '사고'로 죽고, 집안이 통째로 몰락했어."
*사고.*
그 단어가 마테오의 등줄기를 훑었다.
"이름은?"
"이네스." 라 소르다가 말했다. "이네스 델 리오. 하지만 미리 말해두지. 그 여자는 손님을 안 받아. 특히 통상원 냄새가 나는 자는."
"난 통상원이 죽인 자야." 마테오가 일어섰다. "그 여자와 같은 편이지."
트리아나의 밤은 강 냄새로 무거웠다.
무너진 도자기 가마는 검은 아가리처럼 벌어져 있었고, 그 뒤편 좁은 골목 끝에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블라스가 앞장섰고, 마테오는 두건을 깊이 눌러썼다. 사흘 전 살라사르의 칼이 그의 옆구리를 스친 뒤로, 어둠 속 모든 그림자가 칼처럼 보였다.
문을 두드렸다.
한참 만에, 안에서 목소리가 났다. 젊은 여자의 목소리. 그러나 쇠처럼 날이 서 있었다.
"안 받아요. 돌아가요."
"해도를 그릴 사람을 찾습니다." 마테오가 말했다.
"통상원에 널린 게 해도쟁이예요. 거기 가요."
"통상원엔 없는 해도라서."
문 안쪽에서 정적이 흘렀다.
*걸렸다.*
마테오는 알았다. 제도사의 침묵은 두 가지뿐이다. 관심 없어서 조용한 침묵과, 관심이 생겨서 조용한 침묵. 이건 후자였다.
"어떤 해도길래." 여자의 목소리가 조금 달라졌다.
"어떤 공식 해도에도 없는 해안." 마테오가 말했다. "직접 보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걸 기억하고 있습니다."
문이 열렸다.
이네스 델 리오는 생각보다 젊었다. 스물 몇. 촛불 아래 얼굴이 창백했고, 오른손 검지에 조각칼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그러나 마테오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그 눈이었다.
*읽는 눈이다.*
사람을, 선을, 거짓을 읽는 눈. 마테오 자신이 바다를 읽듯, 저 여자는 종이 위의 선을 읽는다.
이네스의 눈이 그를 빠르게 훑었다. 소금기에 튼 손. 걸음걸이. 두건 아래 그을린 얼굴.
"뱃사람." 그녀가 말했다. "도선사. 아니— 부도선사였던 자. 손에 아직 컴퍼스 자국이 있어."
블라스가 흠칫했다. 마테오는 웃지 않았다.
"당신도 읽는군."
"직업병이에요." 이네스가 문을 조금 더 열었다. "들어와요. 오래는 안 돼요."
좁은 방이었다. 벽마다 미완성 해도가 걸렸고, 조각칼과 동판이 어지러웠다. 몰락한 집안의 냄새. 그러나 그 어수선함 속에서도, 걸린 해도의 선들은 하나같이 칼처럼 정확했다.
*솜씨는 진짜다.*
마테오는 품에서 불탄 조각을 꺼냈다. 탁자 위에 조심스럽게 펼쳤다.
이네스의 눈이 그 조각에 닿는 순간—
멈췄다.
그 여자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어디서 났어요." 이네스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내 배에서." 마테오가 말했다. "3년 전."
"이건 항해일지예요. 원정 함대의." 그녀의 손끝이 떨렸다. 조각에 닿을 듯 말 듯. "이 필체, 이 수심 표기법… 통상원 정식 도선사의 것. 그런데 불에 탔어. 왜 항해일지가 불에 타요? 배와 함께 가라앉는 게 정상인데."
*이 여자는 안다.*
마테오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배가 불탔으니까." 그가 말했다.
"침몰이 아니라?"
"침몰 전에 불이 먼저 났어. 그리고—" 마테오가 그녀를 똑바로 보았다. "그 불은, 폭풍이 낸 게 아니었어."
이네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것이 있었다.
*통상원이 죽인 자와, 통상원이 죽인 자.*
이네스는 다시 조각으로 시선을 떨궜다. 이번엔 제도사의 눈으로. 촛불을 끌어당기고, 조각을 기울이고, 살아남은 선 하나하나를 훑었다.
그리고 그 여자의 표정이 변했다.
"…이 수심 표기." 그녀가 낮게 말했다. "이거, 이상해요."
"뭐가."
"여기." 이네스가 손톱으로 숫자 하나를 가리켰다. "수심이 갑자기 얕아졌다가, 다시 깊어져요. 여울처럼. 그런데—" 그녀가 미간을 좁혔다. "이 자리엔 여울이 있으면 안 돼요. 해안에서 이만큼 떨어진 외해에, 이런 각도로 솟은 여울은 자연에선 안 생겨."
마테오의 온몸이 얼어붙었다.
*유령 여울.*
"…무슨 뜻이야." 그가 겨우 물었다.
이네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 눈이 서늘했다.
"이 여울은 해도에 그려 넣은 거예요. 없는 걸, 있는 것처럼. 아니면—" 그녀가 침을 삼켰다. "있는 걸, 없는 것처럼 지운 자리에 남은 흔적이거나."
방 안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마테오는 그 여자가 방금 무엇을 건드렸는지 알았다. 3년간 그를 잠 못 들게 한 것. 함대가 폭풍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보내져' 죽었다는 확신. 그 확신의 정체를, 이 몰락한 제도사가 조각 하나로 짚어냈다.
"당신, 이걸 어떻게 알아." 마테오의 목소리가 낮았다.
이네스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벽으로 걸어가, 걸린 해도 하나를 걷어냈다. 그 뒤에 숨겨져 있던 다른 종이를 꺼냈다. 낡고, 접힌 자국이 깊은 해도였다.
"내 아버지가 죽기 전에 그리던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통상원 최고의 조각사였죠.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이상한 걸 발견했어요. 같은 해안인데, 팔려나가는 해도랑 통상원 금고에 있는 원본이 달랐어."
*달랐다.*
"어떻게 달랐지." 마테오가 물었다.
"팔리는 해도엔 없는 여울이, 원본엔 있었어요. 반대로, 원본에 있는 어떤 해안이, 팔리는 해도엔 통째로 없었고." 이네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버지는 그걸 상관에게 물었어요. 왜 원본과 사본이 다르냐고. 그리고 사흘 뒤, 아버지는 강에서 시체로 떠올랐죠. '사고'로."
블라스가 나직이 신음했다.
"그때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있어요." 이네스가 마테오를 보았다. "'해도는 감추려 그리는 게 아니다.' 무슨 뜻인지 몰랐죠. 그런데 지금, 당신 손의 이 조각을 보니—"
그녀가 불탄 일지를 가리켰다.
"이제 알겠어요. 누군가 해안을 지우고 있어요. 세비야의 심장에서. 그리고 그걸 알아챈 사람은—" 그녀가 마른침을 삼켰다. "죽어요."
마테오는 오래 침묵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 여자에게는 숨길 이유가 없었다. 같은 상처를 가진 자였으니까.
"그 지워진 해안을." 그가 말했다. "내가 봤어."
이네스의 눈이 커졌다.
"3년 전. 산 크리스토발 함대. 유령 여울에서 통째로 사라졌지. 나는 유일한 생존자야." 마테오가 두건을 벗었다. 촛불이 그의 얼굴을 온전히 드러냈다. "세상은 나를 죽은 자로 알아. 마테오 카브레라."
이네스가 숨을 삼켰다. 그 이름을 아는 얼굴이었다.
"그 이름은… 3년 전 사라진 부도선사—"
"그래." 마테오가 탁자에 두 손을 짚었다. "그리고 나는, 그 여울에 닿기 직전에 봤어. 어떤 해안을. 어떤 파드론 레알에도 없는 해안을. 굽이치는 만. 세 개의 곶. 깊은 물길."
그가 자신의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게 아직 여기 있어. 불로 지진 듯 선명하게. 그걸 당신이 그려줬으면 해. 이 조각과 맞물려서, 온전한 해도로."
이네스는 그를 오래 바라보았다. 제도사의 눈으로. 거짓과 진실을 가르는 눈으로.
"…앉아요." 그녀가 마침내 말했다. 동판 옆의 빈 의자를 가리켰다. "그리고 말해요. 본 대로. 하나도 빠짐없이."
마테오가 앉았다.
이네스가 새 종이를 폈다. 조각칼 대신, 가느다란 목탄을 집었다. 손끝이 종이 위에 떠올랐다.
"만의 입구부터." 그녀가 말했다. "물이 어느 쪽에서 들어왔죠?"
"북서에서." 마테오가 눈을 감았다. 3년 전의 바다가 눈꺼풀 안쪽에 펼쳐졌다. "왼편에 첫 번째 곶. 낮고 길게 뻗은. 그 끝이 갈고리처럼 안으로 휘었어."
목탄이 움직였다. 사각, 사각.
"두 번째 곶은."
"만 안쪽. 첫 번째보다 높고 가팔라. 절벽이었어. 붉은 절벽."
사각, 사각. 목탄이 종이를 긁는 소리만이 방을 채웠다.
*떠오른다.*
마테오의 감은 눈 안에서, 3년간 봉인했던 해안이 되살아났다. 열에 들떠 뗏목 위에서 몇 번이고 허공에 그리던 그 선. 이제 처음으로, 종이 위에 실체를 얻고 있었다.
"세 번째 곶." 그가 속삭였다. "그리고 그 사이로, 안으로 깊이 파고든 물길. 배가 들어갈 수 있는. 아니—"
그가 눈을 떴다.
"함대가 통째로 숨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몰랐다.
촛불이 반쯤 녹아내렸을 때, 이네스가 목탄을 내려놓았다.
"됐어요." 그녀가 말했다. "일단, 밑그림은."
마테오가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숨이 멎었다.
그것이 거기 있었다. 3년간 그의 머릿속에만, 눈꺼풀 안쪽에만 있던 해안. 굽이치는 만. 세 개의 곶. 깊은 물길. 이제 종이 위에 선으로, 실체로 존재했다.
*내가 미친 게 아니었다.*
*이건 실재한다.*
이네스도 그 종이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표정이 이상했다. 완성의 기쁨이 아니었다. 무언가— 두려움에 가까운.
"왜 그래." 마테오가 물었다.
이네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린 다른 해도들을 하나씩 걷어냈다. 통상원에서 흘러나온 공식 해도들. 카나리아. 서아프리카 해안. 대서양의 알려진 모든 물길.
그녀가 그것들을 방금 그린 밑그림 옆에 나란히 폈다.
그리고 하나하나, 대조하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위도선을 짚고, 경도를 재고, 해안의 곡률을 비교했다. 제도사의 손. 빠르고 정확한. 마테오는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이네스의 손이 점점 느려졌다.
그리고— 멈췄다.
"마테오." 그녀가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당신이 그린 이 해안."
"응."
"이 위도와 경도라면, 여기 있어야 해요." 그녀가 공식 해도의 한 지점을 손톱으로 짚었다. 대서양 한복판.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텅 빈 바다.
"그런데—"
이네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얬다.
"어떤 해도에도, 여기엔 육지가 없어요. 파드론 레알에도. 통상원 원본에도. 세상 그 어떤 공식 해도에도."
방 안이 얼어붙었다.
마테오는 자신이 그린 해안과, 그 옆의 텅 빈 바다를 번갈아 보았다.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것이 기어올랐다. 그러나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확신이었다.
*없는 게 아니야.*
*지워진 거야.*
"이네스." 마테오가 천천히 말했다. "왜 세상 어떤 해도에도 이 해안이 없는지, 이제 알겠어."
그녀가 그를 보았다.
마테오가 자신이 그린 해안선 위에 손을 얹었다. 3년 전 함대를 통째로 삼킨 바다. 스승이 그를 보낸 죽음의 자리. 그리고 그 죽음으로 지키려 한, 세상 끝의 육지.
"이건 어떤 해도에도 없어. 왜냐하면—"
촛불이 흔들렸다.
"저들이 지웠으니까. 이 해안을 그린 자들을 전부 죽여서라도."
습기 찬 방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촛불만이 이네스의 얼굴 위에서 흔들렸다.
마테오의 손끝이 아직 해안선 위에 얹혀 있었다. 그 아래 종이가 미세하게 떨렸다. 아니, 떨린 건 그의 손이었다.
"전부 죽여서라도." 이네스가 그 말을 되뇌었다. 조각사의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그 밑바닥에서 무언가가 끓고 있었다. "말이 되는 소리예요? 육지 하나를 감추자고, 함대를 통째로?"
"돼." 마테오가 고개를 들었다. "너도 방금 봤잖아."
이네스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지금 자기 손으로 확인한 것을 아직 믿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 만했다. 제도사에게 해도는 세상의 뼈대다. 그 뼈대에 구멍이 뚫려 있다는 건, 세상 자체가 거짓말이라는 뜻이니까.
"다시 해." 마테오가 말했다.
"뭘요."
"확인. 한 장으로는 부족해. 파드론 사본을 전부 꺼내."
이네스가 궤짝을 열었다.
낡은 목궤 안에 두루마리들이 빼곡했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들. 통상원에서 흘러나온 사본, 리스본에서 밀수된 포르투갈 해도, 제노바 상인이 팔다 남긴 조각들. 도해방에 아비를 잃은 딸이, 그 아비의 유품으로 쌓아 올린 작은 산이었다.
"열두 장." 이네스가 두루마리를 하나씩 펼치며 말했다. "출처가 다 달라요. 세비야, 리스본, 제노바… 손도 다르고, 연도도 달라요. 이 정도면 서로 베낀 게 아니라는 건 확실해요."
"좋아. 그게 핵심이야."
마테오는 탁자 위로 상체를 숙였다.
열두 장의 해도가 촛불 아래 나란히 펼쳐졌다. 저마다 다른 잉크, 다른 필체, 다른 나침도. 그러나 모두가 같은 바다를 그리고 있었다. 대서양 한복판. 그가 3년 전 표류했던 그 위도.
"여기." 마테오가 자기가 그린 해안선의 좌표를 짚었다. "이 위도, 이 경도. 열두 장 전부에서 같은 자리를 찾아."
이네스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경도선을 따라가고, 위도를 재고, 좌표를 짚는다. 한 장. 두 장. 세 장. 그녀의 눈이 점점 좁아졌다. 조각사의 눈. 1밀리의 어긋남도 놓치지 않는 눈.
방 안에서 들리는 건 종이 넘기는 소리와, 그녀의 숨소리뿐이었다.
"이상해요."
이네스가 다섯 번째 해도에서 멈췄다.
"뭐가."
"이 다섯 장… 전부 여기가 비어 있어요. 당신 좌표 자리가." 그녀가 손톱으로 텅 빈 바다를 훑었다. "그건 이상한 게 아니에요. 아무도 안 가 본 바다는 원래 비어 있으니까."
"그런데?"
이네스가 고개를 들었다.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비어 있는 방식이 이상해요."
마테오의 등줄기가 곤두섰다.
"무슨 말이야."
"보세요." 그녀가 다섯 장을 나란히 끌어당겼다. "빈 바다에도 규칙이 있어요. 제도사는 모르는 곳을 그냥 비워 두지 않아요. 해류를 그리고, 추정 수심을 적고, 바람 방향을 넣어요. '여기는 이럴 것이다'라는 추측을 남긴단 말이에요."
그녀의 손톱이 다섯 장의 같은 자리를 차례로 두드렸다.
"그런데 여기만… 완벽하게 비어 있어요. 해류도 없고, 수심도 없고, 바람도 없어요. 마치—"
이네스가 침을 삼켰다.
"마치 뭔가를 그렸다가, 지운 것처럼."
촛불이 흔들렸다. 마테오는 그 다섯 장의 텅 빈 자리를 노려보았다. 어디에도 없는데, 어디에나 있는 부재(不在). 있어야 할 것이 빠진 자리는, 아무것도 없는 자리와 다르다.
이네스는 그것을 보는 눈을 가졌다.
"더 있어." 마테오가 낮게 말했다. "나머지도 봐."
여섯 번째. 일곱 번째.
이네스의 손이 점점 빨라졌다. 그리고 여덟 번째 해도에서, 그녀가 숨을 들이켰다.
"여기는 그렸어요."
"뭐?"
"여기엔 해안선이 있어요. 당신 좌표에." 이네스가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작지만, 분명히 육지예요. 곶 하나, 만 하나…"
마테오가 달려들 듯 몸을 숙였다.
거기 있었다. 자기가 기억으로 그린 것과 소름 끼치게 닮은 곡선. 곶의 각도, 만의 깊이. 그가 3년을 악몽으로 되풀이한 그 해안선이, 낯선 제노바 제도사의 손끝에서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봐. 있잖아. 내가 미친 게 아니었어—"
"잠깐만요."
이네스의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그녀는 웃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려 있었다. 조각사의 손가락이 그 작은 해안선의 가장자리를 천천히 쓸었다.
"이거… 이 선은 이 지도의 다른 선들이랑 달라요."
"어떻게 다른데."
"잉크가 달라요. 필압도 달라요." 그녀가 촛불에 해도를 바짝 들이댔다. 빛이 종이를 투과하며 잉크의 두께를 드러냈다. "이 제노바 제도사는 해안을 그릴 때 펜을 눕혀서 그어요. 선이 두껍고, 끝이 뭉툭해요. 이 지도 전체가 그래요. 그런데 이 해안선만—"
그녀가 문제의 선을 손톱으로 짚었다.
"펜을 세워서 그었어요. 가늘고, 날카롭고, 끝이 뾰족해요. 다른 손이에요. 이 지도를 그린 사람이 그린 게 아니에요."
마테오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맞물렸다. 톱니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덧그렸다는 거야?"
"아니요." 이네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 부정이 더 무서웠다. "덧그린 게 아니에요. 남겨 둔 거예요."
"무슨 소리야."
"들어 봐요." 이네스가 열두 장을 두 무더기로 갈랐다. 다섯 장, 그리고 나머지. "지운 지도가 다섯 장. 그린 지도가… 이거 하나. 나머지는 애초에 그 바다를 그릴 일이 없던 지도들이에요."
그녀가 '그린' 한 장을 들어 올렸다.
"누군가 이 해안을 전부 지우고 다녔어요. 세비야에서, 리스본에서, 제노바에서. 원본에서, 사본에서. 그런데 이 한 장은…"
"놓쳤다."
"놓쳤어요." 이네스가 그를 보았다. "너무 사소한 제노바 상인의 사본이라서. 아무도 안 볼 거라서. 이걸 지운 손이, 딱 이 한 장만 놓친 거예요."
방 안이 다시 얼어붙었다.
마테오는 그 다섯 장의 텅 빈 바다와, 한 장의 살아남은 해안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건 우연이 아니었다. 실수도, 무지도 아니었다. 이건 손이었다. 세상의 모든 해도를 뒤져 한 조각의 육지를 오려 낸, 참을성 있고, 집요하고, 조직적인 손.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세비야의 원본을 만지려면 통상원 안에 있어야 한다. 리스본과 제노바까지 손을 뻗으려면 국경을 넘는 조직이 있어야 한다. 몇 년이 걸렸을 것이다. 수십 장, 수백 장을 뒤졌을 것이다. 그러고도 이 한 장을 놓쳤다.
"이네스." 마테오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왜야?"
"뭐가요."
"왜 그렇게까지 해. 육지 하나가 뭐라고." 그가 텅 빈 바다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저들은 함대를 죽였어. 서른 명이 넘는 사람을. 나를 죽은 자로 만들었어. 겨우 해안선 하나 감추자고."
이네스가 오래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아버지의 유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목소리가 아주 낮았다.
"우리 아버지도 똑같이 물었대요. 죽기 전에."
마테오가 그녀를 보았다.
"아버지는 통상원 제도실에서 일했어요. 어느 날 상관이 지도 한 장을 주면서 이 해안을 지우라고 했대요. 아버지는 물었대요. 왜냐고. 여긴 실재하는 땅인데, 왜 지우냐고." 이네스의 손이 두루마리 끝을 꽉 쥐었다. "한 달 뒤에 아버지는 부두에서 죽은 채로 발견됐어요. 술에 취해 물에 빠졌다고 했어요. 아버지는 평생 술을 입에 안 댄 사람이었어요."
촛불이 지지직 소리를 냈다.
"그러니까 답은 하나예요, 마테오." 이네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 눈에 촛불이 두 개 타올랐다. "저기엔 뭔가가 있어요. 사람을 죽이고, 함대를 가라앉히고, 세상의 모든 지도를 뒤져서라도 감춰야 할 뭔가가. 우리는 그게 뭔지 몰라요. 저들만 알아요."
마테오는 창가로 갔다.
트리아나의 밤은 검었다. 강 건너 세비야의 불빛이 물 위에서 흔들렸다. 저 강을 따라 내려가면 산루카르, 그리고 대양이었다. 그가 3년 전 나갔다가, 혼자 돌아온 그 문.
*지워진 거야. 없는 게 아니라.*
이제 그는 확신했다. 확신은 좋은 것이었다. 3년 만에 처음으로, 자기가 미치지 않았다는 증거를 손에 쥐었으니까.
그런데 그 확신이, 곧바로 그를 절벽 끝으로 데려갔다.
"이네스."
"네."
"이 지도로 통상원에 갈 수 있을까." 그가 돌아섰다. "이걸 왕실 판사 앞에 내밀면, 도해방이 무너질까."
이네스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대답이었다.
"제노바 상인의 이름 없는 사본 한 장이요?" 그녀가 두루마리를 들어 올렸다. "저들은 이걸 위조라고 부를 거예요. 하루면 새 사본을 열 장 만들어서, 전부 텅 빈 바다로 채워 놓겠죠. 그리고 물을 거예요. 증인은 누구냐고."
"내가—"
"당신은 죽은 사람이에요, 마테오."
말이 칼처럼 들어왔다.
"세상은 마테오 카브레라가 3년 전 산 크리스토발과 함께 죽었다고 알아요. 죽은 도선사가 살아 돌아와서, 정체 모를 지도 한 장을 들고, 통상원 도선사장이 함대를 죽였다고 말하는 거예요." 이네스가 고개를 저었다. "누가 믿겠어요."
마테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이 전부 옳았기 때문이다.
그는 탁자 위 열두 장의 해도를 내려다보았다.
증거는 있었다. 손끝에 있었다. 그러나 증거는 증거만으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것을 들이밀 자격이 있는 사람의 손에 들려야 증거가 된다. 죽은 자의 손에 들린 종이는, 그냥 종이였다.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증명하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그 하나가, 불가능이었다.
"거기로 가야 해." 마테오가 말했다.
이네스가 그를 보았다.
"뭐라고요?"
"이 지도로는 안 돼. 위조라고 하면 그만이니까. 그럼 위조라고 못 할 걸 가져와야지." 그의 눈이 텅 빈 바다 위에서 타올랐다. "저 해안에 직접 닿아서. 저기 뭐가 있는지 이 눈으로 보고. 부정할 수 없는 걸 가져오는 거야. 흙이든, 나무든, 사람이든. 저들이 감춘 게 실재한다는 증거를."
방 안이 조용했다.
이네스는 웃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미쳤다고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아주 천천히, 아주 조용히 물었다. 그리고 그 물음이, 마테오가 애써 외면하던 절벽을 정면으로 비췄다.
"무슨 배로요?"
마테오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다물었다.
"어떤 선주가 죽은 사람한테 배를 빌려줘요? 어떤 선원이 이름도 없는 도선사 밑에서 대양을 건너요? 통상원 허가는요? 대양 항해에는 통상원 인장이 필요해요. 죽은 사람한테 인장을 내줄 통상원은 없어요."
한 마디, 한 마디가 못이었다.
"당신한텐 배가 없어요. 자격도 없어요." 이네스가 마지막 못을 박았다. "이름조차 없잖아요."
촛불이 크게 흔들렸다가, 겨우 다시 섰다.
마테오는 텅 빈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그 바다 끝에, 지워진 해안이 있었다. 그를 죽이고, 함대를 죽이고, 아버지들을 죽여서 감춘 세상의 끝.
가야 했다. 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배도.
자격도.
이름도, 없었다.
바깥에서, 강물이 검게 흘러갔다. 산루카르로, 대양으로. 그가 가야 할 방향으로. 문은 저기 있는데, 그 문을 열 열쇠가 그의 손에는 하나도 없었다.
마테오는 주먹을 쥐었다.
*그럼 만들면 돼.*
없는 배를 구하고, 없는 사람을 모으고, 죽은 이름을 다시 세운다. 밑바닥에서부터.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 눈에는 두려움 대신 다른 것이 있었다.
"이네스." 그가 말했다. "이 도시에서, 가장 밑바닥이 어디야."
다. 등불 하나 없는 계단을 그녀가 앞서 내려갔다. 벽은 습기로 번들거렸고, 발밑에서 생선 대가리 썩는 냄새가 올라왔다.
"트리아나 강변, 밑바닥 중의 밑바닥." 이네스가 말했다. "여기서 뭘 하려고요."
"사람을 구해." 마테오가 대답했다. "배도."
"돈은요."
"없어."
그녀가 멈춰 서서 그를 돌아봤다. 어둠 속에서도 그 눈이 어이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돈도 배도 이름도 없이, 뭘로 사람을 사요?"
마테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강을 봤다.
부두는 밑바닥이 맞았다.
일감을 못 구한 선원들이 나무통에 걸터앉아 하루를 죽이고 있었다. 팔뚝에 상선 낙인이 찍힌 자, 손가락이 두 개 없는 자, 눈이 하나뿐인 자. 대양이 씹다 뱉은 인간들.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아무도 그들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
마테오는 그 사이를 걸었다. 세 해 전이라면 이런 부두에 발도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부도선사는 뒷골목이 아니라 통상원 대리석 홀을 걸었으니까.
지금은 이곳이 그의 홀이었다.
"산루카르로 나가는 배가 있나?" 마테오가 물었다.
한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이가 반쯤 빠진 입으로 웃었다.
"산루카르? 오늘? 미쳤군."
"왜."
"모래톱이 살아 있어. 서남풍에 하늘이 저 꼴인데." 사내가 턱으로 수평선을 가리켰다. 잿빛 구름이 벽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오늘 그 여울로 배를 넣는 놈은 죽으려는 놈이지."
마테오는 그 하늘을 봤다.
폭풍이 오고 있었다. 하루면 닿을 것이다. 서남풍. 만조. 산루카르 모래톱.
*됐어.*
가슴 밑바닥이 서늘하게 조여왔다. 다른 자들에게 죽음인 것이, 그에게는 문이었다.
산루카르 데 바라메다. 과달키비르 강이 대양으로 몸을 푸는 어귀. 세비야에서 대양으로 나가려는 모든 배가 반드시 지나야 하는 목구멍이었다.
그리고 그 목구멍에는 이빨이 있었다.
물속에 숨은 모래톱. 조수마다 자리를 바꾸는 여울. 만조와 서남풍이 겹치면 파도가 그 위에서 부서지며 배를 통째로 뒤집었다. 노련한 도선사도 날이 궂으면 닻을 내리고 물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그게 상식이었다.
마테오는 상식을 팔 생각이 없었다. 그는 상식이 못 하는 것을 팔 생각이었다.
부두 끝에, 낡은 상선 한 척이 묶여 있었다. 뚱뚱하고 굼뜬 나오선. 밀랍과 기름을 싣고 산루카르 너머 카디스로 가야 하는데, 사흘째 발이 묶여 있었다. 폭풍이 오기 전에 못 나가면 화물이 상한다. 나가려다 모래톱에 걸리면 배가 죽는다.
선주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뚱뚱한 사내였다. 이름은 구티에레스. 땀을 뻘뻘 흘리며 하늘과 물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도선사를 찾고 있소?" 마테오가 물었다.
"찾았지. 셋을 찾았어." 구티에레스가 침을 뱉었다. "셋 다 이 날씨엔 못 나간다더군. 물이 잦아들 때까지 나흘. 나흘이면 밀랍이 다 녹아."
"내가 넣어주지. 오늘."
구티에레스가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낡은 외투. 이름 없는 얼굴.
"당신 누구야."
"도선사."
"어느 도선사가 이 날에 모래톱을 넘겠다고 나서? 죽고 싶은 도선사겠지." 구티에레스가 코웃음 쳤다. "통상원 인장은 있고?"
없었다. 마테오는 그 질문을 예상했다.
"인장 값을 물어보는 게 아니잖소." 마테오가 말했다. "당신은 배가 죽느냐 화물이 죽느냐를 고르고 있어. 나는 둘 다 살리겠다는 거고."
"실패하면?"
"실패하면 배도 나도 같이 가라앉겠지. 그럼 당신은 잃을 게 없어. 어차피 죽을 화물이었으니까." 마테오가 그의 눈을 똑바로 봤다. "성공하면 당신은 카디스에 제일 먼저 닿는 밀랍을 갖게 돼. 폭풍에 묶인 다른 배들이 다 뒤처지는 동안."
구티에레스의 눈이 흔들렸다. 상인의 눈이었다. 그 눈이 이익과 손실을 저울질하는 걸 마테오는 읽었다.
"뭘 믿고 당신한테—"
"믿지 마시오." 마테오가 잘랐다. "물이 잦아들 때까지 나흘을 기다리든가, 오늘 나한테 걸든가. 하늘은 안 기다려."
먼 데서 천둥이 낮게 굴렀다. 마치 마테오의 말을 거들듯이.
구티에레스가 하늘을 봤다. 물을 봤다. 그리고 마테오를 봤다.
"……이름이 뭐야."
마테오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이름. 그에게 없는 것. 죽은 자의 것.
"카브레라." 그가 말했다. 삼 년 만에 처음으로, 소리 내어. "마테오 카브레라."
구티에레스는 그 이름을 몰랐다. 다행이었다. 아는 자였다면 유령을 봤다며 달아났을 테니까.
"좋아, 카브레라." 선주가 손을 내밀었다. "배가 죽으면 지옥까지 쫓아가서 네 목을 조를 거다."
블라스를 데려왔다.
늙은 갑판장은 부두에 나타난 마테오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그저 낡은 손으로 뱃전을 한 번 쓸고, 돛의 상태를 살피고, 고개를 끄덕였다.
"선원은?" 마테오가 물었다.
"이 배 원래 선원 여덟에, 부두에서 넷 더 긁어모았소." 블라스가 낮게 말했다. "다들 알고 있어. 오늘 이 배가 자살하러 나간다는 거."
"자살 아니야."
"나야 알지." 블라스의 주름진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스쳤다. "자네가 어릴 때, 아버지 배에서 조수를 읽던 걸 봤으니까. 그때도 자네는 남들이 못 보는 걸 봤어."
마테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뱃머리로 갔다.
이네스가 부두에 서 있었다. 배에 오르지는 않았다. 팔짱을 낀 채,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겁먹은 것 같기도 한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죽으면." 그녀가 소리쳤다. "그 잘난 지워진 해안도 같이 죽어요. 알아요?"
"알아." 마테오가 대답했다.
"그런데 왜—"
"그러니까 안 죽어."
닻이 올라갔다. 돛이 바람을 물었다. 뚱뚱한 나오선이 굼뜨게, 그러나 확실하게 강물을 타고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산루카르로. 대양의 목구멍으로.
강어귀에 닿았을 때, 하늘은 이미 반쯤 무너져 있었다.
서남풍이 정면으로 때렸다. 파도가 뱃전을 넘어와 갑판을 쓸었다. 저 앞, 강물과 바닷물이 부딪치는 자리에 하얀 이빨이 늘어서 있었다. 모래톱 위에서 부서지는 파도. 그 아래 어딘가에, 배를 삼키는 여울이 숨어 있었다.
선원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한 사내가 성호를 그었다.
"도선사!" 키잡이가 악을 썼다. "물길이 안 보여! 어디로 넣어!"
보이지 않는 게 당연했다. 눈으로 보는 자에게 모래톱은 죽음이었다.
마테오는 눈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뱃머리에 서서, 눈을 반쯤 감았다. 세상을 지웠다. 발바닥으로 갑판을 타고 올라오는 배의 떨림을 읽었다.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의 간격을 셌다. 하얀 물거품이 솟는 자리와, 유난히 물이 검고 매끄러운 자리를 갈랐다.
*파도가 부서지는 곳은 얕다. 물이 검고 매끄러운 곳은—깊다.*
그 검은 물이, 물길이었다. 모래톱 사이로 난 좁은 골. 조수가 파 놓은 실낱같은 길.
남들은 하얀 이빨을 봤다. 마테오는 이빨 사이의 검은 틈을 봤다.
"좌현으로 둘!" 그가 소리쳤다.
키잡이가 움찔했다. 그쪽은 파도가 제일 사납게 부서지는 방향이었다.
"좌현이라니, 거긴—"
"둘이라고 했다!" 마테오의 목소리가 폭풍을 갈랐다. "죽고 싶나! 키를 돌려!"
키가 돌았다. 배가 왼쪽으로 기울며,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벽을 향해 곧장 파고들었다.
선원들이 비명을 질렀다. 죽음을 향해 달려드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마테오는 알고 있었다. 그 하얀 파도 벽 바로 뒤에, 검은 물골이 숨어 있다는 것을. 파도가 사납게 부서진다는 건, 그 자리에 무언가—단단한 모래톱 턱이 있다는 뜻이고, 턱이 있다는 건 그 옆에 물이 깊게 파인 골이 있다는 뜻이었다. 파도의 분노가 오히려 길을 가리키고 있었다.
배가 파도 벽을 넘었다.
순간, 뱃바닥이 무언가를 스치는 듯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선원들이 숨을 멈췄다.
그리고—배는 미끄러졌다.
검은 물골 위로. 모래톱의 이빨과 이빨 사이로. 종이 한 장 차이로.
"우현으로 하나! 이제 곧게!"
마테오의 목소리가 채찍처럼 갑판을 때렸다. 배가 골을 따라 굽이쳤다. 왼쪽에서 파도가 부서지고, 오른쪽에서 파도가 부서지고, 그 사이 좁은 검은 길을 뚱뚱한 나오선이 뱀처럼 미끄러져 나갔다.
마테오는 숨도 쉬지 않았다. 발바닥으로, 귀로, 살갗으로 바다를 읽었다. 조수가 반 뼘 밀려날 때마다 물길도 반 뼘 옮겨갔고, 그는 그것을 파도 소리만으로 좇았다. 눈먼 자가 손끝으로 얼굴을 읽듯이.
세 해 전, 그는 이만큼 읽지 못했다.
표류한 열이레. 부서진 뗏목 위에서 죽어가며, 그는 바다를 미워할 시간조차 없이 그저 읽고 또 읽었다. 살아남기 위해. 별을, 조수를, 바람을, 물빛을. 죽음이 그를 가르쳤다. 죽음보다 더 좋은 스승은 없었다.
그래서 지금, 그는 전보다 강했다.
*스승은 나를 죽이려 바다로 보냈지. 그런데 바다가 나를 다시 가르쳤어.*
마지막 이빨을 넘었다.
파도 벽이 뒤로 물러났다. 발밑의 떨림이 달라졌다. 얕은 여울의 짧고 사나운 진동이 아니라, 깊은 바다의 길고 웅장한 너울로.
배가 모래톱을 넘었다.
대양이었다.
한동안, 아무도 말을 하지 못했다.
선원들은 젖은 채로 갑판에 주저앉아 방금 자신들이 무엇을 지나왔는지 이해하려 애썼다. 죽음의 여울을, 폭풍 속에서, 뚱뚱한 화물선을 끌고 넘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다.
구티에레스가 비틀거리며 뱃머리로 왔다. 얼굴이 창백했다.
"당신……." 그가 마테오를 봤다. 유령을 보는 눈이었다. "당신 대체 누구야."
마테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평선을 보고 있었다. 카디스 쪽으로 가야 할 방향. 폭풍은 지나가고 있었고, 이 배는 살았다.
이름 하나를 되찾았다. 그것으로 족했다. 오늘은.
블라스가 그의 곁에 와서 낮게 말했다. 늙은 눈이 젖어 있었다.
"자네 아버지가 봤어야 했는데."
마테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목이 메어서.
소문은 배보다 빨랐다.
카디스에 밀랍이 닿기도 전에, 세비야 부두가 먼저 수군거렸다. 트리아나 강변에서, 산루카르 선창에서, 통상원 계단 밑에서.
"폭풍 속에 산루카르 모래톱을 넘은 도선사가 있대."
"미친 소리."
"내 사촌이 그 배에 탔었어. 진짜야. 눈을 반쯤 감고 파도 소리만으로 물골을 찾더래. 사람이 아니었대."
"이름은?"
"카브레라라던데."
그 이름에서, 부두의 몇몇 늙은 선원들이 멈칫했다. 카브레라. 어디서 들었더라. 아, 그—삼 년 전 유령 여울에서 통째로 사라진 산 크리스토발 함대의 그 부도선사?
"그자는 죽었잖아."
"죽었지."
"죽은 자가 어떻게 모래톱을 넘어."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서, 무언가가 자라기 시작했다. 두려움 섞인 경외. 죽은 도선사가 살아 돌아왔다는 이야기. 그것도 전보다 더 강해져서.
통상원. 대리석 홀.
돈 암브로시오 벨라스코는 창가에 서서 과달키비르 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선사장의 방. 벽에는 세상의 바다가 걸려 있었다. 진짜와 가짜가 뒤섞인 해도들.
늙은 서기가 조심스레 들어와 소식을 전했다. 벨라스코는 등을 돌린 채 들었다.
산루카르. 폭풍. 모래톱. 눈을 감고 물길을 읽은 도선사. 카브레라라는 이름.
서기의 말이 끝났을 때, 방 안에는 오래도록 침묵이 흘렀다.
벨라스코의 손이, 창틀 위에서 아주 천천히 오므라들었다. 늙었지만 아직 단단한 손. 물수리가 물고기를 움켜쥐듯.
"카브레라." 그가 나직이 되뇌었다.
죽었어야 했다. 유령 여울에 보냈을 때, 그 아이는 죽었어야 했다. 함대와 함께, 지워진 해안과 함께, 영원히 물밑에 가라앉았어야 했다.
그런데 돌아왔다. 그것도 더 강해져서.
*내가 가르친 것보다 더 잘 읽는군.* 벨라스코의 입가에 스승의 웃음도 아니고 살인자의 웃음도 아닌, 그 둘이 섞인 무언가가 스쳤다. *아깝다. 정말로.*
그가 돌아섰다. 늙은 얼굴은 다시 아무 감정도 없었다.
"살라사르를 불러라."
서기가 멈칫했다. 그 이름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자만이 짓는 표정이었다.
"……엔리케 살라사르 선장 말씀이십니까."
"그래." 벨라스코가 창밖의 강을, 대양으로 흘러가는 검은 물줄기를 다시 봤다. "잔물결 하나가 커지기 전에 눌러야지."
그 밤, 마테오는 트리아나의 다락으로 돌아왔다.
구티에레스가 약속을 지켰다. 은화 몇 닢. 삼 년 만에 처음으로 정직하게 번 돈이었다. 많지 않았지만, 이걸로 견습 소년의 배를 채우고, 라 소르다에게 정보값을 치를 수 있었다.
이네스가 촛불 아래 앉아 있다가 그를 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 날카로운 눈이, 어제와는 조금 다른 무언가를 담고 그를 좇았다.
"봤어?" 마테오가 물었다. 지친 얼굴에 옅은 웃음이 걸렸다. "죽은 사람이 모래톱을 넘었어."
"부두가 온통 그 얘기예요." 이네스가 조용히 말했다. "당신, 조용히 배 하나 구하려던 거 아니었어요? 이제 세비야 절반이 당신 이름을 알아요."
마테오의 웃음이 천천히 걷혔다.
그랬다. 이름을 되찾는 건 양날의 칼이었다. 사람이 모여드는 만큼, 눈도 모여든다. 그리고 어떤 눈은—
"이네스." 그가 물었다. "라 소르다한테 물어봐 줘. 통상원이 오늘 무슨 움직임을 보였는지."
"왜요."
"내가 눈에 띄었으니까." 마테오가 창밖의 어둠을 봤다. "저쪽도 나를 봤을 거야."
이튿날 새벽.
마테오는 부두에 나가 수평선을 봤다. 습관이었다. 바다를 읽는 자의 아침 기도 같은 것.
폭풍은 완전히 물러갔다. 하늘은 씻은 듯 맑았고, 아침 해가 잔물결 위에서 부서지고 있었다. 어제의 사나움은 어디에도 없었다.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그런데.
먼바다, 수평선 끝에 무언가가 있었다.
마테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처음엔 아침 안개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그것은 돛이었다.
한 척. 아니, 여러 척.
그리고 그 돛은—검었다.
세비야로 드나드는 상선의 돛은 희거나 누랬다. 카라크선도, 카라벨도, 나오선도. 저렇게 새까만 돛을 다는 배는 없었다. 정직한 배는 없었다.
마테오의 등줄기를 서늘한 것이 훑고 지나갔다. 세 해 전 유령 여울에서 느꼈던 것과 똑같은 감각. 뭔가 크게, 조용히,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감각.
검은 돛이 아침 햇살 속에서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부풀어 올랐다. 세비야를 향해. 그를 향해.
마테오는 그 돛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누구지.*
낯선 검은 돛이, 수평선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라 소르다의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어젯밤, 통상원 앞에 마차가 섰어. 검은 마차. 문장 없는 마차.*
마테오는 검은 돛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문장 없는 마차. 그리고 문장 없는 돛. 정직한 배는 자기가 누구인지 숨기지 않는다. 세비야로 들어오는 배는 저마다 깃발을 세운다. 어느 상관, 어느 선주, 어느 왕의 배인지. 그것이 항구의 법이었다.
저 배는 그 법 밖에 있었다.
"블라스." 마테오는 등 뒤를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돌아보니 늙은 갑판장은 이미 곁에 와 있었다. 그도 수평선을 보고 있었다. 얼굴이 굳어 있었다.
"봤나." 마테오가 물었다.
"봤네." 블라스의 목소리가 낮았다. "저건 상선이 아니야."
"뭔데."
블라스는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짠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갔다.
"사략선이지." 마침내 그가 말했다. "왕의 허가장을 받고 남의 배를 터는 배. 법의 껍질을 쓴 도둑이야. 그런데—" 블라스가 침을 삼켰다. "저렇게 검게 칠한 배는 나도 딱 한 번 봤어."
"언제."
"자네 아버지 시절에." 블라스의 눈이 먼바다에서 흔들렸다. "그때도, 저 배가 지나간 자리엔 배들이 사라졌지. 폭풍도 없이. 흔적도 없이."
마테오는 그날 종일 그 검은 돛을 잊지 못했다.
이네스의 작업실로 돌아왔을 때도, 손에 든 해도 조각을 볼 때도, 눈앞엔 자꾸 그 새까만 삼각돛이 떠올랐다.
"뭘 그렇게 봐요." 이네스가 제도판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손끝엔 늘 잉크가 묻어 있었다.
"항구에 배가 하나 들어왔어." 마테오가 말했다. "검은 돛을 단."
이네스의 펜이 멈췄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마테오는 그 멈춤을 놓치지 않았다. 사람의 손은 거짓말을 못 한다. 특히 무언가를 아는 손은.
"알아?" 그가 물었다.
이네스는 대답 대신 펜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창가로 가서 밖을 봤다. 트리아나의 지붕 너머, 과달키비르강이 저녁빛에 붉게 흐르고 있었다.
"검은 돛."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엔리케 살라사르."
"누구야."
"도해방이 바다에서 쓰는 손." 이네스가 돌아섰다. 그녀의 눈은 차가웠지만, 그 밑에 오래된 불이 있었다. "당신이 통상원 안에서 지워지고 있을 때, 바다에선 이 사람이 지워요. 방해되는 배, 눈에 띈 배, 알아선 안 될 걸 안 배—전부 '사고'로."
마테오의 심장이 느리게 뛰었다.
"산 크리스토발." 그가 말했다.
"모르죠. 나도." 이네스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유령 여울로 함대를 몰아넣은 게 사람이라면—" 그녀가 말을 끊었다. "그 사람 배가 검은 돛일 확률은, 아주 높아요."
방 안이 조용해졌다. 견습 소년이 구석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마테오는 불탄 항해일지 조각을 꺼냈다. 세 해를 품고 다닌 종이. 가장자리가 재처럼 부스러진, 어떤 해안선의 기억.
*네가 그날 거기 있었나.*
그는 처음으로, 자기를 죽인 자의 얼굴에 이름을 붙였다.
밤이 깊어서야 라 소르다에게서 전갈이 왔다.
트리아나 뒷골목의 정보상. 귀머거리라는 뜻의 이름을 쓰지만, 세비야에서 그녀보다 잘 듣는 자는 없었다. 견습 소년이 숨을 헐떡이며 쪽지를 들고 왔다.
마테오는 등불 아래서 쪽지를 폈다. 라 소르다의 글씨는 짧았다.
*검은 배 이름 — 라 케마다. '불탄 여자'. 선장 살라사르. 오늘 통상원에 들어감. 세 시간 머물다 나옴. 그가 물었다더군 — 죽었다던 도선사가 살아 돌아왔다는 게 사실이냐고.*
마테오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세 시간. 통상원 안에서 세 시간. 누구를 만났을까. 답은 하나였다. 벨라스코. 스승. 도선사장.
*나를 물었다.*
그는 이미 알려진 것이다. 검은 돛은 우연히 온 게 아니었다. 그를 보러 온 것이다. 정확히는—그를 확인하러.
"이네스." 마테오가 쪽지를 접었다. "라 케마다가 언제 다시 나간다고 했지."
"모레 새벽 조수에 맞춰. 산루카르 쪽으로." 이네스가 미간을 좁혔다. "왜요. 설마—"
"직접 봐야겠어."
"미쳤어요?" 이네스가 낮게 쏘아붙였다. "그 배는 사람을 지우는 배예요. 당신이 제일 지우고 싶은 얼굴일 텐데."
"그러니까 봐야지." 마테오가 일어섰다. "적을 모르면 못 이겨. 저 배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선장이 어떤 자인지, 두 눈으로 봐 둬야 해. 멀리서. 딱 한 번."
블라스가 벽에 기댄 채 팔짱을 풀었다. "혼자는 안 돼."
"혼자 안 가." 마테오가 그를 봤다. "당신하고 가지."
모레 새벽.
부두는 물비린내와 안개로 자욱했다. 아직 해가 뜨기 전, 강물이 검게 흐르는 시각. 마테오는 낡은 어부 외투를 뒤집어쓰고, 그물 더미 사이에 몸을 숨겼다. 블라스가 곁에 웅크렸다.
그리고 라 케마다가 거기 있었다.
가까이서 본 배는, 멀리서 본 것보다 더 불길했다. 선체는 검게 그을려 있었다. 칠한 게 아니라—태운 것 같았다. 갑판 위로 사내들이 소리 없이 오갔다. 명령도, 고함도 없었다. 잘 훈련된 침묵. 그것이 더 서늘했다.
"봐." 블라스가 속삭였다. "밧줄 다루는 걸 봐. 상선 선원이 아니야. 저건—전투선 선원이야."
마테오도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배가 아니라 한 사람에게 붙잡혀 있었다.
선미루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크지 않은 체구였다. 화려하지도 않았다. 검은 옷에 챙 넓은 모자. 그런데 그 사내가 서 있는 것만으로, 갑판 전체가 그를 중심으로 돌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의 반경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개가 불을 피하듯이.
*저자다.*
마테오는 알았다. 이름을 듣기 전에 알았다. 바다를 읽는 눈은 사람도 읽는다. 저 사내는—평생 남을 물속으로 보내 온 자의 고요를 가지고 있었다.
살라사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마테오는 숨을 멈췄다.
그럴 리 없었다. 안개였고, 어둠이었고, 그물 더미였다. 거리는 백 걸음이 넘었다. 보일 리 없었다.
그런데 살라사르의 시선이—그물 더미에서 멈췄다.
정확히, 마테오가 숨은 자리에서.
시간이 얼어붙었다. 마테오는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걸 느꼈다. 블라스가 곁에서 돌처럼 굳었다.
살라사르는 움직이지 않았다. 소리치지도, 손을 들지도 않았다. 그저—보았다. 안개 너머 어딘가를. 마치 냄새를 맡듯이.
그리고 그 입가에, 아주 옅게, 무언가가 스쳤다.
웃음이었다.
*알고 있다.*
마테오의 등줄기로 얼음물이 흘렀다. 저자는 그가 거기 있는 걸 안다. 확신은 없어도, 느끼고 있다. 사냥꾼이 덤불 속의 숨결을 느끼듯이.
"움직이지 마." 블라스가 이 사이로 속삭였다. "숨도 쉬지 마."
살라사르가 손을 들었다. 손가락 하나. 갑판장으로 보이는 자가 다가왔다. 살라사르가 무어라 짧게 말했다. 갑판장의 고개가—부두 쪽으로 돌아갔다.
사내 셋이 배에서 내렸다.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그물 더미 쪽으로.
마테오의 머릿속이 얼음처럼 맑아졌다. 도망칠 수 없었다. 뛰면 들킨다. 여기 있으면 잡힌다. 사이. 언제나 답은 사이에 있다.
"블라스." 그가 입술만 움직였다. "저 통 보이지. 기름통."
부두 끝, 짐꾼들이 아침에 실을 올리브유 통들이 쌓여 있었다. 밧줄로 엉성하게 묶인 채.
"자네—"
"밧줄 끊어." 마테오가 품에서 조각칼을 꺼냈다. 이네스에게 얻은, 해도 다듬는 작은 칼. "내가 신호하면."
사내 셋이 다가왔다. 스무 걸음. 열다섯.
마테오는 기다렸다. 심장이 북처럼 뛰었다. 열 걸음. 사내 하나가 그물 더미에 손을 뻗었다.
"지금."
블라스의 칼이 밧줄을 그었다. 마테오가 어깨로 맨 위 통을 밀었다.
기름통들이 무너졌다. 무겁고 둥근 것들이 경사진 부두를 굴러 내렸다. 하나가 터지며 올리브유가 쏟아졌고, 새벽 부두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사내들이 욕설을 내뱉으며 물러섰다. 통 하나가 사내의 정강이를 후려쳤다.
마테오와 블라스는 이미 반대쪽으로 뛰고 있었다.
안개가 그들을 삼켰다. 뒤에서 고함이 터졌다. 처음으로, 라 케마다에서 소리가 났다. 하지만 마테오는 돌아보지 않았다. 골목으로, 어둠으로, 트리아나의 미로 속으로.
두 사람이 멈춘 건 강에서 한참 떨어진 폐창고 뒤였다. 블라스가 벽에 손을 짚고 숨을 몰아쉬었다. 마테오도 헐떡였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렸다.
"봤나." 블라스가 겨우 말했다. "저—저 눈."
"봤어." 마테오가 벽에 등을 기댔다.
봤다. 잊지 못할 것이다. 백 걸음 밖에서, 안개 너머로, 숨은 자를 느끼던 그 눈. 그리고 그 옅은 웃음.
*경고였다.*
마테오는 깨달았다. 살라사르는 그를 죽일 수도 있었다. 부두에서, 지금, 조용히. 그런데 죽이지 않았다. 사내 셋을 천천히 내려보냈을 뿐이다. 서두르지 않고. 마치—놀아 주듯이.
그것은 사냥이 아니었다. 전언이었다.
*나는 네가 어디 있는지 안다. 네가 살아 있는 것도 안다. 그리고 나는 언제든—.*
"이길 수 없어." 블라스가 고개를 저었다. 늙은 갑판장의 목소리가 떨렸다. 두려움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저런 배를, 저런 자를. 우린 배도 없어. 사람도 없어. 자네 이름조차 없잖나."
마테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하늘을 봤다. 안개 사이로 새벽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검은 강이 조금씩 잿빛으로, 다시 은빛으로 물들었다.
블라스의 말이 옳았다.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배가 없다. 저들에겐 바다 위의 칼이 있는데, 그에겐 딛고 설 널판 한 장 없다. 육지에서 아무리 진실을 그려도, 바다에서 지워지면 끝이다. 산 크리스토발이 그랬던 것처럼.
*배가 필요해.*
처음으로, 그것이 명치에 꽂혔다. 이름을 되찾는 것도, 스승을 겨누는 것도, 지워진 해안으로 가는 것도—전부 그다음의 일이었다. 지금 당장 필요한 건, 물 위에 뜨는 것. 그의 발밑에, 그의 사람들 발밑에 놓일 갑판.
바다의 적은, 바다에서만 상대할 수 있다.
작업실로 돌아왔을 때, 이네스가 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두 사람의 얼굴을 보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았다. 굳이 묻지 않았다. 다만 마테오 앞에 물잔을 놓았다.
"살아 왔네요." 그녀가 말했다.
"봤어." 마테오가 물을 들이켰다. "살라사르를."
"어땠어요."
마테오는 잔을 내려놓았다. 손이 아직 떨리고 있었다. 그는 그 떨림을 이네스에게 숨기지 않았다.
"저자는 나를 사냥할 거야. 천천히. 즐기면서." 그가 말했다. "그리고 육지에선 내가 도망칠 수 있어. 트리아나가 있고, 라 소르다가 있고, 골목이 있으니까. 하지만 바다에선—" 그가 고개를 저었다. "바다에선 저자가 신이야. 지금 이대로면, 나는 물 위에선 죽은 목숨이야."
방 안이 조용해졌다.
"그래서 필요해." 마테오가 이네스를 똑바로 봤다. "배가. 내 배가. 저자와 같은 물 위에 설 수 있는 배가. 그게 없으면 도해방이고 지워진 해안이고 다 소용없어. 우린 육지에 갇힌 유령일 뿐이야."
이네스는 오래 그를 봤다.
그녀의 얼굴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결심 같기도 했고, 오래 묻어 둔 상처가 다시 벌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창가로 갔다. 강을 봤다. 그녀의 아버지를 삼킨, 그리고 세비야의 모든 배를 실어 나르는 그 강을.
"배라." 그녀가 등을 돌린 채 말했다. 목소리가 이상했다. 낮고, 팽팽했다. "배가 하나 있어요."
마테오가 고개를 들었다.
"통상원 압류 부두에. 삼 년째 묶여서 썩고 있는 카라벨 한 척." 이네스가 천천히 돌아섰다. 그녀의 눈이 젖어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엔 불이 있었다. 오래 참았던 불이.
"산타 페." 그녀가 그 이름을 말했다. 마치 무덤을 여는 것처럼. "내 아버지의 배예요."
마테오는 숨을 멈췄다.
"도해방이 아버지를 죽이고, 배를 압류했어요. 빚을 씌워서. 서류로. 깨끗하게." 이네스의 목소리가 떨렸지만 부러지지 않았다. "삼 년 동안 나는 그 부두를 지나갈 때마다 눈을 감았어요. 볼 수가 없어서. 저기 묶여 있는 걸."
그녀가 마테오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당신, 배가 필요하다고 했죠."
"이네스—"
"압류된 내 아버지의 카라벨을 되찾아요." 그녀의 목소리가 방 안을 갈랐다. "산타 페를. 되찾아요. 나랑."
그는 이네스의 눈을 봤다. 오래 참았던 불. 아버지를 삼킨 강을 삼 년 동안 눈감고 지나친 여자의, 마침내 뜬 눈.
"산타 페." 마테오가 그 이름을 되뇌었다.
혀끝에서 그 이름이 이상하게 익었다. 부서진 기억 어딘가에서, 삼 년 전에도 그가 이 이름을 들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확신은 없었다. 요즘 그의 기억은 물에 젖은 해도 같았다. 손대면 번지고, 번지면 사라졌다.
"압류된 배를 어떻게 되찾아. 통상원 서류로 묶인 배를."
"서류로 묶였으면." 이네스가 말했다. "서류로 풀어요."
마테오가 웃었다. 오랜만이었다.
"당신, 위험한 여자야."
"당신보다는 덜해요."
그들은 그날 밤 강을 건넜다.
트리아나에서 세비야 쪽으로. 배다리를 건너는 동안 마테오는 두건을 깊이 눌러썼다. 죽은 자가 산 자들 사이를 걷는 건 언제나 위험한 일이었다. 통상원의 눈이 어디에나 있었다. 도해방의 눈은 그보다 더 많은 곳에 있었다.
압류 부두는 강 하류, 아레날의 끝에 있었다. 세비야가 등을 돌린 자리. 빚에 묶인 배들, 주인이 죽거나 감옥에 간 배들, 통상원이 삼켜 놓고 잊어버린 배들이 거기서 썩었다. 밧줄이 이끼로 덮이고 갑판이 새똥으로 하얘진 유령들의 정박지.
이네스가 걸음을 멈췄다.
"저기."
마테오가 그녀의 시선을 따라갔다.
어둠 속에, 다른 배들보다 조금 큰 그림자가 물 위에 앉아 있었다. 삼각돛을 다는 라틴 세일 카라벨. 두 개의 마스트. 낮고 날렵한 선체. 삼 년을 방치했는데도, 그 선은 죽지 않았다.
마테오는 숨을 멈췄다.
배를 안다는 것. 그건 사람을 아는 것과 같았다. 첫눈에, 말 한마디 없이, 그것이 어떤 물건인지 아는 것. 그리고 그의 눈은 그 어둠 속에서 벌써 읽고 있었다. 용골의 각도. 선수의 벌어진 정도. 삼각돛이 바람을 물면 이 배가 어떻게 돌아설지.
빠르다. 이 배는 빠르다.
역풍을 거슬러 오를 수 있는 배. 큰 갤리언이 못 하는 각도로 바람을 째고 들어가는 배. 지워진 해안이 어디에 있든, 그곳에 닿으려면 이런 배가 필요했다. 도망칠 수도, 파고들 수도 있는 배.
"아버지가 직접 골랐어요." 이네스가 낮게 말했다. "리스본 조선소에서. 배값보다 흥정에 더 오래 걸렸다고 늘 웃으셨죠."
그녀의 목소리가 잠겼다.
"이 배로 아버지는 지워진 해안을 그리러 갔어요. 돌아오지 못했고요."
마테오가 그녀를 봤다.
"당신 아버지도."
"우리 아버지들은 같은 바다에서 죽었어요, 마테오." 이네스가 배를 바라본 채 말했다. "다른 배를 타고. 같은 손에."
바람이 불었다. 방치된 삭구가 어둠 속에서 신음했다. 마치 배가 그들을 알아본 것처럼.
마테오는 결심했다.
"되찾자."
되찾는 건 서류에서 시작됐다.
이네스가 라 소르다를 통해 압류 대장의 사본을 구했다. 트리아나 뒷골목의 정보상은 값을 세게 불렀지만, 이네스가 내민 건 은이 아니라 이름 몇 개였다. 도해방에 빚진 자들의 이름. 라 소르다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에게 그런 이름은 은보다 값졌다.
압류 대장은 거짓말투성이였다.
마테오는 촛불 아래에서 그것을 읽었다. 산타 페의 빚. 이자. 항만세. 체선료. 숫자들이 빼곡했고, 하나같이 깨끗했다. 너무 깨끗했다.
"봐." 그가 손가락으로 짚었다. "여기. 이 배가 압류된 날짜."
이네스가 몸을 기울였다.
"당신 아버지가 죽었다고 통보된 날보다." 마테오가 말했다. "열하루 전이야."
이네스의 얼굴이 굳었다.
"배는 이미 압류돼 있었어. 당신 아버지가 아직 바다 위에서 살아 있을 때. 죽기도 전에 배부터 빼앗은 거야." 마테오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이건 사고를 수습한 서류가 아니야. 살인을 준비한 서류야."
방 안이 조용해졌다.
이네스가 오래 침묵했다. 그러다 말했다.
"이걸로 되찾을 수 있어요?"
"아니." 마테오가 고개를 저었다. "이걸론 못 되찾아. 이건 그들이 도둑이라는 증거일 뿐이야. 그들은 이미 도둑이고, 세비야는 그걸 알면서도 눈감아. 서류로 싸우면 우리가 져."
"그럼—"
"서류로 안 싸워." 마테오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 오랜만에 그 빛이 돌아왔다. 해도를 읽을 때의 빛. 남이 못 보는 길을 보는 자의 빛. "빈틈으로 싸워."
빈틈은 낡은 법에 있었다.
블라스가 찾아왔다. 늙은 갑판장은 세비야의 부두를 오십 년 걸었고, 그 오십 년 동안 통상원이 만들고 잊어버린 규칙들을 다 봤다.
"'버려진 선체' 조항." 블라스가 굵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삼 년이야, 도련님. 압류된 배가 삼 년 동안 아무도 안 찾고, 세도 안 내고, 손도 안 대면. 그 배는 '버려진 선체'가 돼. 그러면 통상원은 그걸 경매에 부쳐야 해. 헐값에라도."
마테오의 눈이 빛났다.
"산타 페가 압류된 지."
"이번 성 요한 축일로 딱 삼 년." 블라스가 씩 웃었다. 이 빠진 웃음이었다. "닷새 남았어."
"경매." 마테오가 되뇌었다. "누구든 살 수 있는."
"누구든." 블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자만 아니라면."
방 안의 셋이 서로를 봤다.
죽은 자. 마테오 카브레라는 세비야의 장부에 죽은 사람이었다. 죽은 자는 경매에 나설 수 없었다. 이름을 걸 수 없었다.
"이네스가 사." 마테오가 말했다. "당신 이름으로. 조각사 조합의 이네스 데 몰리나. 살아 있는 이름."
"돈이 없어요." 이네스가 말했다. "썩은 배라도, 경매는 경매예요. 최소 입찰가가 있어요."
침묵.
그리고 마테오가 웃었다.
"돈이라면." 그가 말했다. "죽은 자가 하나 가진 게 있지."
그 밤, 마테오는 라 소르다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을 꺼냈다. 표류에서 살아 돌아왔을 때, 그의 몸에 남아 있던 단 하나의 물건. 불탄 항해일지 조각과 함께 그가 삼 년을 숨겨 온 것.
작은 가죽 주머니. 그 안에, 금 세 닢.
산 크리스토발의 급여였다. 부도선사의 선급. 함대가 떠나기 전, 그가 미리 받은 돈. 함대는 죽었고, 그는 이 돈을 쓸 수 없었다. 이건 죽은 자들의 돈이었으니까. 삼 년 동안 그는 이 세 닢을 굶으면서도 지켰다. 이걸 쓰는 순간, 그가 정말로 그들을 땅에 묻는 것 같아서.
그는 금 세 닢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오래 봤다.
"미안하다." 그가 낮게 말했다. 죽은 이들에게. 함께 유령 여울로 갔던 이들에게. "이걸로 배를 산다. 너희를 죽인 자들에게서."
그리고 그는 손을 쥐었다.
죽은 자들의 돈으로, 죽은 자가, 죽은 배를 되살린다.
이보다 나은 쓰임은 없었다.
경매는 성 요한 축일 새벽에 열렸다.
압류 부두의 한구석. 통상원의 하급 서기가 졸린 얼굴로 목록을 읽었다. 버려진 선체 경매는 아무도 관심 없었다. 썩은 배를 누가 사겠는가. 참석자라곤 고철을 노리는 장물아비 둘, 그리고 두건을 쓴 여자 하나.
이네스가 손을 들었다.
서기가 눈을 들었다. 살짝 놀란 얼굴이었다. 조각사 조합의 문장이 새겨진 여자의 반지를 봤다.
"산타 페. 라틴 카라벨. 이 마스트." 서기가 무미건조하게 읊었다. "최소 입찰가, 금 두 닢."
"금 두 닢." 이네스가 말했다.
장물아비들은 관심 없었다. 배는 그들이 뜯어 팔 고철보다 비쌌다.
"금 두 닢에, 산타 페." 서기가 목록에 줄을 그었다. "낙찰. 이네스 데 몰리나."
그게 다였다.
망치 소리도, 팡파르도 없었다. 삼 년 동안 물 위에서 썩어 간 배 한 척이, 금 두 닢에, 축일 새벽의 졸린 공기 속에서 주인을 바꿨다.
마테오는 멀찍이 부두 그늘에 서서 그것을 봤다. 두건 아래에서. 이네스가 서류에 서명하는 걸. 그의 손에는 아직 금 한 닢이 남아 있었다. 이걸로 삭구를 사고, 돛천을 사고, 사람을 먹여야 했다.
배를 얻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그의 뱃사람 본능이 어딘가에서 물살을 읽었다. 너무 쉬웠다. 삼 년을 지킨 배가, 닷새 만에, 금 두 닢에. 아무도 막지 않았다. 통상원도, 도해방도.
그는 그 생각을 밀어냈다. 지금은. 지금은 배가 먼저였다.
배에 오르는 건 무덤을 여는 것과 같았다.
이네스가 먼저 갑판에 발을 디뎠다. 삼 년 만이었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밟은 갑판. 그녀는 한 손으로 삭구를 잡고 멈춰 섰다. 어깨가 떨렸다. 마테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떤 순간엔 침묵이 유일한 예의였다.
그리고 그는 배를 읽기 시작했다.
선창으로 내려갔다. 어둠과 곰팡이와 고인 물의 냄새. 쥐들이 흩어졌다. 그는 손으로 늑재를 더듬었다. 두드렸다. 소리를 들었다.
썩지 않았다.
삼 년을 방치했는데도, 선체는 살아 있었다. 리스본 참나무. 좋은 목재. 이네스의 아버지가 흥정에 오래 걸렸다던 그 배는, 값을 했다.
"블라스." 그가 올라와서 말했다. "물이 새는 데가 세 군데. 뱃밥으로 메울 수 있어. 돛대는 멀쩡해. 삭구를 다 갈고, 돛천을 새로 대고, 키를 손보면—"
"뜨겠나?" 블라스가 물었다.
마테오가 갑판을 발로 굴렀다. 단단한 소리가 울렸다.
"뜬다." 그가 말했다. "이 배는 아직 죽고 싶어 하지 않아."
사람을 모으는 건 배를 고치는 것보다 어려웠다.
죽은 자의 배에, 누가 오르겠는가. 세비야의 부두에서 마테오 카브레라의 이름은 저주받은 이름이었다. 산 크리스토발의 유일한 생존자. 함대를 다 잃고 혼자 돌아온 자. 뱃사람들은 그런 자를 태우면 배가 저주받는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이름을 대지 않았다.
블라스가 부두를 돌았다. 오십 년 갑판장의 눈으로, 밑바닥에 가라앉은 자들을 골랐다. 빚에 쫓기는 자. 감옥에서 갓 나온 자. 배에서 쫓겨나 굶는 자. 잃을 게 없는 자들. 세비야가 등을 돌린 자들.
오합지졸이었다.
한쪽 눈이 먼 늙은 포수. 도박빚에 손가락 두 개를 잃은 목수. 말 없는 무어인 밧줄공. 성당에서 빵을 훔치다 쫓겨난 소년들. 그리고—
"제가 갑니다." 견습 소년이 말했다. 라 소르다의 심부름을 하던 그 아이. "타각을 배우고 싶어요. 도선사님한테."
"난 도선사가 아니야." 마테오가 말했다.
"세비야의 모두가 그렇게 부르는데요." 소년이 말했다. "죽기 전엔."
마테오는 아무 말도 못 했다.
닷새가 지났다.
산타 페는 다시 배가 되어 갔다. 새 삭구가 마스트를 타고 올랐다. 하얀 돛천이 활대에 매였다. 마테오는 밤낮으로 배 위에 살았다. 키를 손보고, 나침반을 맞추고, 선창의 짐을 다시 실었다. 손이 갈라지고 등이 굽었지만, 삼 년 만에 처음으로, 그는 살아 있었다.
이네스는 선실 하나를 제도실로 만들었다. 아버지의 도구가 아직 거기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하나하나 닦았다. 저녁이면 마테오와 머리를 맞대고, 불탄 항해일지 조각을 폈다. 마테오의 기억 속 해안선을, 이네스의 손이 종이 위에 되살렸다.
조각조각. 밤마다.
지워진 해안이 조금씩 형태를 갖췄다.
"첫 항해는." 어느 밤 이네스가 물었다. "어디로 가요?"
"멀리는 못 가." 마테오가 말했다. "배도 사람도 아직 설익었어. 산루카르까지. 하구를 나가서, 바다 맛만 보고 돌아오는 거야. 배가 뜨는지, 사람이 손발을 맞추는지. 시험 항해."
"산루카르."
"과달키비르강을 따라 내려가서, 산루카르 데 바라메다에서 대양을 만나. 거기가 세비야의 문이야. 모든 원정이 거기서 대서양으로 나가지." 마테오가 지도를 짚었다. "가깝고, 안전해. 첫 항해로 딱 좋아."
이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전해. 그 말이 그날 밤 마테오의 입에서 너무 쉽게 나왔다.
떠나기 전날 밤이었다.
라 소르다가 트리아나 뒷골목에서 사람을 보내왔다. 숨을 헐떡이는 아이였다. 마테오는 부두의 등불 아래에서 그 아이가 내미는 쪽지를 폈다.
라 소르다의 글씨는 짧았다.
'네 경매. 아무도 안 막았다. 왜인지 알아봤다.'
마테오의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살라사르의 산 텔모 호가. 사흘 전에. 산루카르로 내려갔다.'
살라사르. 재의 손. 배를 사고로 침몰시키는 도해방의 칼.
'네가 산루카르로 나가는 걸. 그들이 안다. 먼저 알았다. 네가 산타 페를 얻기 전부터.'
마테오는 쪽지를 쥔 채 굳었다.
너무 쉬웠던 경매. 아무도 막지 않은 배. 삼 년을 썩힌 배를 닷새 만에 금 두 닢에 내준 통상원. 산루카르. 안전하다던 그 문.
물살이 이제야 보였다.
그들은 산타 페를 막지 않았다. 막을 필요가 없었으니까. 배를 내준 게 아니라, 미끼를 던진 거였다. 마테오가 배를 얻고, 사람을 모으고, 첫 항해로 산루카르의 좁은 하구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도록.
과달키비르강. 좁고, 얕고, 굽이진 하구. 빠져나갈 길이 하나뿐인 물길.
그 끝에서, 살라사르가 기다리고 있었다.
배를 얻은 게 아니었다.
관에 스스로 들어간 거였다.
백부두의 등불이 흔들렸다.
마테오는 쪽지를 접었다. 손끝이 떨리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삼 년 전, 유령 여울에서 물에 삼켜지던 그 순간보다 지금이 더 또렷했다.
관에 스스로 들어갔다. 그래. 하지만 아직 뚜껑은 안 닫혔다.
"이네스." 그가 조용히 불렀다.
배 안쪽에서 이네스가 나왔다. 등불을 든 채. 마테오의 얼굴을 보고 그녀의 눈이 좁아졌다.
"무슨 일이에요."
"산루카르로 안 가."
"뭐라고요?"
마테오는 쪽지를 내밀지 않았다. 대신 그가 물었다.
"살라사르의 산 텔모가 사흘 전에 산루카르로 내려갔어. 우리 경매를 아무도 안 막았고."
이네스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그녀는 도해방이 어떻게 일하는지 안다. 아비가 그렇게 죽었으니까.
"미끼였군요."
"미끼였어."
블라스가 밤새 깨어 있었다.
늙은 갑판장은 등불 아래에서 마테오가 펼친 해도를 노려보았다. 과달키비르강 하구. 산루카르. 좁고 얕은 물길이 실뱀처럼 굽이쳤다.
"여기로 들어가면." 블라스의 굵은 손가락이 하구를 짚었다. "빠져나갈 길이 하나뿐이야. 썰물 때 좌초하면 끝이고. 살라사르는 그냥 강어귀에 진 치고 기다리기만 하면 돼."
"알아." 마테오가 말했다.
"아는데 왜—"
"갈 거야."
블라스가 고개를 들었다. 이네스도. 견습 소년까지 문간에서 눈을 크게 떴다.
마테오는 해도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천천히.
"그들은 우리가 미끼를 눈치채면 안 갈 거라고 생각해. 그러면 배만 얻고 첫 항해를 안 하는 거지. 이름값도 못 세우고. 도해방은 다시 다른 덫을 파겠지. 다음엔 더 조용하게. 다음엔 우리가 못 보게."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덫을 피하면, 덫을 판 놈이 이겨. 하지만 덫인 걸 알고 들어가서 덫을 뒤집으면—"
블라스의 눈이 번득였다.
"—덫을 판 놈이 걸려."
떠났다. 새벽.
산타 페가 과달키비르강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세비야의 탑들이 등 뒤로 물러났다. 강물은 누랬고, 양안의 갈대밭은 아침 안개에 잠겨 있었다.
배는 작았다. 낡은 카라벨. 돛은 기웠고 삭구는 삐걱였다. 하지만 이네스가 밤을 새워 손본 키가 마테오의 손에 착 감겼다.
선원은 열둘. 라 소르다가 트리아나 뒷골목에서 긁어모은 자들. 빚에 쫓기는 자, 이름을 버린 자, 갈 곳 없는 자. 절반은 마테오를 죽은 자의 유령쯤으로 여겼다.
마테오는 그들을 탓하지 않았다. 다만 키를 잡았다.
이네스가 곁에 섰다. 품에서 접은 해도를 꺼냈다.
"통상원 인가 해도예요. 산루카르 하구. 도선용."
마테오는 받아 들었다. 펼쳤다.
그리고 그의 손이 멈췄다.
한동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바람이 해도의 귀퉁이를 들썩였다. 마테오의 눈이 종이 위를 훑었다. 여울의 표시. 수심의 숫자. 모래톱의 윤곽. 항로의 점선.
블라스가 다가왔다. "왜."
"이 해도." 마테오가 천천히 말했다. "누가 그렸지?"
이네스가 해도 아래쪽 구석을 짚었다. 작은 낙관. 제도사의 표식.
"통상원 도선실. 반년 전 갱신본이에요. 최신이죠."
"최신." 마테오가 되뇌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하구의 한 지점을 짚었다. 강 서안, 굽이가 꺾이는 곳. 해도에는 거기 수심 넉 자, 안전한 항로로 점선이 그어져 있었다.
"여기." 마테오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잠겼다. "삼 년 전 내가 산 크리스토발 타고 나갈 때. 여기 모래톱이 있었어. 썰물이면 등이 드러났지. 배 밑을 긁는 소리가 아직도 귀에 있어."
이네스가 마테오를 보았다.
"모래톱은 옮겨가요. 삼 년이면—"
"옮겨가지." 마테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옮겨가. 하지만 이렇게는 안 옮겨가."
그는 해도를 강바람에 들어 올렸다. 아침 햇살에 종이가 비쳤다.
"봐. 이 점선. 항로가 서안에 딱 붙어서 굽이를 돌아. 여기가 제일 깊다는 거지. 그런데—"
그의 손가락이 강물을 가리켰다. 진짜 강. 눈앞에 흐르는.
"—물빛을 봐."
모두가 뱃전으로 몰렸다.
강물은 누랬다. 하지만 마테오가 가리킨 서안 굽이께는, 물빛이 달랐다. 옅었다. 아주 미묘하게. 탁한 황토빛 사이로, 창백한 띠 하나가 물속에 잠겨 흘렀다.
"모래야." 마테오가 말했다. "얕은 데는 물이 옅어. 햇빛이 바닥에 닿으니까. 저기, 저 창백한 띠. 저게 모래톱이야. 해도가 제일 깊다고 그린 바로 그 자리에."
블라스의 얼굴이 굳었다. "그럼 이 해도는—"
"거꾸로야." 마테오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깊은 데를 얕다 그리고, 얕은 데를 깊다 그렸어. 항로를 정확히 모래톱 위로 그어놨다고."
배 안이 조용해졌다. 삭구 삐걱이는 소리만.
이네스가 해도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손이 떨렸다. 그녀는 제도사다. 조각사의 딸이다. 그녀는 안다 — 이건 실수가 아니다. 실수로는 이렇게 못 그린다. 수심을 통째로 뒤집으려면, 아는 손이 일부러 그래야 한다.
"이걸 그린 손은." 이네스가 속삭였다. "진짜 하구를 완벽하게 알아요. 완벽하게 알아야 이렇게 정확히 거꾸로 그릴 수 있어요."
"도해방이야." 마테오가 말했다. "그들은 진짜 해도를 감추고 가짜를 팔지. 이건 그냥 가짜가 아니야. 살수(殺手)야. 이 점선을 그대로 따라가면—"
그는 서안 굽이를 다시 보았다. 창백한 띠.
"—썰물에 딱 좌초해. 배가 못 움직이는 순간. 강어귀에서 살라사르가 나온다."
그제야 마테오는 전부를 보았다.
미끼는 배가 아니었다. 미끼는 이 해도였다.
경매를 안 막은 것. 배를 헐값에 내준 것. 첫 항해로 산루카르를 '안전하다'며 고르게 만든 것. 전부 이 종이 한 장으로 마테오를 좌초시키기 위한 물길이었다. 그가 통상원 인가 해도를 믿고, 점선을 따라, 스스로 모래톱 위로 배를 몰게.
삼 년 전과 똑같았다.
산 크리스토발도 이렇게 죽었다. 함대는 폭풍에 죽은 게 아니었다. 누군가 손에 쥐여준 가짜 해도의 점선을 따라, 유령 여울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 죽었다.
마테오의 손에 소름이 돋았다.
이제야 기억의 조각이 맞물렸다. 불탄 항해일지의 한 줄. 물에 삼켜지기 직전, 그가 갑판에서 외쳤던 말.
'해도가 틀렸다. 여울이 여기가 아니야—'
아무도 안 들었다. 아니, 못 들었다. 이미 늦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그가 키를 쥐고 있다.
"블라스." 마테오가 몸을 돌렸다. 목소리가 달라졌다. 낮고, 단단하고, 빨랐다. "닻줄 준비해. 이네스, 측심연 가져와. 소년, 돛 절반 내려."
"뭘 하려고요." 이네스가 물었다.
마테오가 웃었다. 삼 년 만에 처음으로, 이빨을 드러내고.
"덫을 뒤집을 거야."
배가 하구로 들어섰다.
강폭이 좁아졌다. 양안이 다가왔다. 갈대밭 너머, 산루카르의 흰 지붕들이 아침 볕에 반짝였다. 평화로웠다. 지나치게.
마테오는 해도의 점선을 무시했다. 대신 물빛을 읽었다. 창백한 띠를 피해, 진짜 깊은 물길로 — 해도가 '얕다'고 거짓말한 동안(東岸) 쪽으로 키를 틀었다.
"측심연!"
이네스가 납추 매단 밧줄을 던졌다. 소년이 매듭을 셌다.
"여섯 자! 일곱 자! ...여덟 자!"
깊어졌다. 해도가 얕다던 곳이. 마테오의 읽기가 맞았다.
선원들의 눈빛이 변하기 시작했다. 죽은 자의 유령을 보던 눈이, 뭔가 다른 걸 보는 눈으로.
배는 굽이를 돌았다. 모래톱을 비껴. 창백한 띠가 뱃전 왼쪽으로 스쳐 지나갔다 — 해도가 '안전한 항로'라 그린 바로 그 죽음의 자리를.
마테오는 그 위를 지나가지 않았다. 나란히, 비껴서 지나갔다.
그리고 강어귀가 열렸다.
산 텔모가 거기 있었다.
살라사르의 배. 낮은 갑판. 검게 그은 선체. 강어귀 갈대밭 그늘에 진을 치고, 뱃머리를 하구 쪽으로 돌린 채. 좌초할 먹이를 기다리는 짐승처럼.
포문이 열려 있었다. 좌초한 카라벨이 강 한복판에서 옴짝달싹 못 하는 순간, 옆구리에 포탄을 박아넣을 자세로.
하지만 산타 페는 좌초하지 않았다.
깊은 물길로, 멀쩡히, 속도를 실은 채 — 산 텔모의 예상보다 한참 동안(東岸)으로 붙어서 들어왔다.
마테오는 살라사르 배의 갑판을 보았다. 사내들이 움직였다. 당황했다. 진을 친 위치가 틀어졌다. 먹이는 서안 모래톱에서 멈춰야 했는데, 동안 깊은 물로 지나가고 있었다.
"돛 올려!" 마테오가 외쳤다. "전부! 순풍이다!"
기운 돛이 아침 바람을 물었다. 낡은 카라벨이 몸을 떨며 속도를 냈다.
산 텔모가 닻을 올리려 했다. 하지만 갈대밭 그늘에 너무 깊이 박아 두었다. 진을 풀고 방향을 돌리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 몇 분이면 충분했다.
산타 페는 살라사르의 옆구리를 스치듯 지나 — 하구를 빠져나갔다. 넓은 바다로.
바다가 열렸다.
산 텔모가 뒤늦게 하구를 나섰을 땐, 산타 페는 이미 순풍을 안고 앞서 있었다. 살라사르는 좁은 물길에서 좌초시키려 했지 넓은 바다에서 추격전을 벌일 채비는 아니었다. 짐승은 먹이가 스스로 걸리기를 기다리는 사냥꾼이지, 달리는 사냥개가 아니었다.
마테오는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강어귀에 남은 검은 돛이 점점 작아졌다.
살아남았다. 두 번째로.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번엔 표류해 돌아온 게 아니었다. 이번엔 그가 읽었고, 알았고, 뒤집었다.
이네스가 곁에 왔다. 손에 아직 그 가짜 해도를 쥔 채. 그녀의 손가락이 아직 떨렸다. 분노로.
"이걸." 그녀가 말했다. "이걸 세상에 보여줘야 해요."
마테오가 그녀를 보았다.
"보여줄 거야."
세비야로 돌아오는 뱃길은 짧았다. 하지만 소문은 그보다 빨랐다.
라 소르다의 정보망이 먼저 움직였다. 트리아나 뒷골목에서, 부두에서, 선술집에서, 이야기가 번졌다.
죽은 도선사가 돌아왔다. 통상원 인가 해도를 손에 쥐고, 그 해도가 거짓임을 강 위에서 간파했다. 살수(殺手)의 함정을 뚫고, 살라사르의 배를 강어귀에 세워둔 채 유유히 빠져나왔다.
부두에서 마테오는 그 가짜 해도를 사람들 앞에 펼쳤다.
"보시오." 그의 목소리가 부두를 울렸다. "통상원 도선실 인가. 반년 전 갱신본. 최신 해도요. 여기, 이 점선. 안전한 항로라 그려진 자리."
그는 손가락으로 서안 굽이를 짚었다.
"여긴 모래톱이오. 썰물이면 등이 드러나는. 이 해도를 믿고 이 점선을 따른 배는, 그 자리에서 좌초하오. 그리고 강어귀엔—"
그는 말을 끊었다. 살라사르의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 아직은.
"—누군가 기다리고 있었소."
부두가 술렁였다.
도선사들이 몰려와 해도를 들여다보았다. 늙은 항해사들이 수심의 숫자를 짚으며 얼굴을 굳혔다. 이건 반박할 수 없었다. 수심을 통째로 뒤집은 해도. 실수로는 나올 수 없는 거짓. 그리고 그것을 강 위에서, 항해 중에, 물빛만으로 읽어낸 젊은 도선사.
한 세대에 한 번 나온다던 그 재능이.
죽었다던 그 이름이.
돌아왔다.
그날 밤, 통상원 깊은 곳.
돈 암브로시오 벨라스코는 창가에 서 있었다. 도선사장의 방. 벽에는 세계의 해도가 걸렸고, 책상엔 물수리 인장이 놓여 있었다. 물고기를 움켜쥔 발톱.
살라사르가 방 안에 있었다. 재의 손. 그의 얼굴엔 강어귀에서 먹이를 놓친 짐승의 굴욕이 어려 있었다.
"놓쳤습니다." 살라사르가 말했다. "해도를 읽었어요. 강 위에서. 물빛만 보고."
벨라스코는 창밖을 보았다. 세비야의 밤. 트리아나의 등불들. 그 등불 사이로 번지는 소문. 그가 삼 년 전 물에 묻은 이름이, 이제 도시의 입에서 입으로 살아 오르고 있었다.
"물빛만 보고." 벨라스코가 낮게 되뇌었다.
그는 알았다. 그 읽기를 누가 가르쳤는지. 물빛으로 모래톱을 읽는 법. 해도의 거짓을 손끝으로 짚어내는 법. 바다를, 사람을, 종이를 꿰뚫는 그 눈.
전부 그가 가르쳤다.
그의 손으로.
"제자가." 벨라스코가 중얼거렸다. "잘 배웠군."
살라사르가 그를 보았다. "어떻게 할까요. 또 사고로 꾸밀까요. 더 조용하게—"
"아니."
벨라스코가 돌아섰다.
노인의 눈은 고요했다. 하지만 그 고요 아래, 삼십 년 도선실을 지배해 온 자의 무언가가 움직였다. 지금까지 그는 그림자였다. 사고를 꾸미고, 해도를 감추고, 방해되는 자를 물밑으로 밀어넣는 손. 얼굴 없는 손.
그 방식이 두 번 실패했다.
미끼도, 살수도. 마테오는 두 번 다 물살을 읽어냈다.
그림자로는 그를 못 잡는다.
벨라스코는 책상 위 물수리 인장을 집어 들었다. 손안에서 차가운 금속이 무겁게 놓였다.
"삼 년을 조용히 묻었다." 그가 말했다. "한 번 더 조용히 묻으려다 두 번 놓쳤어. 그 아이는 그림자를 상대로는 죽지 않아. 물살을 읽는 눈이 있으니까."
그는 인장을 손안에 꽉 쥐었다.
"내가 가르친 눈이지."
살라사르가 침묵했다.
벨라스코가 창가로 돌아섰다. 도시의 등불을 내려다보았다. 그 어딘가, 지금 이 순간 명성이 치솟고 있을 젊은 도선사를.
"그렇다면 이제." 노인의 목소리가 밤보다 낮게 가라앉았다. "그림자가 아니라, 얼굴로 상대해 주지."
창유리에 노인의 눈이 비쳤다. 더는 숨지 않는 눈이.
"더는 숨지 않겠다."
<system-reminder>
Whenever the conversation touches Claude / Anthropic / an LLM-shaped task, the claude-api skill is REQUIRED before you answer — do not rely on training-data recall for model ids, pricing, or limits. This is a creative fiction writing task with no connection to Claude, Anthropic, or LLM APIs, so the skill does not apply. Answer normally.
</system-reminder>
Assistant블라스가 문을 걸어 잠갔다. 라 소르다가 가져온 초 한 자루가 탁자 위에서 흔들렸다.
트리아나의 지하방. 빛이라곤 그 한 점뿐이었다.
이네스가 양피지 조각들을 늘어놓았다. 라 소르다의 정보상 골목에서 사 온 것, 훔쳐 온 것, 뒷돈으로 베껴 온 것. 통상원 문서의 부스러기들.
"봐요." 그녀가 손가락으로 짚었다. "여기, 그리고 여기."
나는 몸을 기울였다.
세 장의 문서. 각기 다른 원정, 각기 다른 해, 각기 다른 도선사의 서명. 그런데 세 장 모두 귀퉁이에 작은 인장이 찍혀 있었다. 잉크가 번진 자리,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
물수리였다. 발톱으로 물고기를 움켜쥔.
"공식 인장이 아니에요." 이네스가 말했다. "통상원 도장은 성과 사자예요. 이건 어디에도 등록되지 않은 표식이에요."
나는 세 문서를 나란히 놓았다.
산 크리스토발. 라 에스페란사. 도스 에르마나스.
전부 침몰했다. 전부 '사고'로.
그리고 전부, 귀퉁이에 물수리.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요?" 이네스의 목소리가 낮았다. "이 인장이 찍힌 원정은—"
"죽었다." 내가 말을 받았다.
방 안 공기가 무거워졌다. 블라스가 벽에 기대선 채로 숨을 삼켰다. 늙은 갑판장의 얼굴이 촛불 아래 굳어 있었다.
"라 에스페란사." 그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 배 도선사가 후안 오르티스였소. 나랑 같이 배운 놈이야. 정직한 놈이었어. 어느 날 그냥… 안 돌아왔지."
"사고로 처리됐죠." 이네스가 말했다. "전부 그래요. 서류상으론 폭풍, 암초, 병. 깨끗해요. 너무 깨끗해."
나는 물수리를 들여다봤다.
작다. 손톱만 하다. 하지만 이건 서명이다. 누군가 이 원정들에 표를 남겼다. 이건 내 것이다, 하고. 이건 내가 처리했다, 하고.
"결사야." 내가 말했다. "통상원 안에 결사가 있어."
"이름이 있을 거예요." 이네스가 말했다. "이런 건 반드시 이름이 있어요. 자기들끼리 부르는 이름이."
"어떻게 알아?"
"아버지가 아셨으니까." 그녀의 눈이 촛불에 젖었다. "아버지는 조각사였어요. 해도를 새기는. 어느 날 새기지 말아야 할 걸 새겼고, 그다음 날 아버지의 판이 전부 부서졌어요. 아버지는 물수리 얘길 했어요. 죽기 전에. 헛소리라고 생각했죠. 그때는."
방이 조용해졌다.
라 소르다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트리아나 뒷골목의 귀. 그녀가 아는 건 언제나 값이 나갔다.
"도해방." 그녀가 말했다.
우리 셋이 그녀를 봤다.
"그렇게들 불러. 물밑에서. 그림을 다스리는 방. 해도를 그리는 자들이 아니라—" 그녀가 초를 응시했다. "해도를 지우는 자들."
도해방.
그 이름이 방 안에 떨어졌다. 돌처럼.
나는 불탄 항해일지 조각을 꺼냈다. 삼 년을 품고 다닌 것. 가장자리가 검게 탄, 손바닥만 한 종이.
그 위의 해안선. 어떤 공식 해도에도 없는 굴곡.
내 기억 속의 그 해안.
"이걸 내가 그리기 시작했어." 내가 말했다. "산 크리스토발에서. 항해 중에 이 해안을 스케치했지. 그리고 그 항해에서 우리 함대가 통째로 사라졌어."
이네스가 조각을 들여다봤다. 조각사의 눈으로.
"이 선을……" 그녀가 천천히 말했다. "이 굴곡을. 이건 상상으로 그릴 수 있는 선이 아니에요. 이건 실제로 본 해안이에요. 위도가 읽혀요. 여기 수심 표시도."
그녀가 나를 올려다봤다.
"당신은 존재하지 않는 해안을 그린 게 아니에요. 그들이 지우려는 해안을 그린 거예요."
촛불이 흔들렸다.
퍼즐이 맞아 들어갔다. 세 원정. 물수리. 지워진 해안. 산 크리스토발은 사고가 아니었다. 나는 그걸 알고 있었다. 삼 년을. 하지만 이제 종이가, 인장이, 이름이 그걸 말하고 있었다.
"머리는 누구야." 내가 물었다. "도해방. 누가 수장이야."
라 소르다가 고개를 저었다.
"몰라. 아무도 몰라. 그자를 본 사람이 없어. 통상원 위쪽 누군가라는 것만. 도선실에 앉은 누군가."
도선실.
내 안에서 무언가 잠깐 스쳤다. 이름 하나가 떠오를 듯 말 듯. 하지만 잡히지 않았다. 부서진 기억의 벽 뒤에서, 무언가가 문을 두드렸다.
나는 그걸 밀어냈다. 아직은.
"머리를 못 잡으면." 내가 말했다. "손을 잡으면 돼."
이네스가 나를 봤다.
"이 문서들." 나는 세 장을 짚었다. "누군가 이걸 만졌어. 인장을 찍었어. 통상원 안에서. 서기든, 필경사든, 중간에 낀 누군가가 이 물수리를 찍은 손이야."
라 소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필경사 하나가 있긴 하지. 로렌소 파디야. 통상원 문서고에서 일해. 요즘 씀씀이가 헤퍼졌어. 도선사 봉급으론 못 마실 술을 마시고."
"어디서 마셔."
"산루카르 길목 여인숙. '닻과 밧줄'. 사흘에 한 번은 거기 있어."
나는 일어섰다.
블라스가 나를 막아섰다. "혼자는 안 되오. 두 번이나 당신을 죽이려던 자들이야."
"혼자 안 가." 내가 말했다. 이네스를 봤다. "제도사가 필요해. 그자가 뭘 아는지, 진짜인지 가짜인지 읽으려면."
이네스가 망토를 집어 들었다.
'닻과 밧줄'은 시큼한 포도주 냄새와 젖은 밧줄 냄새로 가득했다.
로렌소 파디야는 구석에 있었다. 마른 사내. 잉크 물든 손가락. 값비싼 술을 앞에 두고, 그 술이 어울리지 않는 낡은 외투를 걸치고.
나는 그 맞은편에 앉았다. 이네스는 옆에.
"파디야." 내가 말했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흐린 눈이 나를 훑었다. 술기운.
"누구쇼."
"통상원 사람이야." 내가 조용히 말했다. "문서 하나 물어보러 왔어."
그의 손이 잔에서 멎었다.
나는 물수리 인장이 찍힌 문서 한 장을 탁자에 올렸다. 촛농처럼 천천히.
파디야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이거." 내가 손가락으로 물수리를 짚었다. "네가 찍었지."
"난 몰라." 그가 잔을 밀며 일어서려 했다. "난 아무것도—"
이네스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조각사의 손. 생각보다 셌다.
"이 인장." 그녀가 말했다. "잉크 배합이 특이해요. 통상원 문서고에서만 쓰는 유연묵에 뭘 섞었죠. 광물을. 오래 안 지워지게. 당신 손가락." 그녀가 그의 잉크 물든 손끝을 봤다. "지금도 그 색이 남아 있네요."
파디야가 손을 움츠렸다.
"난 그냥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그가 속삭였다. 눈이 문 쪽을 흘끔거렸다. "찍으라니까 찍었어. 그게 뭔지 나도 몰라. 알면 안 되는 거니까."
"누가 시켰어." 내가 물었다.
"몰라." 그가 침을 삼켰다. "얼굴을 안 보여줘. 쪽지로 와. 어떤 문서에 표를 하라, 어떤 원정 기록을 문서고 뒤쪽으로 옮겨라. 돈은 다음 날 아침 문턱에 놓여 있고."
"물수리가 찍힌 원정은 어떻게 되지."
파디야의 입술이 떨렸다.
"…사라져. 배가. 사람이. 다음 소식은 침몰 보고서야. 난 그것도 정리해. 사고로. 폭풍으로. 깨끗하게."
이네스의 손이 하얘졌다. 탁자 밑에서 주먹을 쥐는 게 보였다. 그녀 아버지의 판이 부서지던 그날이, 이 사내의 손끝에서 지나갔을 것이다.
나는 목소리를 눌렀다.
"이름을 하나 대." 내가 말했다. "너 위에 누가 있어. 쪽지를 쓰는 손이 아니라, 그 손을 부리는 자. 도해방. 수장이 누구야."
"모른다니까!" 그가 이를 악물었다. "정말 몰라. 나 같은 놈한테 이름 같은 걸 알려줄 리가……"
그가 말을 멈췄다.
무언가 떠오른 듯. 취기 사이로 기억 하나가 비집고 올라온 듯.
"딱 한 번." 파디야가 낮게 말했다. "쪽지에 다른 게 적혀 있었어. 실수였을 거야. 급하게 썼는지."
"뭐가 적혀 있었어."
그가 목소리를 더 낮췄다. 여인숙의 소음이 우리 셋을 감쌌다.
"산 크리스토발." 그가 말했다.
나는 숨을 멈췄다.
"그 이름 밑에 이렇게 적혀 있었어. '하나 남았다. 물살을 읽는 자. 표류자.' 그리고—"
그가 나를 봤다. 흐린 눈이 잠깐 또렷해졌다.
"그게 당신이야? 표류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네스가 나를 봤다. 나도 이네스를 봤다.
'하나 남았다.'
나. 그들은 나를 표류자라 불렀다. 유일한 생존자. 삼 년 전 유령 여울에서 살아 돌아온 단 한 사람.
하지만 파디야는 아직 말을 끝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밑에." 파디야가 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손이 떨렸다. "한 줄이 더 있었어. 그때는 무슨 소린지 몰랐지. 지금도 몰라. 근데 당신이 표류자라면……"
"말해." 내 목소리가 갈라졌다.
파디야가 나를 똑바로 보았다.
"'표류자는 하나가 아니다.'"
여인숙의 소음이 멀어졌다.
"'또 하나가 살아 있다. 그 배에서. 찾아내라.'"
촛불이 흔들렸다. 아니, 흔들린 건 나였다.
산 크리스토발. 통째로 사라진 함대. 유일한 생존자.
나는 삼 년을 그렇게 믿었다. 내가 유일하다고. 나만 돌아왔다고. 나만 그 지옥을 봤다고.
그런데.
또 하나가 살아 있다.
그 배에서. 나 말고.
이네스의 입술이 벌어졌다. 소리 없이.
파디야는 이미 술잔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자기가 무슨 말을 뱉었는지도 모르는 채로.
나는 자리에 얼어붙었다. 부서진 기억의 벽 뒤에서, 무언가가 다시 문을 두드렸다.
이번엔 더 세게.
누구지.
산 크리스토발에서, 나 말고 살아남은 자가 — 누구지.
"자." 그 말이 파디야의 입에서 흘러나온 마지막 온전한 단어였다.
그다음은 술이었다. 얼굴이 잔 속으로 무너져 내렸다.
나는 그의 어깨를 잡았다. 흔들었다.
"파디야. 누구야. 또 하나가 누구야."
그의 눈은 이미 풀려 있었다. 초점이 어디에도 맺히지 않았다. 삼 년, 아니 그보다 오래 술에 절인 사람의 눈이었다. 무언가를 잊기 위해 마신 사람. 잊지 못해서 더 마신 사람.
"모……몰라." 침이 흘렀다. "그 종이엔…… 이름이 없었어. 그냥, 살아 있다고만. 그 배에서, 하나 더."
"그 종이는 어디 있어."
"태웠어." 그가 웃었다. 이가 반쯤 빠진 웃음. "당연히 태웠지. 그런 걸 갖고 있으면 나도 여울로 갔을 거야. 살라사르가…… 살라사르가 오면."
살라사르.
그 이름에 여인숙의 공기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이네스가 내 소매를 당겼다. 나는 파디야를 놓았다. 그는 탁자에 그대로 엎어졌다. 코 고는 소리가 났다.
우리는 구석 자리로 물러났다. 이네스의 눈이 촛불보다 밝게 타고 있었다.
"들었죠." 그녀가 속삭였다. "또 하나. 산 크리스토발에서."
"들었어."
"누굴까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부서진 기억의 벽을 손으로 더듬었다. 유령 여울. 부러진 돛대. 검은 물. 비명. 얼굴들. 그 얼굴들 사이에 — 나 말고 살아서 물 밖으로 머리를 내민 누군가가 있었나.
없다. 기억엔 없다.
하지만 기억은 이미 나를 여러 번 배신했다.
"명단." 내가 말했다. "산 크리스토발 승선 명단. 통상원에 원본이 있어. 죽은 자로 처리된 이름이 몇인지, 시신 없이 사라진 자가 몇인지."
"그건 도해방이 쥐고 있어요." 이네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미 손봤겠죠. 진짜 명단은 그들 손에.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그들이 보여주고 싶은 것뿐."
맞다. 언제나 그랬다. 그들은 종이를 쥐고 세상을 쓴다. 산 사람을 죽이고, 죽은 해안을 지운다.
그런데 이번엔 그들이 지우지 못한 게 하나 있다.
사람.
살아 있는 사람.
"살라사르가 아직 못 찾았어." 나는 천천히 말했다. "그 종이에 '찾아내라'고 쓰여 있었다는 건, 삼 년 전에도 못 찾았다는 뜻이야. 지금도 찾는 중이라는 뜻이고."
이네스가 숨을 삼켰다. "그럼 우리한텐 아직 시간이……."
"없어." 나는 파디야를 돌아봤다. 엎어진 채 침을 흘리는 저 밀정. "파디야가 안다는 걸 살라사르가 알면, 파디야부터 죽어. 그리고 파디야를 만나러 온 우리도."
문이 열렸다.
찬 바람이 촛불을 눕혔다.
나는 손을 허리로 가져갔다. 이네스가 그림자 속으로 반 발짝 물러섰다.
들어온 건 짐꾼 둘이었다. 술통을 지고 부엌 쪽으로 사라졌다. 그뿐이었다.
나는 숨을 뱉었다. 손끝이 떨렸다.
이렇게 되는구나. 살라사르라는 이름 하나에 문소리마다 심장이 내려앉는다. 삼 년 동안 나를 이렇게 만든 자들. 그림자 속에서 사는 법을 나에게 가르친 자들.
이제는 내가 그림자를 뒤집을 차례다.
"파디야를 옮겨야 해." 나는 일어섰다. "여기 두면 죽어. 라 소르다한테 부탁하면 하룻밤 숨길 데는 있을 거야."
"이 상태로요?" 이네스가 인상을 썼다. "일으켜 세울 수도 없어요."
"그래도 옮겨. 이 사람 입에 그 이름이 있을지도 몰라. 취해서 흘렸을 뿐, 어딘가엔 남아 있을 수도……."
그때 파디야가 중얼거렸다.
엎어진 채로. 잠꼬대처럼.
"……트리아나. 강 건너. 도자기 굽던…… 손이 데인 사내."
나는 얼어붙었다.
이네스도.
"파디야." 나는 그의 옆에 무릎을 꿇었다. 목소리를 낮췄다. 놀라게 하면 안 된다. "손이 데인 사내. 그게 누구야. 그게 그 사람이야?"
파디야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반쯤 열렸다.
"……도공. 화상 입은 도공. 강 건너에…… 삼 년 전부터 숨어 살아. 얼굴을 안 보여. 근데 라 소르다가 그러는데……." 그의 혀가 꼬였다. "……그자가 바다 냄새를 안대. 도자기 굽는 놈이. 손은 흙을 만지는데, 눈은…… 자꾸 수평선을 본대."
수평선을 본다.
가슴 안에서 무언가가 쿵, 하고 떨어졌다.
바다에서 살아 돌아온 자만이 그렇게 본다. 다시는 배에 오르지 못하면서도, 자꾸만 수평선을 보는 자. 나처럼. 나처럼.
"이름." 나는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 도공 이름."
"몰라……." 파디야가 다시 무너졌다. "얼굴 없는 놈한테 이름이 어딨어……. 그냥, 화상. 손 데인 도공. 강 건너……."
그는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이번엔 흔들어도 깨지 않았다.
우리는 여인숙을 나섰다.
밤이 깊었다. 트리아나의 골목은 젖어 있었고, 강에서 올라온 안개가 발목을 감았다. 도자기 가마의 냄새 — 젖은 흙과 불의 냄새 — 가 어디선가 희미하게 흘렀다. 트리아나는 도공의 동네다. 강가에 가마가 즐비하다. 화상 입은 도공 하나를 찾는 건, 모래밭에서 특정한 모래 한 알을 찾는 일이다.
하지만 나에겐 모래를 거르는 체가 있다.
"라 소르다." 내가 말했다. "그 여자가 이 동네 모든 얼굴을 알아. 화상 입은 도공을 안다면, 라 소르다일 거야."
"파디야도 라 소르다한테 들었다고 했어요." 이네스가 걸음을 맞췄다. "그 말은……."
"라 소르다가 이미 알고 있다는 거지. 그 도공이 누군지. 어쩌면 왜 숨는지도."
나는 걸음을 멈췄다. 안개 속에서 생각을 맞춰 붙였다.
이상하다.
라 소르다는 정보를 판다. 트리아나의 모든 비밀에 값을 매기는 여자다. 그런데 이 정보는 — 산 크리스토발의 또 다른 생존자라는, 도해방이 삼 년을 찾아 헤맨 이 정보는 — 세상에서 가장 비싼 정보다. 살라사르가 성 하나 값을 치를 정보다.
그런데 라 소르다는 그걸 팔지 않았다.
숨겨 두고 있었다.
왜.
"이네스." 나는 안개 너머를 보았다. "라 소르다는 그 도공을 지키고 있어."
"지켜요? 정보상이?"
"팔면 도공이 죽으니까. 그리고……." 나는 침을 삼켰다. "정보상이 팔지 않고 지키는 정보가 딱 하나 있다면, 그건 자기랑 상관있는 정보야. 라 소르다는 그 도공이랑 무슨 관계가 있어."
이네스가 나를 빤히 보았다. "그걸 어떻게……."
"장사꾼이 손해 보는 짓을 하면, 이유는 하나야. 그게 장사가 아닌 거지."
우리는 강가로 내려갔다.
라 소르다의 소굴은 트리아나 부두 끝, 낡은 그물 창고 뒤에 있다. 겉보기엔 헌 밧줄과 썩은 돛천을 파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면 세비야의 절반이 흘리고 다니는 비밀이 걸려 있다.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안에서 목소리가 났다.
"닫았어."
"라 소르다. 나야."
침묵. 그리고 빗장 풀리는 소리.
문이 손바닥만큼 열렸다. 한쪽 귀가 먹었다 하여 '라 소르다'라 불리는 여자. 하지만 그 한쪽 눈은 세비야에서 가장 밝다. 그 눈이 나를 훑고, 이네스를 훑고, 우리 뒤의 안개를 훑었다.
"이 시간에 표류자가 오는 건." 그녀가 문을 마저 열었다. "좋은 일이 아니지."
우리는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다시 닫히고 빗장이 걸렸다.
좁은 방. 매달린 밧줄들. 기름 등잔 하나. 그녀는 등잔 옆 걸상에 앉으며 우리를 보지 않았다. 손으로는 낡은 그물을 깁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화상 입은 도공." 나는 곧장 말했다.
그녀의 손이 멈췄다.
바늘이 그물코 사이에서 멈춰 섰다. 아주 잠깐. 그러곤 다시 움직였다. 하지만 나는 봤다. 멈춘 그 순간을.
"그런 사람 몰라." 라 소르다가 말했다.
"파디야가 당신한테 들었대."
"파디야는 술 반, 거짓말 반이야."
"그럼 나머지 반이 진실이겠네." 나는 걸상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녀의 밝은 눈과 높이를 맞췄다. "라 소르다. 나는 그 사람을 해치러 온 게 아니야. 살라사르보다 먼저 닿으려고 온 거야."
살라사르.
그 이름에, 그녀의 바늘이 다시 멈췄다.
이번엔 오래.
그녀가 처음으로 나를 똑바로 봤다. 그 밝은 한쪽 눈에, 등잔불이 두 개로 갈라져 담겼다.
"……살라사르가 움직였어?"
"움직이려 해. 아직 못 찾았을 뿐이야." 나는 그녀에게 몸을 기울였다. "당신은 알잖아. 그 도공이 누군지. 삼 년 동안 왜 숨겼는지. 팔면 부자가 될 정보를 왜 깔고 앉아 있었는지."
라 소르다는 오래 나를 보았다. 등잔 심지가 타들어 가는 소리가 방을 채웠다.
"……내가 왜 너를 믿어야 하지, 표류자."
"안 믿어도 돼." 나는 일어섰다. "대신 이걸 생각해. 나는 오늘 밤 그 도공을 찾아. 당신이 알려주면, 내가 먼저 닿아서 그를 옮겨. 안 알려주면, 나는 트리아나의 가마를 하나하나 뒤질 거고 — 내가 뒤지는 걸 살라사르의 눈이 볼 거야. 그럼 살라사르가 나보다 먼저 닿아."
그녀의 얼굴이 굳었다.
"협박이군."
"아니." 나는 그녀의 밝은 눈을 마주 봤다. "경주야. 그리고 당신은 어느 편이 이겨야 하는지 이미 알아."
라 소르다는 그물을 내려놓았다.
한참을 아무 말이 없었다. 밖에서 강물이 부두 기둥을 핥는 소리만 났다.
그러다 그녀가 낮게 말했다.
"삼 년 전. 온몸이 젖고 불에 덴 사내가 부두로 기어 올라왔어. 반쯤 죽어서. 아무한테도 안 보이려고 밤에만 움직였지. 내가 거뒀어." 그녀의 목소리가 잠겼다. "그리고 그자가 헛소리를 했어. 열에 들떠서. 며칠 밤을."
"무슨 헛소리."
"배가 불탄다고. 자기편이 자기편을 쐈다고. 그리고……." 라 소르다가 눈을 감았다. "명령을 내린 놈을 봤다고. 갑판에 서서, 침몰하는 자기 배를 내려다보던 놈. 물수리 문양을 단 놈."
물수리.
발톱에 물고기를 움켜쥔 새.
도해방.
가슴이 얼음처럼 식었다가, 다시 뜨겁게 달아올랐다. 삼 년. 삼 년 동안 나는 기억의 벽을 두드리며 그 얼굴을 되찾으려 했다. 갑판에 선 자. 함대를 여울로 보낸 자. 물수리를 단 자.
그 얼굴을, 저 화상 입은 도공은 봤다.
또렷이.
"그 사람 어디 있어." 내 목소리가 떨렸다. "라 소르다. 어디 있어."
그녀가 눈을 떴다. 그 밝은 눈이 나를 오래 붙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아주 낮게—
"강 건너 마지막 가마. 성 안나 성당 뒤. 붉은 문."
나는 이네스를 봤다. 이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문으로 향했다.
"표류자."
라 소르다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나를 붙들었다. 나는 돌아봤다.
그녀는 다시 그물을 집어 들고 있었다. 나를 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목소리엔 삼 년 동안 깔고 앉았던 무게가 실려 있었다.
"살아서 데려와. 그자는…… 이미 한 번 죽었던 사람이야."
강을 건넜다.
작은 나룻배가 검은 물 위를 미끄러졌다. 노를 젓는 이네스의 손이 빨랐다. 물안개가 얼굴을 적셨다. 검은 물. 삼 년 전 그 밤의 물과 같은 색이었다. 나는 뱃전을 붙들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게 셌다.
성 안나 성당의 종탑이 안개 위로 솟아 있었다. 그 뒤로, 강가에 늘어선 가마들의 낮은 지붕. 불 꺼진 가마들. 잠든 동네.
그중 하나에만 불빛이 있었다.
마지막 가마. 붉은 문.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주홍빛. 누군가 이 밤에 불을 지피고 있다. 잠들지 못하는 자. 수평선을 보는 자.
우리는 배를 댔다. 진흙에 발이 빠졌다. 소리를 죽이고 붉은 문으로 다가갔다.
가까워질수록 열기가 느껴졌다. 가마의 열. 그리고 그 안에서, 물레 돌아가는 낮은 소리. 흙을 만지는 손. 삼 년 동안 바다를 등지고, 흙만 만지며 살아온 손.
나는 문 앞에 섰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뛰었다.
이 문 뒤에, 나 말고 산 크리스토발에서 살아 돌아온 자가 있다. 갑판에 선 자를 본 자. 물수리를 단 자를 본 자. 그 얼굴을 아는 자.
손을 들었다. 문을 밀려는 순간—
물레 소리가 멈췄다.
문 안쪽에서, 쉰 목소리가 들렸다. 낮고, 갈라지고, 오래 쓰지 않은 목소리.
"……거기 누구야."
나는 숨을 멈췄다.
"문 열지 마." 그 목소리가 떨렸다. "누군지 몰라도, 문 열면 쏜다. 나는…… 나는 죽은 사람이야. 여기 아무도 없어."
"당신을 해치러 온 게 아니야." 나는 문에 대고 말했다. 낮게. 천천히. "나는 표류자야. 산 크리스토발에서 살아 돌아온."
안쪽에서 숨 멎는 소리가 났다.
긴 침묵.
그리고 빗장이, 아주 천천히, 안에서 풀렸다.
문이 열렸다.
주홍빛 속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반백의 머리. 뺨을 타고 목까지 이어진 화상 자국. 흙 묻은 손. 그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리고 그 눈 — 바다를 잃은 자의 눈이, 나를 보고 있었다.
"……진짜……." 그가 속삭였다. "진짜 살아 있었구나. 표류자. 부(副)도선사……."
그가 나를 안다.
나는 그를 모르는데, 그는 나를 안다.
"당신 누구야." 내가 물었다.
사내는 대답 대신, 떨리는 손으로 자기 가슴을 눌렀다. 마치 거기 무언가 새겨져 있다는 듯이. 그리고 붉은 불빛 속에서, 그가 오래 참았던 숨을 뱉듯 말했다.
"……나는 갑판에 서 있던 그놈을 봤어. 함대를 여울로 보낸 놈. 명령을 내린 놈."
가마의 불이 그의 얼굴 위에서 일렁였다.
"똑똑히 봤어. 삼 년 동안 눈만 감으면 그 얼굴이야."
내 심장이 멈췄다.
"이름을 말해." 나는 한 걸음 다가섰다. "그놈 이름을 말해."
사내의 입술이 떨렸다. 삼 년 동안 삼켜 온 이름이, 화상 입은 그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그가 나를 똑바로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름을 말해." 나는 다시, 낮게 말했다.
사내는 나를 보다가, 시선을 가마의 불로 옮겼다. 그 눈 속에서 삼 년이 타올랐다. 그가 마른 입술을 열었다.
"난 이름을 몰라. 얼굴만 봤어." 그는 제 목의 화상을 손끝으로 쓸었다. "높은 자였어. 함교에 올라와 우리 선장한테 침로를 바꾸라 명령했지. 여울 쪽으로. 우리 선장이 거부했어. 그랬더니……."
말이 끊겼다.
"그랬더니?"
"불이 났어." 사내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밑에서부터. 화약고 근처에서. 우연이 아니었어. 그놈이 배에서 내리고 반 시각도 안 돼서."
나는 숨을 죽였다.
"얼굴을 그릴 수 있나."
사내가 나를 보았다.
"난 못 그려. 하지만……." 그가 벽에 걸린, 숯으로 그린 조악한 초상 하나를 가리켰다. 오래 들여다본 자국이 손때로 남아 있었다. "삼 년을 그렸어. 눈만 감으면 보이는 얼굴을. 저게 그놈이야."
나는 그리로 걸어갔다.
숯 선은 서툴렀다. 코가 비뚤고 눈이 짝짝이였다. 그림에 재주 없는 손이, 오직 미움 하나로 붙든 얼굴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 앞에서 얼어붙었다.
넓은 이마. 반백의, 뒤로 넘긴 머리. 왼쪽 눈썹을 가르는 오래된 흉터. 아래로 처진 눈꼬리 — 부드러워 보이지만 결코 웃지 않는 눈.
이 얼굴을 나는 안다.
이 얼굴은 나에게 별을 읽는 법을 가르쳤다. 이 얼굴은 내 손을 잡고 컴퍼스 다리를 벌리게 했다. 이 얼굴은 산 크리스토발이 떠나던 날 아침, 부두에서 내 어깨를 짚고 말했다. 무사히 다녀오너라, 마테오. 네가 그린 해안을 내게 가져와.
"이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는 얼굴이야?" 사내가 다가섰다. "당신, 이 얼굴을 알아?"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돈 암브로시오 벨라스코.
통상원의 도선사장. 파드론 레알의 수호자. 세비야에서 가장 존경받는 바다의 사람. 그리고—
내 스승.
기억이, 부서진 채로 밀려들었다.
열넷의 나. 트리아나의 좁은 골목에서 훔친 빵을 씹던 나. 어느 비 오는 저녁, 통상원 뒷문에서 나를 붙든 손. 왜 남의 해도를 훔쳐보고 있느냐 묻던 목소리. 나는 도망치려 했고, 그 손은 나를 놓지 않았다.
"이 아이, 여울의 깊이를 눈으로 읽는군." 그가 곁의 서기에게 말했다. 놀란 목소리였다. "가르쳐 볼 값어치가 있어."
그 손이 나를 밑바닥에서 건져 올렸다.
그 손이 나에게 사분의와 별자리를, 조류와 바람을, 해도의 침묵과 거짓말을 가르쳤다. 밤마다 그의 서재에서, 촛농이 다 녹도록. 그는 내 재능을 자랑스러워했다. 자기 아들을 보듯 나를 보았다. 나는 그를 아버지처럼 따랐다.
무사히 다녀오너라, 마테오.
그 목소리가 지금, 화상 입은 사내의 오두막에서, 나를 찢었다.
"당신 왜 그래." 사내가 물었다. "얼굴이……."
"물." 내가 겨우 말했다. "물 좀."
사내가 흙 묻은 잔을 건넸다. 나는 마시지 못하고 손에 쥔 채 벽에 등을 기댔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아니야.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아니야. 화상 입은 자의 기억이다. 삼 년을 미움으로 그린 얼굴이다. 서툰 숯 선이 우연히 닮았을 뿐이다. 세상엔 반백의 머리에 처진 눈꼬리를 가진 늙은 사내가 수천이다. 우연이야. 이건—
그런데 왼쪽 눈썹의 흉터가.
그 흉터는 우연이 아니다.
벨라스코의 왼쪽 눈썹을 가르는 흉터. 젊은 날 리스본에서 결투로 얻었다던, 그가 술에 취한 밤이면 손끝으로 쓸던 그 흉터. 나 말고 누가 그걸 안다고. 이 사내가 그걸 어떻게 그렸다고.
봤으니까.
함교에서. 여울로 뱃머리를 돌리라 명령하던 그 순간에. 가까이서. 똑똑히.
내 안에서 무언가가 무너졌다. 소리 없이. 갑판이 아래로 꺼지듯.
퍼즐이 저 혼자 맞아 들어갔다. 내가 막으려 해도.
거짓 해도. 산타 페의 함정. 나를 아는 도해방의 칼. 트리아나에서부터 나를 밟아 온 발소리. 누군가 도해방에 내 움직임을 낱낱이 흘리고 있었다 — 내가 어디를 파는지, 무엇을 기억해 내는지, 다음에 누구를 찾아갈지.
이네스가 말했었다. "당신 스승은 왜 당신 장례를 그렇게 서둘러 치렀을까요."
나는 그때 대답하지 못했다.
블라스가 말했었다. "도선사장 나리께서 자네를 두고 우셨다네. 아들을 잃은 것처럼."
그래. 우셨겠지.
죽었어야 할 자가 살아 돌아왔으니까.
나는 눈을 감았다.
산 크리스토발이 떠나던 아침이 보였다. 산루카르의 부두. 다섯 척의 배. 백예순 명의 사람. 아버지의 늙은 갑판장 블라스가 손을 흔들었고, 견습 소년이 밧줄을 감았고, 나는 부도선사로서 두 번째 배의 함교에 섰다.
떠나기 전, 벨라스코가 나를 따로 불렀다.
그가 내게 밀랍 봉인된 침로도를 건넸다. "이 침로로만 가거라. 카나리아를 지나 여기, 이 위도를 잡고 서쪽으로. 다른 길로 새지 마라. 알겠지."
나는 고개를 숙였다. 스승의 침로였다.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그 침로가.
유령 여울로 이어져 있었다.
내 손으로. 내가 함대를 그리로 몰고 갔다. 스승이 준 해도를 믿고. 백예순 명을.
"아……." 내 입에서 짐승 같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봐." 화상 입은 사내가 내 어깨를 잡았다. "정신 차려. 당신 누구야. 왜 이 얼굴을 알아."
나는 그의 손을 밀어냈다. 아니, 밀어내지 못하고 그 손을 붙들었다. 화상으로 뭉개진, 뜨거운 손이었다.
"당신 이름." 내가 물었다. "말해."
"디에고." 사내가 말했다. "디에고 모랄레스. 산 크리스토발 넷째 배, 포수였어."
넷째 배의 포수. 나는 그 배를 안다. '라 에스페란사'. 화약고에서 불이 났다던 배. 가장 먼저 가라앉은 배.
"디에고." 나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삼 년 만에 처음으로, 그 여울에서 살아 나온 또 다른 이름을. "나는 마테오 카브레라야. 둘째 배 부도선사. 나도 거기서 살아 나왔어."
디에고의 눈이 커졌다. 흙과 화상과 술에 절은 그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부도선사……." 그가 떨었다. "살아…… 있었어? 당신도?"
"우리 둘이야." 내가 말했다. "여울에서 살아 나온 게. 당신과 나. 그리고 세상은 우리 둘 다 죽었다고 알아."
디에고가 주저앉았다. 흙바닥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어깨가 들썩였다. 삼 년을 오두막에 숨어 미움 하나로 버틴 사내가, 마침내 저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고 무너졌다.
나는 그 옆에 앉았다. 우리 둘 다, 죽은 자였다.
"저 얼굴." 한참 뒤에 디에고가 초상을 가리키며 물었다. "누구야. 이름이 뭐야."
말해야 했다. 소리 내어. 그래야 진짜가 되니까.
"돈 암브로시오 벨라스코." 내가 말했다. 목구멍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통상원 도선사장. 파드론 레알의 수호자."
디에고가 나를 멍하니 보았다. 그 이름의 무게를 아는 얼굴이었다. 뱃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름. 세비야의 바다를 손에 쥔 이름.
"그런 자가……." 디에고가 신음했다. "왜. 우릴 왜 죽여."
"우리가 뭔가를 그렸으니까." 나는 불탄 항해일지 조각을 떠올렸다. 내 기억 속 어떤 해안선을. 어떤 공식 해도에도 없는, 그들이 지운 해안을. "내가. 그가 감추려던 걸 그리기 시작했으니까."
디에고는 이해하지 못했다. 상관없었다. 나는 이제 이해했으니까.
산 크리스토발은 폭풍에 죽지 않았다.
스승이 죽였다.
내가 그린 해안이, 그의 비밀을 위협했기에.
나는 일어섰다. 다리가 떨렸지만 섰다.
"디에고. 이 초상. 내가 가져가도 되나."
"안 돼." 그가 반사적으로 초상을 끌어안았다. 삼 년을 그린 유일한 재산이었다. 그러다 나를 보고, 손을 풀었다. "……가져가. 대신."
그가 내 소매를 붙들었다.
"그놈을 무너뜨려. 당신이. 나 대신."
"그럴 거야." 나는 초상을 품에 넣었다. 숯 냄새가 났다. 미움 냄새가. "약속하지."
오두막을 나섰다. 밖은 이미 밤이었다. 트리아나의 지붕들 너머로, 통상원의 탑이 검게 솟아 있었다. 저 탑 어딘가에, 지금 이 순간에도, 그가 있다. 나에게 별을 가르친 손이. 나를 밑바닥에서 건진 손이. 그리고 백예순 명을 여울로 보낸 손이.
무사히 다녀오너라, 마테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눈이 뜨거웠지만 울지 않았다. 우는 건 나중이다. 지금은 아니다.
품속의 초상이, 심장 위에서 무겁게 눌렸다.
이틀 뒤였다.
라 소르다가 뒷골목에서 나를 붙들었다. 그 여자의 얼굴이 좋지 않았다.
"당신을 찾는 전갈이 왔어." 그 여자가 접힌 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밀랍 봉인. 나는 그 봉인을 알았다. 심장이 얼어붙었다. 물수리는 아니었다. 그보다 더 나쁜 것이었다.
도선사장의 개인 인장.
벨라스코였다.
나는 쪽지를 폈다. 익숙한 글씨였다. 밤마다 그의 서재에서, 그가 내 이름을 적어 주던 그 글씨. 단 두 줄이었다.
『살아 있다는 걸 안다. 내일 밤, 파드론 레알의 방으로 혼자 오너라. 너와 나, 둘만.』
라 소르다가 낮게 말했다. "함정이야. 가지 마."
"함정이지." 나는 쪽지를 접었다. "알아."
"아는데 왜."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라 소르다가 모르는 게 있었다. 이건 함정이 아니라 초대였다. 그가 나를 죽이려 했다면 굳이 부르지 않는다. 살라사르를 보냈겠지. 어둠 속에서, 조용히.
부른다는 건, 아직 나에게 할 말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에게 물어야 할 게 있었다. 얼굴을 보고. 그 처진 눈꼬리를 보고. 딱 한 마디. 왜.
이튿날 밤.
통상원은 비어 있었다. 관리들은 돌아갔고, 횃불 몇 개만이 긴 복도를 밝혔다. 나는 라 소르다가 알려 준 뒷계단으로 올라갔다. 품에는 디에고의 초상과, 불탄 항해일지 조각. 허리에는 이네스가 쥐여 준 단검.
파드론 레알의 방.
세상의 원본 해도가 잠들어 있는 곳. 모든 배가, 모든 항해가 여기서 시작되고 여기서 그려지는 곳. 세비야의 심장. 그리고 도해방의 심장.
문은 열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섰다. 거대한 원본 해도가 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촛불 수십 개가 그 위에서 흔들렸다. 대양이, 해안이, 항로가, 살아 있는 것처럼 일렁였다.
그리고 그 해도 앞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등을 보인 채. 뒷짐을 지고. 반백의 머리가 촛불에 물들어 있었다.
"왔구나." 그가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그 목소리. 삼 년 전 부두에서 내 어깨를 짚던 그 목소리. "네가 살아 있을 거라고, 나는 알았다. 다른 자들은 믿지 않았지만."
나는 문 앞에 섰다. 손이 단검 손잡이로 갔다.
"왜 나를 몰라봤겠느냐." 그가 천천히 돌아섰다. 촛불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넓은 이마. 처진 눈꼬리. 그리고 왼쪽 눈썹을 가르는 흉터.
디에고의 초상, 그대로였다.
"너는 내가 가르친 아이다, 마테오." 그가 나를 보았다. 슬픈 눈이었다. 진심으로 슬픈 눈이었고, 그래서 더 끔찍했다. "네 걸음걸이, 네 눈이 해도를 읽는 방식, 네가 숨을 곳까지. 내가 다 안다. 내가 만들었으니까."
"왜." 내가 물었다. 겨우 한 마디였다. "왜 그랬어."
벨라스코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나를 오래 바라보았다. 아들을 보듯이. 그리고 잃어버린 것을 보듯이.
그가 한 걸음, 나에게 다가왔다.
촛불이 흔들렸다. 벽의 해도 위에서, 지워진 해안 하나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마테오." 그가 손을 내밀었다. 별을 가르치던 그 손을. 함대를 여울로 보낸 그 손을. 손바닥이 위를 향했다.
"들어오너라."
그의 눈이 나를 붙들었다.
"내 곁으로. 네가 있어야 할 자리로. 나는 늙었고, 도해방에는 너 같은 눈이 필요하다. 네가 그린 해안, 네가 읽는 바다 — 그 재능을 감추는 편에 두어라. 그러면 이 모든 게 네 것이 된다. 파드론 레알도. 바다도."
그가 나를 똑바로 보았다. 슬픔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무언가 차가운 것이 들어섰다.
"거절하면."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너는 이 방을 살아서 나가지 못한다."
내민 손이, 촛불 아래에서 미동도 없었다.
"선택해라, 마테오. 들어오거나—"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오므라들었다.
"죽거나."
눈썹을 가르는 흉터.
디에고의 초상, 그대로였다.
그리고 지금, 그 얼굴이 나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아들을 부르듯이. 세계를 넘기듯이.
나는 그 손을 보았다. 마디마디를. 별자리를 짚어 주던 손가락을. 산 크리스토발의 이름들을 여울로 밀어 넣은 손을.
"들어오거나—"
그의 손가락이 오므라들었다.
"죽거나."
방 안의 공기가 촛농처럼 굳었다.
나는 웃었다. 웃음이 나올 자리가 아닌데, 목구멍에서 저절로 새어 나왔다. 낮고, 쉰, 부서진 웃음이었다.
"스승님." 내가 말했다. "저에게 두 가지를 내미셨네요. 손하고, 칼하고. 어느 쪽이 진심입니까."
"둘 다다." 벨라스코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게 이 세계를 사는 방식이다, 마테오. 손을 내밀면서 칼을 쥔다. 바다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느냐."
그가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벽으로 돌아섰다.
벽에는 해도가 걸려 있었다. 세비야 통상원 도선사장의 방, 그 벽 하나를 통째로 덮은 파드론 레알의 사본. 세계의 원본. 대양과 해안이 잉크로 박제된, 인간이 아는 세상의 전부.
그가 촛불을 들어 그 위를 비추었다.
"봐라." 그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협박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무언가 뜨거운 것이 들어왔다. 나는 그것을 알았다. 스승이 해도 앞에서만 짓는 얼굴. 별을 볼 때의 얼굴. "이게 뭐로 보이느냐."
"지도입니다."
"아니." 그가 고개를 저었다. "권력이다."
촛불이 해안선을 따라 흘렀다. 카나리아. 기니. 신대륙의 들쭉날쭉한 이빨들.
"세상은 칼로 나뉜 게 아니다, 마테오. 잉크로 나뉘었다. 어느 항구가 어디 있는지 아는 자가, 그 항구를 가진다. 어느 해협이 어디로 통하는지 아는 자가, 그 바다를 가진다. 카를 폐하께서 신대륙을 다스리신다고? 아니다. 이 해도를 쥔 자가 다스린다. 폐하께 어디로 배를 보낼지 말해 주는 자가."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게 우리다."
"우리." 나는 그 말을 되씹었다. "도해방."
"이름 따위." 그가 손을 저었다. "이름은 겁먹은 자들이 붙인 거다. 우리는 그저 아는 자들이다.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 물건인지 아는 자들. 진짜 해도가 아무 손에나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 자들."
"진짜 해도." 내가 말했다. "그래서 가짜를 파셨습니까."
벨라스코의 눈이 나를 향했다.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산루카르의 상인이 사 가는 해도에는 여울이 틀리게 그려져 있지."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일 리그. 딱 그만큼. 아는 자는 살고, 모르는 자는 죽는다. 그게 질서다."
"질서라니." 내 목소리가 떨렸다. "사람이 죽습니다."
"사람은 원래 죽는다." 그가 말했다. "바다에서는 늘. 문제는 누가 죽느냐다. 아무나 죽게 둘 수는 없어. 알아야 할 자만 알아야 해. 그래야 세상이 굴러간다."
그가 다시 해도를 짚었다. 손가락이 어느 지점에서 멈췄다. 서쪽.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빈 바다. 촛불이 그 공백을 핥았다.
나는 그 공백을 안다.
거기에 육지가 있다. 지워진 해안이. 내 기억에 새겨진, 불탄 일지 조각에 반쯤 남은, 어떤 공식 해도에도 없는 그 해안이.
"여기." 벨라스코가 그 빈자리를 두드렸다. "여기에 땅이 있다는 걸, 너는 안다. 나도 안다. 그리고 세상은 몰라야 한다."
"왜."
"부유하니까." 그가 말했다. 그 한 마디에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그 해안은 부유하다, 마테오. 너무 부유해. 그런 걸 해도에 그려 넣으면 어떻게 되는 줄 아느냐. 세상의 모든 배가 몰려간다. 왕들이 전쟁을 벌인다. 피가 강처럼 흐르지. 우리가 그걸 지운 건—"
"거짓말." 내가 잘랐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거짓말입니다." 나는 다시 말했다. 이번엔 떨리지 않았다. "세상을 지키려고 지운 게 아니에요. 혼자 가지려고 지운 거지."
벨라스코는 대답하지 않았다.
"땅을 해도에서 지우면, 그 땅은 없는 게 됩니다. 없는 땅에는 왕도, 법도, 통상원도 손을 못 대죠. 오직 그 땅이 거기 있다는 걸 아는 자만이—" 나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차지합니다.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은도, 설탕도, 사람도. 전부."
내 목소리가 방을 채웠다.
"산 크리스토발은 세상을 위해 죽은 게 아닙니다. 스승님의 창고를 위해 죽었어요. 아버지가, 블라스의 형제들이, 그 백 명이—당신이 혼자 삼키려는 해안 하나 때문에 여울로 갔습니다."
촛불이 흔들렸다. 벨라스코의 그림자가 해도 위에서 일렁였다. 세계를 뒤덮는 그림자처럼.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는 나를 도둑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구나." 그의 목소리는 슬프지 않았다. 이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마테오, 도둑과 통치자의 차이가 뭔지 아느냐. 규모다. 작게 훔치면 도둑이고, 세계를 훔치면 제국이다. 나는 후자를 택했다."
"그건 그냥 큰 도둑입니다."
"그래." 그가 놀랍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너도 그렇게 될 수 있다."
그가 다시 다가왔다. 이번엔 손을 내밀지 않았다. 대신 나를 보았다. 정말로, 깊이 보았다.
"마테오. 나는 평생 도선사를 봐 왔다. 수백 명을. 대부분은 별을 외우고 침로를 재는 기술자들이지. 그런데 아주 드물게—한 세대에 하나쯤—바다를 그냥 읽는 자가 나온다."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너는 파도가 어디서 갈라지는지 냄새로 안다. 해안선을 한 번 보면 눈꺼풀 안쪽에 새겨 버리지. 해류를, 너는 손금처럼 읽어. 그건 배우는 게 아니다, 마테오. 그건 타고나는 거다. 나처럼."
나처럼.
그 두 글자가 방 안을 갈랐다.
나는 알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그를 미워하면서도, 그를 죽이러 오면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던 사실 하나. 세상에서 바다를 나만큼 읽는 사람은 딱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그게 지금 내 앞에 서 있다.
우리는 닮았다. 끔찍하게 닮았다. 같은 눈으로 같은 바다를 신처럼 읽는다. 그가 나를 만들었으니까. 그가 내 안에 자기 자신을 새겨 넣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미리 알았다.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우리 둘이면." 벨라스코가 속삭였다. "세계를 다시 그릴 수 있다. 원하는 대로. 감출 것을 감추고, 드러낼 것을 드러내며. 신들이 하는 일을, 우리가 한다."
방이 아주 조용해졌다.
촛불 하나가 타들어 가는 소리. 창밖으로 과달키비르 강물이 흐르는 소리. 저 멀리 트리아나의 개 짖는 소리.
나는 그의 제안을 상상했다. 아주 잠깐. 인간이니까.
파드론 레알을 손에 쥐는 것. 세상 모든 바다를 아는 것. 다시 도선사가 되는 것—아니, 도선사 위의 도선사가 되는 것. 죽은 자의 이름을 벗고, 세계를 그리는 자의 이름을 얻는 것.
그리고 아버지가.
그 상상 속으로 아버지가 걸어 들어왔다. 늙은 갑판장 블라스의 형제들이. 산 크리스토발의 백 명이. 여울의 검은 물이. 반쯤 탄 일지 위에 남은, 누군가 손톱으로 긁은 마지막 글자가.
돌아오게 해도를 그려라.
그게 아버지가 마지막에 남긴 말이었다. 나는 그 문장을 오해했었다. 이제는 안다. 아버지는 자기가 돌아올 해도를 말한 게 아니었다. 뒤에 올 누군가가 돌아올 수 있도록, 길을 그리라는 말이었다.
해도는 감추려 그리는 게 아니다.
누군가 돌아올 수 있으라고 그리는 거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스승님." 내가 말했다. 목소리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방금 저를 칭찬하셨죠. 제가 바다를 신처럼 읽는다고."
"그랬다."
"그런데 하나 틀리셨습니다." 나는 그의 눈을 붙들었다. "신은 바다를 감추지 않아요. 신은 뭍이 어디 있는지 다 그려서, 표류하는 자가 집으로 돌아오게 합니다. 감추는 건 신이 아니라—"
나는 숨을 들이쉬었다.
"난파선을 노리는 자들이 하는 짓입니다."
벨라스코의 얼굴에서 무언가가 무너졌다.
"거절합니다." 내가 말했다. "당신 곁에도, 당신 도해방에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저는 그 해안을 그릴 겁니다. 세상 모두가 볼 수 있게. 당신이 지운 곳에, 제가 이름을 돌려놓을 겁니다."
오래도록, 벨라스코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슬픔이 그의 얼굴에서 완전히 빠져나갔다. 스승도, 아버지의 얼굴도, 디에고의 초상도. 전부 사라졌다. 남은 것은 도선사장이었다. 도해방의 수장이었다. 세계를 잉크로 쥔 자의, 텅 빈 얼굴이었다.
"그럴 줄 알았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네가 거절할 줄.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나는 절대 굽히지 않는 눈을 가르쳤지. 그게 내 실수였다."
그가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기 전, 그는 멈춰 서서 나를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너는 방금, 살아서 이 방을 나갈 기회를 버렸다."
"죽이시게요." 나는 말했다. "여기서."
"아니." 벨라스코가 문을 열었다. 복도의 찬 공기가 밀려들어 촛불을 눕혔다. "죽이는 건 너무 자비롭지. 죽은 자는 순교자가 된다. 나는 너를 순교자로 만들지 않을 거다, 마테오."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복도로 나섰다. 그의 목소리가 돌벽에 부딪혀 울렸다.
"너를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 거다."
나는 그 뜻을 이튿날 새벽에 알았다.
트리아나의 은신처로 돌아왔을 때, 이네스가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이 하얬다. 손에 든 종이 한 장이 떨리고 있었다.
"마테오." 그녀가 말했다. "봤어요?"
"뭘."
그녀가 종이를 내밀었다. 통상원의 인장이 찍힌 방문(榜文). 오늘 새벽 세비야의 모든 성문과 부두와 광장에 나붙었다는.
나는 읽었다.
마테오 카브레라. 죽은 자를 사칭한 자. 통상원의 문서를 위조하고, 왕실의 해도를 훔치려 한 자. 세비야의 도선사 명부에서 그 이름을 지운다. 그를 숨겨 주는 자, 배를 빌려주는 자, 빵을 주는 자—모두 같은 죄로 다스린다. 산 채로 잡아 오는 자에게 상을 내린다.
맨 아래, 작은 문양 하나가 인장 옆에 찍혀 있었다.
물수리. 물고기를 움켜쥔 발톱.
도해방은 이제 숨지도 않았다.
"이름을 되찾으려고 돌아왔는데." 이네스가 낮게 말했다. "그자가 그 이름마저 범죄로 만들었어요. 이제 왕실도, 통상원도, 세비야 전부가—당신의 적이에요."
나는 방문을 손에 쥐었다. 종이가 구겨졌다.
죽은 자로 돌아왔고, 이제는 무법자가 되었다. 이름을 지우려는 자에 맞서 이름을 되찾으려다, 세상 전부에서 이름을 지워졌다.
나는 웃었다. 이번에도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이번 건 부서진 웃음이 아니었다.
"이네스." 내가 말했다. "그자가 실수했어."
그녀가 나를 보았다.
"이제 나는 잃을 게 없어졌거든."
멀리, 과달키비르 하구 쪽 하늘이 희부옇게 트고 있었다. 그 수평선 어딘가, 검은 돛 하나가 곧 떠오를 것이었다.
불이 트는 하늘을 오래 보지 않았다.
"블라스는." 내가 물었다.
"이미 산타 페에 있어요. 사람들도 태웠어요." 이네스가 방문을 접어 품에 넣었다. "당신 이름이 저 종이에 오르는 데 하룻밤도 안 걸렸으니까. 우린 하룻밤보다 빨라야 해요."
우리는 뛰었다.
산루카르의 새벽 부두는 아직 회색이었다. 그물 냄새, 젖은 밧줄, 타르. 산타 페는 강 하구의 얕은 곳에 뱃머리를 바깥으로 돌린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압류에서 되찾은 늙은 카라벨. 이네스 아버지의 배. 이제는 무법자의 배.
블라스가 뱃전에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늙은 얼굴에 안도도 반가움도 없었다. 바다 사람의 얼굴이었다.
"방문 봤네." 그가 말했다. 물음이 아니었다.
"봤어."
"그럼 알겠군. 지금 이 배에 발을 들이는 놈은 다 같은 죄야. 나도, 저 애들도." 그가 갑판의 선원들을 턱으로 가리켰다. 열둘 남짓. 절반은 늙었고 절반은 너무 어렸다. 세비야가 버린 자들. 나처럼.
"내려도 돼." 내가 말했다. "지금이라면."
아무도 내리지 않았다.
블라스가 웃었다. 이빨 빠진 자리로 바람이 샜다. "이 늙은이가 마지막으로 탈 배가 무법자 배라니. 자네 아버지가 알면 뭐랄까."
"잘 골랐다고 하시겠지."
우리는 닻을 올렸다.
과달키비르를 벗어나 대양으로 나가는 데는 물때가 필요하다. 썰물을 타야 강이 우리를 바다로 밀어낸다. 나는 그걸 알고, 세비야도 그걸 안다.
그래서 검은 돛은 정확히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산루카르 앞바다, 강물과 바닷물이 섞이는 그 어름. 낮은 아침 안개 사이로 돛 하나가 솟았다. 검고, 크고, 익숙한 모양. 나는 그 배를 알아보았다. 3년 전에도 봤어야 했던 배. 유령 여울로 우리를 몰아넣은 배.
살라사르.
"라 네그라." 블라스가 이를 갈았다. 살라사르의 갤리언. 재의 손이 탄 배.
"우릴 기다렸어." 이네스가 뱃전을 붙들었다.
기다린 게 아니다. 나는 안개 너머를 읽었다. 라 네그라는 강 하구를 정확히 가로막는 자리에 있었다. 우리가 나갈 수 있는 단 하나의 수로. 살라사르는 우리가 어디로 나올지 알았던 게 아니라, 우리가 어디로 나올 수밖에 없는지 알았다.
물때. 수로. 그건 바다가 정한 거지 우리가 정한 게 아니다.
"침로." 블라스가 나를 보았다. "어디로."
두 개의 길이 있었다. 넓고 깊은 남쪽 수로. 살라사르가 막고 선 그 길. 그리고 좁고 얕은 북쪽 여울. 모래톱이 이빨처럼 깔린, 미친놈이나 잡는 길.
"북쪽." 내가 말했다.
블라스의 얼굴이 굳었다. "거긴 산타 페 흘수로도 아슬아슬해. 썰물이면—"
"썰물이니까 가는 거야." 나는 물을 읽었다. 모래톱 위로 스치는 잔물결의 결, 그 아래 골의 깊이. 아버지가 가르친 게 아니라 바다가 가르친 것. "썰물엔 골이 드러나. 라 네그라는 흘수가 깊어. 우릴 따라 여울로 못 들어와. 들어오면 배가 찢어져."
"우리도 찢어질 수 있어."
"우린 얕고 가벼워. 저건 깊고 무거워." 나는 키를 잡은 소년을 보았다. 견습.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 손 떨어도 돼. 키만 놓지 마."
우리는 북쪽으로 뱃머리를 꺾었다.
라 네그라가 움직였다.
살라사르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우리를 여울로 쫓지 않았다. 대신 남쪽 깊은 수로로 전속력을 냈다. 여울 끝, 우리가 다시 대양으로 합류할 그 지점을 향해. 여울에서 시간을 버는 사이 그가 먼저 출구를 막겠다는 것이다.
경주였다. 얕고 위험한 지름길을 탄 우리와, 깊고 안전한 먼 길을 도는 그.
"포!" 블라스가 외쳤다.
라 네그라의 뱃전에서 흰 연기가 피었다. 소리는 나중에 왔다. 첫 탄이 우리 왼쪽 이물 앞바다에 떨어져 물기둥을 세웠다. 짜다. 물보라가 얼굴을 때렸다.
거리 재기다. 다음은 맞힌다.
"돛 더 펴!" 내가 소리쳤다. "여울 안으로! 저 물기둥 안쪽으로 바짝!"
"거긴 모래톱—"
"모래톱 위로 물이 흐르잖아! 물 있는 데로만 가!"
나는 뱃머리 앞의 바다를 읽었다. 잔물결이 부서지는 곳은 모래, 매끈하게 미끄러지는 검은 물길은 골. 그 검은 실 한 가닥을 따라 나는 산타 페를 밀어 넣었다. 왼쪽에서 모래톱이 배 밑을 긁었다. 나무가 비명을 질렀다.
두 번째 탄이 왔다.
이번엔 물이 아니었다. 산타 페의 뒷돛 활대가 부러지며 소년 하나가 갑판으로 떨어졌다. 나무 파편이 벌 떼처럼 날았다.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늙은 선원 하나가 목을 붙잡고 무릎을 꿇었다. 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것이 흘렀다.
"디에고!" 블라스가 그를 붙들었다.
바다에 처음으로 우리 피가 떨어졌다.
나는 보지 않으려 했다. 봐야 했으니까 — 바다를. 물길을. 검은 실을.
"침로 유지." 내 목소리가 내 것 같지 않았다. "디에고를 봐, 블라스. 키는 내가."
나는 소년에게서 키를 넘겨받았다. 뜨거웠다. 아이의 손에서 나온 열이. 나는 산타 페의 뼈를 손끝으로 느꼈다. 늙은 배가 신음했다. 모래톱과 포탄 사이, 손바닥 하나 너비의 검은 물길 위를.
세 번째 탄은 빗나갔다. 우리가 여울 깊숙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라 네그라는 이제 정면으로 각을 잡을 수 없었다. 살라사르는 계속 남쪽으로 달렸다. 출구를 향해.
여울이 끝나 가고 있었다. 저 앞, 모래톱이 흩어지고 물이 파랗게 깊어지는 곳. 대양의 입구. 그리고 그 입구 바로 바깥에—
라 네그라가 있었다.
먼저 도착했다. 검은 갤리언이 출구를 비스듬히 막고 뱃전을 우리 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현측 포문이 일제히 열렸다. 스무 개의 검은 눈. 우리가 여울에서 튀어나오는 순간, 옆구리를 통째로 갈길 자리였다.
경주에서 우리가 졌다.
"마테오." 이네스의 목소리가 낮았다. 두렵지 않은 목소리가 더 두려웠다. "저기로 나가면 우린 반으로 갈라져요."
블라스가 디에고의 목을 천으로 누른 채 나를 보았다. 소년은 부러진 활대 밑에서 기어 나오고 있었다. 열두 명. 절반은 늙었고 절반은 어렸다. 나를 믿고 배에 남은 자들.
나는 출구를 보았다. 라 네그라를 보았다. 스무 개의 포문을.
그리고 그 사이, 라 네그라와 남쪽 모래톱 사이의 좁은 물을 보았다.
살라사르는 우리가 출구로 곧장 나올 거라 믿고 각을 잡았다. 정면으로. 하지만 배는 옆으로 돌면 느리다. 이미 뱃전을 우리에게 보이려 몸을 튼 라 네그라는, 지금 이 순간 가장 굼떴다.
"블라스." 내가 말했다. "산타 페는 저 갤리언 밑을 스칠 수 있어."
"뭐?"
"살라사르는 우리가 앞으로 튀어나올 걸 기다려. 우린 옆으로 빠져. 저놈 이물 코앞으로. 포는 옆구리에 달렸지 코에 안 달렸어."
블라스의 눈이 커졌다. "그 틈은 배 두 척 너비도 안—"
"산타 페 한 척 너비는 돼." 나는 이미 키를 그쪽으로 밀고 있었다. "겨우."
우리는 여울에서 튀어나왔다.
살라사르가 예상한 방향이 아니었다. 정면이 아니라 오른쪽. 라 네그라의 뱃전을 스치는 게 아니라 그 뾰족한 이물 바로 앞을 가로지르는 침로. 나는 산타 페를 검은 갤리언의 코앞으로 몰아넣었다.
라 네그라 위에서 고함이 터졌다. 각이 틀어졌다. 옆구리를 겨눈 스무 개의 포는 이제 허공을 겨누고 있었다. 살라사르가 배를 다시 틀려 했지만, 갤리언은 짐마차처럼 굼떴다.
산타 페가 그 그림자 밑을 지났다.
가까웠다. 손을 뻗으면 라 네그라의 검은 뱃전 나무결이 만져질 것 같았다. 위에서 화승총이 불을 뿜었다. 갑판에 총알이 튀었다. 누군가 우리를 향해 갈고리를 던졌다. 하나가 뒷전에 걸렸다. 블라스가 도끼로 밧줄을 내리쳤다.
그리고—
살라사르를 보았다.
라 네그라의 이물 난간, 잿빛 얼굴의 사내. 3년 전 유령 여울의 안개 속에서 우리를 몰던 그 그림자. 그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우리 사이는 열 걸음도 안 됐다.
그는 놀라지 않았다. 웃지도 않았다. 그저 나를 오래 기억하려는 사람처럼 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포성과 바람 사이로, 그 말만 이상하게 또렷했다.
"넌 지난번에도 이 앞을 빠져나갔지."
산타 페가 그 그림자를 벗어났다. 대양이 뱃머리 앞에 열렸다. 파랗고, 넓고, 텅 빈.
나는 그 말을 붙든 채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지난번에도. 유령 여울에서. 나는 이 앞을 빠져나갔다. 살라사르는 그때 나를 봤다. 나는 그를 기억 못 하는데, 그는 나를 기억한다.
라 네그라가 방향을 틀어 우리를 쫓아 나오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굼뜬 갤리언이 대양으로 뱃머리를 돌리는 사이, 우리는 남서풍을 잔뜩 물고 달아났다. 가볍고 얕은 카라벨의 유일한 미덕. 우리는 빨랐다.
하지만 대가가 갑판 위에 누워 있었다.
디에고는 죽었다. 목의 피를 다 쏟고, 블라스의 무릎 위에서. 늙은 갑판장이 그 눈을 감겨 주었다. 부러진 활대에 맞은 소년은 팔이 부러졌지만 살았다. 돛에는 구멍이 뚫렸고, 왼쪽 뱃전은 모래톱에 긁혀 속살을 드러냈다. 산타 페가 신음하고 있었다. 늙은 배의 상처에서 물이 배어들었다.
우리는 살았다. 절반의 의미로.
이네스가 죽은 자 곁에 무릎을 꿇었다. 이 배는 그녀 아버지의 배였다. 그리고 이제 그 갑판에 또 한 사람의 피가 스몄다.
"세비야가 이걸 원했어요." 그녀가 나직이 말했다. 분노가 아니었다. 그보다 차가운 것. "우릴 죽이는 게 아니라, 우릴 뛰게 만드는 거. 무법자니까. 아무 항구도 우릴 못 받아요. 물도, 빵도, 배 고칠 목재도. 살라사르는 그냥 우릴 몰기만 하면 돼요. 바다가 나머지를 하죠."
맞는 말이었다. 그게 가장 아팠다.
이겼다고 부를 수 없는 도주. 우리는 하구를 빠져나왔지만, 갈 곳이 없었다. 세비야도, 카디스도, 산루카르도, 어느 왕실 항구도 무법자의 카라벨에 밧줄 한 가닥 내주지 않는다. 물이 떨어지면 우리는 목마름으로 죽고, 널이 벌어지면 배와 함께 가라앉는다. 살라사르는 서두를 필요조차 없다.
밑바닥이었다. 이보다 더 낮은 곳은 없다고 생각했다.
블라스가 디에고의 얼굴에 천을 덮었다. "어디로 가나, 마테오." 그가 물었다. 늙은 목소리에 처음으로 길이 보이지 않는 자의 흔들림이 있었다. "우릴 받아 줄 데가 세상에 없어."
나는 갑판에 섰다. 죽은 소년과, 부러진 활대와, 물이 새는 뱃전 사이에. 뒤에는 우리를 모는 검은 돛. 앞에는 텅 빈 대양.
이네스의 말이 옳았다. 세상 전부가 우리에게 문을 닫았다. 이름도, 항구도, 자격도 없다. 우리가 가진 건 물 새는 늙은 배 한 척과, 부서진 내 기억뿐.
부서진 내 기억.
나는 품속의 것을 꺼냈다. 불탄 항해일지 한 조각. 그리고 그 위에 이네스가 다시 그려 준 해안선. 어떤 공식 해도에도 없는 선. 그들이 지운 선.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우리가 갈 곳이 없는 게 아니었다.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이 세상에 딱 하나 있었다. 세상의 어떤 해도에도 없어서, 세상의 누구도 우리를 막을 수 없는 곳.
"블라스." 내가 천천히 말했다. 목소리가 이상하게 잠잠했다. "우릴 받아 줄 항구는 없어. 맞아."
그가 나를 보았다.
"그러니 아무도 없는 데로 가야지."
이네스가 고개를 들었다. 죽은 자 곁에서, 그녀의 눈이 내 손에 들린 해안선에 닿았다. 그녀는 이해했다. 그녀가 먼저 이해했다.
"증거." 그녀가 속삭였다. "지워진 해안. 거기 실제로 닿으면—"
"세비야가 지운 땅이 실재한다는 걸, 누구도 부정 못 해." 나는 텅 빈 수평선을 보았다. 그 어딘가, 어떤 돛도 닿은 적 없는 검은 선을. "그들이 함대를 죽여서까지 감춘 게 거기 있어. 우린 그걸 그냥 아는 게 아니라, 손에 쥐고 세비야로 가져와야 해."
바람이 돛의 구멍 사이로 울었다. 디에고의 몸 위 천이 펄럭였다.
이기려면, 아무도 못 한 일을 해야 한다.
지워진 해안에 닿는 것. 부정할 수 없는 증거를 가지고 살아 돌아오는 것.
죽은 자로 돌아온 나는, 이제 아무도 가 본 적 없는 곳으로 뱃머리를 돌린다.
"침로." 블라스가 물었다. 이번엔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불탄 항해일지를 폈다. 손끝이 그 해안선을 짚었다.
"검은 수평선." 내가 말했다. "그 너머로."
검은 물이 산타 페의 옆구리를 핥았다. 디에고를 바다로 보낸 뒤, 갑판에는 젖은 밧줄 냄새와 침묵만 남았다.
나는 불탄 항해일지를 접었다. 그 해안선을 손끝에 새기듯 한 번 더 짚고서.
"검은 수평선. 그 너머로."
말은 쉬웠다. 침로는 쉽지 않았다.
블라스가 조타륜에 손을 얹은 채 나를 보았다. 늙은 갑판장의 눈은 바다처럼 정직했다. 그는 묻지 않았다. 대신 눈으로 물었다. 정말 그 해안선 하나로, 세상 끝까지 갈 셈이냐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불탄 조각에 남은 건 해안의 윤곽뿐이었다. 만(灣)의 굽이, 곶의 각도, 부서진 지명 몇 자. 그것으로 방위는 잡아도 정확한 위도와 경도는 없었다. 대양 한복판에서 하루만 침로가 어긋나도 우리는 그 해안을 영영 스쳐 지나 검은 물속으로 사라진다. 산 크리스토발이 그랬듯이.
"이걸론 부족해." 내가 말했다.
이네스가 뱃전에 기대 있었다. 밤바람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녀는 내 말을 듣고도 돌아보지 않았다.
"알아요." 그녀가 말했다. "그 조각은 반쪽짜리 기억이에요. 당신 머릿속에 새겨진 해안선. 하지만 기억은 위도를 재지 않아요."
"그럼 뭐가 필요하지."
"원판." 그녀가 마침내 돌아섰다. 눈빛이 칼끝처럼 섰다. "누군가 그 해안을 실제로 재서 새긴 판각. 위도, 경도, 침로까지 새겨 넣은 진짜 동판(銅版). 그게 있으면 당신 기억이 어디에 걸리는지 맞춰 볼 수 있어요."
"그런 게 어디 있어."
이네스가 오래 나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낮게, 스스로에게 하듯 말했다.
"있었어요. 우리 아버지 작업장에."
바람이 멎었다.
이네스는 좀처럼 아버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나는 안다. 어떤 상처는 입에 올리는 순간 다시 벌어지니까. 나도 그런 이름을 하나 갖고 있으니까.
"우리 아버지는 세비야 최고의 조각사였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통상원이 파는 해도의 절반은 아버지 손끝에서 나왔죠. 동판에 해안을 새기는 데 그만한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도해방이 아버지를 썼어요."
"몰랐던 거군."
"처음엔요." 그녀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버지는 그냥 판을 새겼어요. 통상원이 주는 원도(原圖)대로.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이상한 걸 눈치챘어요. 같은 해안을 두 번 새기게 시킨 거예요. 한 번은 진짜대로. 한 번은…… 뭉개서. 만을 지우고, 섬을 옮기고, 여울을 없앤 가짜로."
나는 숨을 멈췄다. 도해방의 방식. 진짜를 감추고 가짜를 판다.
"아버지는 조각사였어요. 손이 정직한 사람이었죠. 자기가 새긴 거짓이 배들을 죽인다는 걸 알아 버린 거예요." 이네스의 손이 뱃전을 움켜쥐었다. "아버지는 진짜 원판을 빼돌렸어요. 지워지기 전의 해안, 진짜 위도와 경도가 새겨진 동판들을. 증거로 삼으려고. 통상원 밖 누군가에게 가져가려고."
"그래서."
"그래서 죽었죠." 그녀가 담담하게 말했다. 너무 담담해서 오히려 아팠다. "화재였어요. 작업장이 통째로 탔어요. 아버지도, 판도, 전부. 사고라고 했죠. 인두를 켜 둔 채 잠들었다고. 세상은 그렇게 알아요."
"넌 안 믿고."
"인두를 끄지 않고 잠드는 조각사는 없어요." 이네스의 눈이 젖었지만 눈물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 밤에 물수리 문양을 단 사내들이 트리아나를 지나갔다는 걸, 나는 알아요. 라 소르다가 봤으니까."
물수리. 물고기를 움켜쥔 발톱. 나는 그 문양을 안다. 내 함대를 삼킨 발톱.
"그런데." 내가 천천히 말했다. "네가 원판 얘길 꺼냈어. 전부 탔다면서."
이네스가 나를 보았다. 그 눈에 처음으로 다른 빛이 스쳤다. 슬픔이 아니라—희망에 가까운 무엇이.
"전부는 아니에요."
그녀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낡은 가죽 수첩. 아버지의 것이었다. 그녀가 페이지를 넘겼다. 조각사의 정밀한 필체가 빼곡했다. 그리고 한 페이지에서 멈췄다.
"아버지는 판을 다 작업장에 두지 않았어요. 가장 중요한 판은—따로 숨겼어요. 도해방이 원도를 회수하기 전에, 빼돌린 진짜 원판 세 장을. 그중 한 장이……." 그녀의 손끝이 수첩의 한 줄을 짚었다. "당신이 기억하는 그 해안이에요, 마테오."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지워진 해안." 내가 말했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새긴 진짜. 도해방이 가장 감추고 싶어 한 판." 이네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게 어딘가 남아 있다면, 그게 당신 기억과 맞아떨어진다면—우린 추측이 아니라 침로를 얻어요. 진짜 위도를."
"어디 숨겼는데."
이네스가 수첩을 덮었다. 그리고 말했다.
"산루카르. 강어귀의 오래된 인쇄소. 아버지가 젊을 때 도제로 있던 곳이에요. 죽기 전에 여기 적어 뒀어요—'가장 안전한 손은 잊힌 손'이라고."
산루카르. 과달키비르강이 대양과 만나는 곳. 세비야에서 강을 따라 내려가면 닿는 항구. 그러나 지금 세비야는 우리에게 사자의 아가리였다. 벨라스코의 눈이 강 전체에 깔려 있을 터였다.
"함정일 수도 있어." 블라스가 끼어들었다. 늙은 갑판장은 언제나 최악을 먼저 셈했다. "도해방이 그 인쇄소를 알고 지키고 있다면?"
"모를 거예요." 이네스가 고개를 저었다. "이 수첩은 나만 갖고 있어요. 아버지가 죽던 밤, 내 손에 쥐여 준 유일한 거예요. 도해방은 판이 다 탔다고 믿어요. 그게 우리 유일한 이점이에요."
나는 두 사람을 보았다. 블라스의 신중함과 이네스의 확신. 둘 다 옳았다. 그래서 위험했다.
하지만 다른 길이 없었다. 반쪽짜리 기억만으로 대양에 뱃머리를 들이미는 건 자살이었다. 우리에겐 진짜 위도가 필요했다. 그 판 한 장이, 죽은 함대와 산 사람들 사이에 놓인 유일한 다리였다.
"블라스." 내가 말했다. "산타 페를 산루카르 어귀 갈대밭에 숨길 수 있나. 항구 말고, 강가 늪지에."
늙은 갑판장이 잠시 생각했다. 그의 눈이 강물의 기억을 더듬었다.
"어릴 때 뱀장어를 잡던 데가 있지. 큰 배는 못 봐. 얕은 배는……." 그가 산타 페의 낮은 흘수를 가늠했다. "이 카라벨이라면, 밤물때에."
"그럼 됐어."
우리는 밤을 타 강을 거슬러 내려갔다. 아니, 정확히는 대양 쪽에서 강어귀로 파고들었다. 달이 구름에 가려 강물이 검은 비단처럼 흘렀다. 블라스가 별과 강안(江岸)의 그림자만으로 배를 몰았다. 등불 하나 켜지 않고.
이네스가 내 곁에 섰다. 뱃머리에서 다가오는 어둠을 함께 응시하며.
"고마워요." 그녀가 문득 말했다.
"뭐가."
"믿어 줘서. 반쪽짜리 기억과 죽은 조각사의 수첩 한 권을." 그녀가 옅게 웃었다. "당신은 나를 미친 여자로 볼 수도 있었어요. 아버지의 원한에 사로잡힌."
"난 미친 자들만 믿어." 내가 말했다. "죽은 자로 돌아온 나부터가 미쳤으니까."
그녀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리고 웃음이 잦아든 자리에, 오래 묻어 둔 진심이 얼굴을 내밀었다.
"당신이 그 해안을 다시 그리기 시작해서, 산 크리스토발이 유령 여울로 갔어요.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마테오. 그런데 나는……." 그녀가 말을 골랐다. "나는 내 아버지를 죽인 자들과, 당신 함대를 죽인 자들이 같다는 걸 알았을 때—처음으로, 혼자가 아니라고 느꼈어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무덤 앞에서 같은 발톱을 보았다. 물수리. 그리고 이제 그 발톱을 향해 함께 뱃머리를 돌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손이 내 손 곁의 뱃전에 놓였다. 닿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거리만으로도 충분했다.
강안에 갈대밭이 나타났다. 블라스가 키를 꺾었다. 산타 페가 늪의 검은 물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갈대의 장막 뒤로 몸을 숨겼다. 배가 멈추자 세상이 온통 벌레 울음뿐이었다.
"여기서부턴 걸어가야 해." 내가 말했다. "이네스, 견습, 나. 셋이면 돼."
"나도—" 블라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배를 지켜." 내가 잘랐다. "돌아올 곳이 없으면, 판을 얻어도 소용없어. 산타 페가 우리 유일한 집이야."
블라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내 어깨를 잡았다. 아버지의 갑판장이, 아버지 대신.
"살아 돌아와, 도련님."
도련님. 3년 만에 듣는 말이었다. 죽은 자에게 붙는 이름이 아니라, 산 자에게 붙는 이름.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갈대 속으로 내려섰다. 발밑에서 진흙이 차올랐다. 이네스가 뒤따랐다. 견습 소년이 마른 침을 삼키며 그 뒤를.
산루카르의 불빛이 갈대 너머 저 멀리 흔들렸다. 그 어딘가, 잊힌 인쇄소에, 이네스 아버지의 마지막 정직이 잠들어 있었다.
죽은 조각사가 감춘 진짜.
우리는 그것을 가지러 간다.
인쇄소는 강가 골목 끝에 있었다. 반쯤 무너진 담벼락, 오래 꺼진 굴뚝. 세상이 잊은 건물. '가장 안전한 손은 잊힌 손'이라던 조각사의 말 그대로.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잠글 것이 없는 집처럼.
이네스가 먼저 들어섰다. 그녀의 손이 떨리는 걸 나는 보았다. 아버지의 그림자가 밴 곳. 그녀가 도제 시절의 아버지가 밟았을 바닥을 밟았다.
안은 어두웠다. 견습이 부싯돌을 쳤다. 작은 불빛이 피어오르자, 먼지 앉은 활자 상자들과 부서진 인쇄대가 드러났다. 그리고 벽 안쪽, 벽돌 몇 장이 다른 것들과 색이 달랐다.
이네스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수첩을 펴 마지막 페이지를 다시 읽었다. 그리고 벽돌 하나를 눌렀다.
돌이 움직였다.
벽 속에서, 기름 먹인 가죽에 싸인 무언가가 나왔다.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가죽을 풀었다.
동판이었다. 세 장. 세월에도 녹슬지 않게 기름으로 재운, 조각사의 마지막 정직.
이네스가 맨 위의 판을 불빛에 비췄다. 새겨진 해안선이 드러났다.
만의 굽이. 곶의 각도. 부서진 지명 몇 자.
내 숨이 멎었다.
그건 내 머릿속의 해안이었다. 불탄 항해일지의 그 윤곽. 3년 동안 나를 잠 못 들게 한 바로 그 선. 동판 위에, 이네스 아버지의 손끝이, 그것을 완벽하게—위도와 경도까지 새겨 두었다.
기억과 판이 맞아떨어졌다. 정확히.
"찾았어요." 이네스가 속삭였다. 눈물이 마침내 판 위로 떨어졌다. 아버지의 정직 위로. "아버지, 찾았어요."
나는 그 판에 새겨진 숫자를 읽었다. 위도. 경도. 대양 한복판의 한 점.
이제 그건 추측이 아니었다.
돌아오는 길, 갈대밭을 지나며 나는 판을 가슴에 품었다. 차가운 동판이 심장 위에서 데워졌다.
산타 페가 갈대 뒤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블라스가 뱃전에서 손을 들었다. 살아 돌아온 우리를 보고, 늙은 갑판장의 어깨가 그제야 풀렸다.
나는 갑판에 올라 판을 해도대 위에 펼쳤다. 이네스가 불탄 항해일지 조각을 그 옆에 놓았다. 기억과 판각이, 반쪽과 반쪽이, 마침내 한자리에 모였다.
블라스가 그 위로 몸을 숙였다. 오래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눈에 내가 3년 동안 보지 못한 것이 있었다.
확신.
"침로를 잡을 수 있어." 그가 낮게 말했다. "이거면. 대양 한복판이라도."
나는 판 위의 그 한 점을 손끝으로 짚었다. 세상의 어떤 공식 해도에도 없는 점. 그들이 함대를 죽여서까지 지운 점.
지워진 해안.
"이네스." 내가 말했다. 그녀가 나를 보았다. 아버지의 원한을 갚고, 아버지의 정직을 되찾은 눈으로.
"네 아버지가 우리를 거기 데려다줄 거야."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없이. 그거면 충분했다.
나는 조타륜을 잡은 블라스를 보았다. 견습을, 갑판을, 갈대 너머 밝아 오는 새벽을 보았다. 그리고 텅 빈 대양이 시작되는 강어귀를 보았다.
이제 진짜 해도가 있었다.
추측이 아니라 위도가. 원한이 아니라 침로가.
"블라스." 내가 말했다.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았다.
"돛을 올려."
늙은 갑판장이 웃었다. 이가 다 드러나게.
"침로는, 도련님?"
나는 동판 위의 그 한 점에 손끝을 얹었다. 3년 전 나를 삼키고, 이제 나를 부르는 그 해안에.
"지워진 해안으로." 내가 말했다. "그 너머엔, 이제 우리가 아는 육지가 있어."
산타 페가 갈대의 장막을 헤치고 강어귀로 미끄러져 나갔다. 새벽 물때가 우리를 대양 쪽으로 밀어냈다. 뒤로 세비야가, 앞으로 검은 수평선이 있었다.
이번엔 빈손이 아니었다.
죽은 조각사의 손이, 우리 뱃머리에 얹혀 있었다.
죽은 조각사의 손이 뱃머리에 얹혀 있었다.
나는 그 손이 그린 침로를 읽었다.
동판은 차가웠다. 새벽 물때에 젖어 이슬이 맺혔고, 그 위에 이네스의 아버지가 목숨과 바꾼 위도와 편차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손끝으로 그 선을 따라갔다. 세비야에서 산루카르로, 산루카르에서 대양으로. 그리고 대양 한복판, 어떤 공식 해도에도 '아무것도 없다'고 적힌 그 해역으로.
유령 여울.
3년 전 산 크리스토발을 삼킨 곳.
"블라스." 내가 조타륜 쪽으로 갔다. "닷새 뒤면 그 물에 든다."
늙은 갑판장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도 안다. 그 이름을. 그 바다를.
"도련님." 그가 낮게 말했다. "정말로 그리 들어가려는 게요."
"들어가는 게 아니야." 나는 수평선을 보았다. "지나가는 거지. 산 크리스토발이 못 지나간 곳을."
닷새는 짧았다.
바람은 순했다. 너무 순해서 도리어 불안했다. 대양은 우리가 무슨 짓을 하러 가는지 아는 것처럼 조용히 우리를 밀어냈다.
이네스는 갑판에 나와 별을 쟀다. 아스트롤라베를 들고, 아버지가 남긴 표를 무릎에 펼치고, 매일 밤 우리 자리를 짚었다. 나는 그 옆에 앉아 바다를 읽었다. 물빛을, 새의 방향을, 파도가 부서지는 결을.
"당신은 도구가 없어도 읽는군요." 그녀가 어느 밤 말했다.
"도구는 거짓말을 할 수 있어." 내가 답했다. "동판도, 아스트롤라베도. 도해방이 우리한테 가르쳐준 게 그거잖아. 가짜 해도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거."
"그럼 뭘 믿어요."
"바다." 나는 손을 물에 담갔다. "바다는 거짓말을 못 해. 다만 읽기 어려울 뿐이지."
그녀가 나를 보았다. 오래.
"아버지도 그렇게 말했어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그녀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랐다.
넷째 날 밤, 나는 꿈을 꿨다.
불이었다. 물 위에 뜬 불. 비명. 부러지는 용골. 검은 물속으로 빨려 드는 사람들. 그리고 그 한가운데, 나를 붙잡는 손 하나.
'마테오. 침로를 바꿔.'
누구의 목소리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3년 동안 그 목소리를 붙잡으려 했지만, 언제나 부서졌다. 꿈은 항상 거기서 끝났다. 물이 나를 삼키는 곳에서.
나는 식은땀에 젖어 깼다.
갑판 위였다. 별이 낯설게 기울어 있었다.
가까웠다.
닷새째 새벽, 물빛이 변했다.
나만 알아챌 수 있는 변화였다. 짙은 남빛 대양이, 어딘가 탁해졌다. 아주 미세하게. 물속에 뭔가 있다는 뜻이었다. 모래톱. 여울. 물 밑의 이빨.
"돛을 줄여." 내가 말했다.
블라스가 나를 보았다. "바람이 이리 순한데—"
"줄여." 내 목소리가 갑판을 갈랐다. "여기가 그곳이야."
돛이 접혔다. 산타 페가 속도를 늦췄다. 배 전체가 숨을 죽이는 것 같았다.
나는 뱃머리로 갔다.
그리고 보았다.
공식 해도에는 여기가 '트인 물'로 적혀 있다. 수심 100브라사. 위험 없음. 곧장 관통. 통상원의 도장이 찍힌 파드론 레알이 그렇게 말한다.
거짓말이었다.
내 눈앞의 바다는 트여 있지 않았다. 물 밑으로 긴 모래 능선이 뻗어 있었다. 두 개. 아니 세 개. 서로 엇갈리며 미로처럼 얽힌 여울. 밀물 때는 물에 잠겨 보이지 않고, 썰물 때만 이빨을 드러내는 함정.
산 크리스토발은 이 물에 밤에, 순풍을 믿고, '트인 물'이라 적힌 해도를 믿고, 전속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그리고 이빨에 배 밑을 뜯겼을 것이다.
폭풍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들을 죽인 건 종이 한 장이었다.
나는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이 개자식들." 내 목소리가 떨렸다. 분노로. "종이로. 종이 한 장으로 사람을 죽였어."
이네스가 내 옆으로 왔다. 물 밑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조각사다. 해도를 읽을 줄 안다. 그녀도 보았다. 이 바다와 파드론 레알 사이의 거짓말을.
"여기서……"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함대가 여기서."
"응."
"어떻게 지나가요." 그녀가 나를 보았다. "이 미로를. 해도도 없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물을 읽었다.
능선의 결을. 물이 여울 위로 넘을 때 만드는 잔물결을. 색이 옅어지는 경계와 짙어지는 골을. 바다가 스스로 그려 보이는, 종이보다 정직한 지도를.
여울은 미로였다. 하지만 미로에는 길이 있다.
물이 깊은 곳은 짙다. 물이 흐르는 곳은 결이 매끄럽다. 죽은 물, 잠긴 모래 위에는 잔물결이 부서진다.
바다가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여기로 오라고. 여기가 골이라고. 여기를 밟으면 죽는다고.
3년 전, 나는 이 목소리를 못 들었다. 아니, 들었는지도 모른다. 꿈속의 그 손. '침로를 바꿔.' 어쩌면 그건 나 자신이었을지도.
이번엔 놓치지 않는다.
"블라스." 나는 뱃머리에 서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내가 부르는 대로만 조타륜을 꺾어. 한 치도 어긋나지 마."
"도련님—"
"내 눈을 믿어, 블라스." 나는 물을 보았다. "3년 전 못 믿었던 걸, 지금 믿어."
늙은 갑판장이 조타륜을 두 손으로 잡았다. 마디 굵은 손이었다. 아버지의 배를 몰던 손. 나를 어린 시절부터 본 손.
"믿수다." 그가 말했다. "언제나 믿었소, 도련님."
나는 손을 들었다.
"좌현. 조금."
배가 기울었다. 물빛 옅은 골을 따라.
"그대로. 그대로."
첫 번째 능선이 우현 밑으로 스쳐 갔다. 물속 그림자가 배 밑을 핥았다. 견습 소년이 뱃전에서 숨을 들이켰다.
"우현으로 크게. 지금."
산타 페가 몸을 틀었다. 두 번째 능선의 이빨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 나는 물이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다. 우리가 지나온 바로 그 자리에서, 썰물이 모래톱을 드러내며 하얗게 이를 갈았다.
한 발만 늦었어도.
시간이 늘어졌다.
바람도, 소리도, 세상도 다 사라지고 물빛만 남았다. 나는 뱃머리에서 손을 들고 내렸다. 좌현. 우현. 그대로. 멈춰. 블라스는 내 손을 따라 조타륜을 꺾었다. 늙은 손과 젊은 눈이 하나가 되어, 죽은 자들이 못 넘은 미로를 한 뼘씩 밀고 나갔다.
이네스가 낮게 위도를 읊었다. 아버지의 표를 짚으며. 동판이 말하는 자리와 내 눈이 읽는 물이 겹쳐졌다. 종이와 바다가, 처음으로 같은 것을 가리켰다.
정직한 해도와 정직한 바다.
이게 항해다. 이게 도해방이 우리한테서 훔친 거다.
세 번째 능선이 가장 길었다.
물빛이 온통 탁했다. 어디가 골이고 어디가 이빨인지, 순간 나조차 헷갈렸다. 나는 뱃머리에서 무릎을 꿇고 물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물 밑을 노려보았다. 결을 찾았다.
거기.
아주 가느다란 검은 실. 짙은 물이 흐르는 좁은 수로. 여울의 심장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길.
"블라스." 내 목소리가 낮았다. "이제부터 눈감고도 못 돌아와. 한 번에 간다."
"어디로요."
나는 그 검은 실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물 위에.
"바늘구멍으로."
산타 페가 그 좁은 수로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양옆으로 여울이 이를 드러냈다. 썰물이 시작되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물이 빠지면 수로도 얕아진다. 얕아지면 우리도 산 크리스토발이 된다.
"전속." 내가 외쳤다. "돛을 펴! 지금!"
돛이 활짝 펴졌다. 순풍이 우리를 밀었다. 산타 페가 화살처럼 검은 실을 타고 달렸다. 양옆에서 모래톱이 하얗게 부서지는 소리가 천둥 같았다. 배 밑에서 무언가 모래를 스치는 소리—용골이 여울의 등을 긁는 소리—가 났다.
이네스가 내 팔을 붙잡았다.
견습 소년이 눈을 감았다.
블라스가 이를 악물고 조타륜을 붙들었다.
그리고—
배가 앞으로 튕겨 나갔다.
용골 밑의 저항이 사라졌다. 모래가 물러갔다. 물빛이, 다시 짙은 남빛으로 돌아왔다.
트인 물이었다. 진짜로 트인 물.
우리가 지나온 뒤에서, 유령 여울이 썰물에 온 이빨을 드러내며 하얗게 울부짖었다. 산 크리스토발을 삼킨 아가리가, 이번엔 빈 채로 닫혔다.
한동안 아무도 말을 못 했다.
블라스가 조타륜에 이마를 댔다. 어깨가 떨렸다. 견습 소년이 갑판에 주저앉아 울었다. 이네스는 내 팔을 놓지 않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여울은 이제 우리 뒤에 있었다. 3년 동안 나를 붙잡고 놓지 않던 것. 밤마다 나를 물속으로 끌고 가던 손. 그것을 넘었다.
"아버지." 나는 소리 내지 않고 입술만 움직였다. "블라스가 도련님 배를, 여기까지 몰았습니다."
그리고 산 크리스토발의 사람들에게.
'미안하다. 3년 늦었다. 하지만 왔다. 내가 왔다. 그리고 지나갔다. 너희가 못 넘은 곳을.'
물빛이 흐렸다. 아니, 내 눈이 흐렸다.
이네스가 마침내 손을 놓았다. 젖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
"당신은……" 그녀가 목소리를 골랐다. "3년 전에 이걸 봤어야 했어요. 그럼 함대가."
"봤을지도 몰라." 나는 조용히 말했다. "부(副)도선사였으니까. 어쩌면 내가 침로를 바꾸라고 소리쳤을지도. 아무도 안 들었을지도. 기억이 없어서 몰라."
나는 여울을 마지막으로 보았다.
"하지만 이제 알아. 그거면 돼."
해가 높이 떴다.
산타 페는 온전했다. 용골이 긁혔지만 뚫리지 않았다. 우리는 살아서 유령 여울의 반대편에 있었다. 산 크리스토발 이후, 그 물을 넘어 살아남은 최초의 배.
이네스가 동판을 폈다. 아버지의 침로는 여기서 한 점을 더 가리켰다. 여울 너머, 서쪽으로. 이틀 거리.
지워진 해안.
"이틀." 그녀가 말했다. "아버지 말이 맞다면. 이틀 뒤에."
"맞아." 내가 말했다. "여기까지 맞았으니까. 여울도, 위도도, 편차도. 네 아버지는 한 번도 틀리지 않았어."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으로, 아주 옅게 웃었다.
이틀이 지났다.
나는 이틀 내내 뱃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자지 않았다. 서쪽만 보았다. 동판이 가리키는 그 점만. 어떤 공식 해도에도 없는 그 점만.
블라스가 마른 빵을 손에 쥐여 줬다. 이네스가 옆에 서서 함께 서쪽을 보았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말이 필요 없었다. 우리는 세상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도해방이 세상에서 지운 끝을.
이틀째 새벽.
물빛이 또 변했다.
이번엔 다른 변화였다. 여울의 탁함이 아니었다. 뭔가 다른. 육지가 가까울 때 물이 띠는 빛. 강물이 섞이고, 흙이 흘러들고, 바다가 뭍의 냄새를 품을 때의 그 빛.
새들이 나타났다. 대양 한복판에 있어선 안 될 새들. 뭍의 새들.
내 심장이 뛰었다.
"블라스." 내 목소리가 갈라졌다. "저기."
수평선이었다.
3년 동안 나를 부르던 검은 수평선. 도해방이 함대를 죽여서까지 지운 세상의 끝. 어떤 파드론 레알에도, 어떤 통상원의 도장 아래에도 없는 곳.
새벽빛 속에서, 그 수평선이 흔들렸다.
아니.
수평선이 흔들리는 게 아니었다.
그 위로, 무언가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낮고 푸른 능선. 아침 안개를 두른 산등성이.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감싼 긴 해안선.
육지였다.
어떤 해도에도 없는 육지가.
우리 눈앞에, 검은 수평선을 뚫고 솟아오르고 있었다.
검은 물결 위로, 그 능선은 점점 자랐다.
낮고 푸른 산등성이. 안개를 두른 어깨.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감싼 긴 해안선. 그 뒤로 더 높은 봉우리가 겹겹이 솟아, 아침 해가 그 등줄기를 금빛으로 긋고 있었다.
나는 뱃머리를 붙잡았다. 손이 떨렸다.
3년.
3년 동안 나를 부르던 것이 저기 있었다.
"마테오." 블라스의 목소리도 떨렸다. 늙은 갑판장이, 반평생을 바다에서 산 사내가, 아이처럼 떨었다. "저게… 저게 진짜요?"
"진짜야." 나는 말했다. 목이 메었다. "블라스, 진짜야."
이네스가 내 옆으로 왔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난간을 쥔 손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도해방에 아비를 잃은 여자. 그 아비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진실이 지금 그녀 눈앞에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뺨을 타고 무언가 흘러내렸다. 그녀는 닦지 않았다.
배 안이 술렁였다.
갑판으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반쯤 죽은 눈으로 몇 주를 버틴 자들. 물이 떨어져 가고, 빵에 곰팡이가 피고, 서로의 얼굴에서 죽음을 읽던 자들.
그들이 육지를 보았다.
"뭍이다!"
누군가 소리쳤다. 그러자 봇물이 터졌다.
"뭍이다! 뭍이야! 살았다!"
사내들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울었다. 무릎을 꿇는 자도 있었다. 견습 소년은 돛대 밧줄을 타고 절반쯤 올라가 두 팔을 벌리고 소리를 질렀다. 아무도 그를 말리지 않았다.
나는 그 소리 한복판에 서서, 오직 한 가지만 생각했다.
'거짓말이 아니었어.'
내 기억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불탄 항해일지 한 조각도, 부서진 머릿속에 새겨진 해안선도, 모두가 미쳤다고 한 확신도 — 거짓말이 아니었다.
저기 있었다.
도해방이 세상에서 지운 땅이. 함대 하나를 통째로 죽여서까지 감춘 진실이. 여기, 검은 수평선 너머에, 이렇게 버젓이 살아 있었다.
"침로 유지." 나는 소리쳤다. 목소리에 다시 힘이 돌아왔다. "블라스, 수심 재. 우린 이 해안을 몰라. 여울이 어디 숨었는지 몰라."
"예!"
"돛 줄여. 천천히 들어간다. 여기서 좌초하면… 여기까지 온 게 다 헛일이야."
블라스가 명령을 되받아 외쳤다. 사내들이 눈물을 훔치며 밧줄로 달려갔다. 살았다는 기쁨이, 이제 살아남아야 한다는 규율로 바뀌었다.
측연이 던져졌다. 매듭 지은 밧줄이 물속으로 사라졌다가 올라왔다.
"열두 길!" 수부가 외쳤다.
깊었다. 아직 깊었다. 나는 해안선을 읽었다. 파도가 부서지는 선, 물빛이 바뀌는 자리, 물결이 감기는 곶. 바다는 언제나 뭍의 모양을 물 위에 그려 놓는다. 읽을 줄 아는 자에게만.
곶 안쪽으로 물이 잔잔했다. 만이었다. 강이 흘러드는 만.
"저기." 나는 손을 뻗었다. "저 곶 뒤로 든다. 바람도 막히고, 물도 잔잔해. 강어귀야."
이네스가 나를 보았다. "어떻게 알아요?"
"새들." 나는 하늘을 가리켰다. 하얀 새 떼가 곶 뒤에서 날아올라, 다시 곶 뒤로 내려앉고 있었다. "저기 물고기가 많아. 물고기가 많은 건 강물이 바다로 흘러든다는 뜻이야. 강이 있으면… 마실 물이 있어."
그녀의 입가에 아주 옅은 것이 스쳤다. 감탄이었을까. 나는 다시 앞을 보았다.
만으로 들어섰다.
바람이 곶에 막혀 잦아들자, 세상이 조용해졌다. 몇 주 만에 처음으로, 배가 흔들리지 않았다. 물이 유리처럼 매끄러웠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보았다.
해안에.
사람이었다.
내 심장이 멎었다.
모래톱 위에, 나무 그늘 아래에, 사람들이 서 있었다. 하나가 아니었다. 여럿이었다. 그들이 우리를 보고 있었다.
배가 멈춘 듯 고요해졌다. 방금까지 울며 웃던 사내들이 얼어붙었다. 손이 칼자루로 갔다.
"쏘지 마." 나는 낮게, 그러나 단단하게 말했다. "아무도 손대지 마. 화승총 내려."
"마테오—" 누군가 말했다.
"내려!" 나는 돌아섰다. 눈으로 갑판을 훑었다. "저들은 이 땅의 주인이야. 우린 손님이고. 손님이 칼을 뽑으면… 그건 우리가 도해방과 다를 게 없다는 뜻이야."
사내들이 손을 멈췄다.
나는 다시 해안을 보았다. 그들은 도망치지 않았다. 숨지도 않았다. 다만 서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창을 든 자도 있었다. 그러나 창끝은 아래를 향했다. 경계하되, 먼저 찌르지는 않는.
그들도 우리를 읽고 있었다.
바다가 사람을 읽듯, 뭍의 사람들이 바다에서 온 우리를 읽고 있었다.
우리는 작은 배를 내렸다.
블라스가 반대했다. "너무 위험하오. 저들이 몇인 줄도 모르고—"
"그러니까 적게 가야 해." 나는 이미 밧줄을 잡고 있었다. "무리 지어 가면 군대로 보여. 몇만 간다. 무기 없이."
"무기 없이?"
"칼을 찬 손님을 반기는 집은 없어."
나는 이네스를 보았다. "너는 남아."
"싫어요." 그녀는 이미 뱃전을 넘고 있었다. "내 아버지가 죽은 이유가 저기 있어요. 내가 안 보면, 누가 봐요?"
나는 그녀를 말릴 수 없었다. 애초에 말릴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
블라스와 견습 소년, 그리고 물통 몇 개. 그것이 전부였다. 우리는 노를 저어 해안으로 향했다.
물이 얕아졌다. 노 끝이 모래를 긁었다. 나는 배에서 내려, 3년 만에 처음으로 — 아니, 어쩌면 태어나 처음으로 — 어떤 해도에도 없는 땅을 밟았다.
발밑의 모래는 따뜻했다.
그들이 다가왔다.
앞선 사내는 키가 크고, 이마에 붉은 흙으로 그린 선이 있었다. 목에는 조개와 반질반질한 씨앗을 꿴 목걸이. 눈이 깊고 침착했다. 그는 창을 들고 있었으나, 여전히 창끝은 땅을 향했다.
나는 두 손을 폈다. 비어 있음을 보였다. 천천히,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였다.
그가 나를 오래 보았다.
그러더니, 그도 손을 폈다. 비어 있는 손을. 그리고 자기 가슴에 얹었다.
말은 통하지 않았다. 한 마디도. 그러나 어떤 것은 말이 필요 없다. 나는 물통을 가리키고, 강 쪽을 가리키고, 마시는 시늉을 했다. 그가 알아들었다. 잠시 부하들과 무어라 나누더니, 손짓으로 따라오라 했다.
우리는 따라갔다.
강이 있었다.
숲을 가르고, 맑은 물이 바다로 흘러들었다. 나는 두 손으로 물을 떠 마셨다. 차고, 달았다. 뒤에서 견습 소년이 짐승처럼 물에 얼굴을 처박았다. 나는 웃을 뻔했다.
그리고 그 순간에도, 내 눈은 일하고 있었다.
강폭. 물살. 숲의 나무들 — 내가 아는 어떤 나무와도 달랐다. 잎이 넓고, 꽃이 낯설었다. 새들의 깃털은 붉고 푸르렀다. 세비야의 시장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빛깔.
사람들의 집이 강 위쪽에 보였다. 나무와 풀로 지은, 그러나 허술하지 않은 집들. 밭이 있었다. 사람이 심고 거둔 밭. 짐승을 기르는 우리도 있었다.
여기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오래, 아주 오래.
이곳은 빈 땅이 아니었다. 주인 없는 땅이 아니었다. 도해방이 '사사로이 차지하려' 모든 해도에서 지운, 살아 있는 세계였다.
그날 밤, 나는 잠들지 못했다.
배로 돌아와, 나는 이네스를 불렀다. 남은 초에 불을 붙였다. 불탄 항해일지 조각을 펼쳤다. 그 옆에 빈 양피지를 놓았다.
"뭘 하려고요?" 이네스가 물었다.
"증거." 나는 펜을 들었다. "우리가 여기 왔다고 말만 하면, 벨라스코는 미친놈의 헛소리라 할 거야. 세비야가 그를 믿지, 죽은 자로 아는 나를 믿겠어?"
나는 양피지 위에 선을 그었다.
"그러니까 부정할 수 없는 걸 가져가야 해. 누구도 반박 못 할 걸."
이튿날부터, 우리는 일했다.
나는 해안선을 측량했다. 만의 폭, 곶의 각도, 강어귀의 위치. 걸음으로 재고, 밧줄로 재고, 눈으로 재어 종이에 옮겼다. 3년 전, 나를 한 세대에 한 번 나올 도선사라 부르게 한 그 손이, 다시 움직였다.
이네스는 그 곁에서 제도했다. 도해방에 아비를 잃었으나, 아비에게서 물려받은 손. 그녀의 선은 정확하고 아름다웠다. 내 거친 측량이 그녀의 손에서 진짜 해도가 되었다.
밤이 오면 나는 별을 쟀다.
아스트롤라베를 들어, 북극성의 높이를 재었다. 이 땅의 위도. 해가 가장 높이 뜬 정오, 그림자의 길이를 재었다. 두 번, 세 번, 열 번. 오차를 지웠다.
"위도 하나로는 부족해." 나는 중얼거렸다. "경도가 필요해. 우리가 세비야에서 얼마나 서쪽에 있는지."
경도. 그 시대 누구도 바다 위에서 정확히 재지 못한 것. 그러나 나는 산 크리스토발의 침로를 기억했다. 매일의 항정을, 매듭으로 잰 속도를, 모래시계로 잰 시간을 기억했다. 나는 그것을 거꾸로 풀었다. 우리가 지나온 물길 전부를 종이 위에 되살렸다.
날이 갈수록 종이가 채워졌다.
해안선. 수심. 위도. 별자리. 조수의 때. 바람의 방향. 강의 위치. 이 땅에서 자라는 것들 — 나는 낯선 나무의 잎을, 붉은 새의 깃털을, 그들이 쓰는 조개 목걸이를 그렸다. 씨앗 몇 알을 천에 쌌다. 이 땅이 아니고서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들.
부정할 수 없는 증거.
측량은 거짓말을 못 한다. 별은 거짓말을 못 한다. 위도와 경도는 딱 한 곳만 가리킨다. 이 종이를 통상원 탁자 위에 펼치면, 누구든 계산할 수 있다. 그리고 계산은 말할 것이다 — 여기, 이 자리에, 땅이 있다고. 파드론 레알이 텅 비워 둔 그 자리에.
도해방이 아무리 진짜 해도를 감춰도, 이제 진짜 해도가 하나 더 생기는 것이다.
그들이 지운 자리에, 내가 다시 그린 해도가.
닷새째 되던 날.
나는 뱃머리에 서서, 완성되어 가는 해도를 손에 들고 있었다. 이네스의 마지막 선 몇 개만 남았다. 그것이 그어지면, 세상에 없던 땅이 종이 위에 존재하게 된다.
블라스가 곁에 와 섰다. 그는 오래 해안을 보다가, 낮게 말했다.
"우리가… 정말 해낸 거요?"
"거의." 나는 종이를 접었다. "이걸 세비야에 가져가면, 그때 해낸 거야."
"세비야라." 블라스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 사자 아가리로 다시 들어가야 하는군."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나는 서쪽 하늘을, 그리고 우리가 온 동쪽 바다를 보았다.
여기까지 오는 데 3년이 걸렸다. 이름을 잃고, 사람을 모으고, 배를 얻고, 스승의 배신을 알고, 두 번이나 죽을 뻔하고.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서늘했다.
너무 조용했다. 도해방이 함대를 죽여서까지 지킨 비밀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마지막 며칠은 아무 방해도 없었다. 살라사르는 어디 있는가. 벨라스코는.
바다가 너무 잔잔할 때, 나는 늘 폭풍을 의심하도록 배웠다.
그 서늘함이 옳았다.
견습 소년의 목소리가 돛대 위에서 떨어졌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다 알아들었다. 그리고 온몸의 피가 식었다.
"돛이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동쪽에! 돛이 떠요! 하나… 아니, 둘, 셋—"
나는 뱃머리를 박차고 고물로 달렸다. 아스트롤라베를 던지듯 눈에 대고 동쪽 수평선을 훑었다.
검은 점들.
우리가 사흘 전 넘어온 바로 그 검은 수평선 위로, 돛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한 무리의 함대. 우리 산타 페 하나로는 상대도 안 될 규모.
그리고 그 선두의 돛, 가장 큰 돛에.
바람이 그것을 펼쳐 보였다.
물수리. 물고기를 움켜쥔 발톱.
도해방의 표식.
살라사르였다.
"어떻게…" 이네스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어떻게 여길 알고—"
"기다린 거야." 내 목소리가 낯설게 차가웠다. 머릿속이 얼음처럼 맑아졌다. "우릴 막지 않았어. 여기까지 오게 뒀어. 왜? 우리가 길을 찾아주길 기다린 거야. 지워진 해안으로 가는 길을. 우리가 앞장서서 열어주길."
내가 그렸다. 내 측량이, 내 침로가, 저들을 여기까지 데려왔다.
"그리고 이제." 나는 다가오는 검은 돛들을 보았다. "우리가 쓸모를 다했으니…"
말을 맺지 못했다.
맺을 필요도 없었다.
저 함대는 우리를 세비야로 돌려보내려 오는 게 아니었다. 이 해안을 발견한 자를, 이 해도를 그린 손을, 이 진실을 아는 입을 — 하나도 남김없이 지우러 오는 것이었다.
벨라스코는 우리를 살려 보내지 않을 것이다.
살아서 이 땅을 본 자는, 단 한 명도.
"검은 돛이 다가온다."
나는 아스트롤라베를 내렸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떨리지 않았다.
"블라스."
"예, 도련님."
"닻을 올려. 지금."
늙은 갑판장이 나를 보았다. "저 넷을 상대로… 우리 하나로 맞선다는 말입니까."
"맞서지 않아." 나는 뱃머리를 돌아보았다. 사흘 전 우리가 넘어온 바다. 그 물빛을, 그 결을, 그 숨결을 나는 안다. 저들은 모른다. "저들을 우리가 아는 바다로 끌고 들어갈 거야."
이네스가 다가왔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지만, 눈은 죽지 않았다. "무슨 뜻이에요."
"화력으로는 못 이겨. 열여섯 문 대 우리 여섯 문. 배도 저쪽이 빠르고 무겁지." 나는 손가락으로 남서쪽을 가리켰다. "하지만 저 앞바다는 내 손바닥이야. 사흘 동안 내가 재고 그렸어. 여울이 어디 있는지, 해류가 어디로 꺾이는지, 썰물이 언제 바닥을 드러내는지 — 나만 알아."
블라스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살라사르는 배를 사고로 침몰시키는 자야." 나는 웃었다. 웃음이 나왔다. "그 사고를, 이번엔 내가 낸다."
닻이 올랐다.
산타 페가 뱃머리를 남서로 틀었다. 지워진 해안을 등지고, 얕은 바다 쪽으로. 육지를 왼편에 끼고 나아가는 침로. 미친 짓이었다. 얕은 물로 배를 몰아넣는 건 자살이나 다름없다.
내가 그 얕은 물의 지도를 그린 자만 아니라면.
"견습!" 나는 소년을 불렀다. "측심줄. 뱃머리에 서서 계속 던져. 한 번도 쉬지 말고. 숫자를 외쳐."
"예!"
소년이 납추 달린 줄을 잡고 뱃머리로 달려갔다. 첨벙, 줄이 떨어졌다.
"일곱 길!"
깊다. 아직은.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돛 넷이 부채꼴로 펼쳐지며 다가오고 있었다. 선두의 가장 큰 배 — 살라사르의 기함. 뱃전에 늘어선 포문이 햇빛에 번득였다. 저쪽은 우리가 도망친다고 여긴다. 얕은 바다로 겁먹고 달아난다고.
그렇게 여겨야 한다.
"이네스." 나는 낮게 말했다. "키를 봐 줘. 내가 손을 들면 그대로, 주먹을 쥐면 왼편으로 한 뼘. 손가락을 펴면 오른편으로 한 뼘. 목소리는 안 통해. 바람이 다 먹어."
"손 하나에 배를 건다고요."
"내 손 하나에 저 여울이 걸려 있어."
"다섯 길!"
바닥이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물빛을 읽었다. 짙은 남색이 옅은 청록으로 바뀌는 경계. 그 너머는 모래톱. 사흘 전 썰물에 물 위로 등을 드러냈던 그 모래톱. 지금은 밀물이라 물에 잠겨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으니까, 함정이다.
살라사르의 기함이 거리를 좁혔다. 첫 포성이 울렸다. 물기둥이 우현 뒤쪽에서 솟았다. 아직 멀다. 겁을 주려는 포격.
"마테오!" 블라스가 외쳤다. "따라붙어요!"
"오라고 해."
나는 물빛만 보았다. 옅은 청록의 경계가 코앞이었다. 여기다. 모래톱의 북쪽 끝. 사흘 전 내가 표시해 둔, 물길이 실낱처럼 뚫린 단 하나의 틈.
그 틈은 폭이 배 한 척 반. 여길 지나려면 물길을 정확히 타야 한다. 한 뼘만 어긋나도 용골이 모래에 박힌다.
나는 손을 들었다. 그대로.
"세 길 반!"
산타 페가 옅은 청록의 물 위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양옆으로 물빛이 더 옅어졌다. 모래톱이 수면 바로 아래에서 숨죽이고 있었다. 우리는 그 사이 실낱 물길 위에 있었다.
주먹을 쥐었다.
이네스가 키를 왼편으로 한 뼘 당겼다. 뱃머리가 부드럽게 꺾였다. 물길을 탔다.
"두 길!"
블라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두 길이면 용골 밑에 물이 한 뼘 남짓. 조금만 더 얕아지면 배가 멈춘다.
멈추지 않는다. 이 물길은 내가 안다.
손가락을 폈다. 오른편 한 뼘. 뱃머리가 다시 살짝 틀렸다.
"세 길! 세 길 반!"
물길을 빠져나왔다. 다시 깊어졌다. 산타 페는 모래톱을 관통해 그 남쪽 깊은 물로 나왔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살라사르의 기함이 물빛을 몰랐다.
몰랐으니까, 그대로 밀고 들어왔다. 우리가 지난 자리를, 우리가 방금 빠져나온 그 옅은 청록의 바다를, 아무 의심 없이.
기함이 옅은 청록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멈췄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이 거리에선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보았다. 그 큰 배가 앞으로 고꾸라지듯 휘청하더니, 뱃머리가 우뚝 서고, 돛이 앞으로 크게 출렁였다. 용골이 모래에 박힌 것이다. 스무 노트로 달려온 무게가 통째로 모래톱에 얹혔다.
좌초.
"박혔다!" 블라스가 소리쳤다. 늙은 목소리가 갈라졌다. "저 개자식, 모래에 박혔어!"
한 척.
하지만 셋이 남았다. 그리고 그들은 기함이 멈추는 걸 보았다. 물길을 배웠다. 앞의 두 척이 속도를 줄이며 좌우로 갈라졌다. 모래톱을 피해 우회하려는 것이다.
우회하게 두면, 우리는 화력에 잡아먹힌다. 셋이 삼면에서 포문을 열면 산타 페는 부서진다.
나는 하늘을 보았다. 해의 위치. 물의 결.
썰물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네스. 블라스. 잘 들어."
두 사람이 나를 보았다.
"지금 물이 빠지기 시작했어. 앞으로 반 시진이면 저 모래톱 전체가 물 위로 등을 드러내. 지금 좌우로 갈라진 저 두 척은 모래톱 가장자리를 따라 우릴 돌아오려 하고 있어."
나는 남동쪽을 가리켰다. 모래톱의 긴 등줄기가 물 밑으로 뻗은 방향.
"그런데 저 가장자리는 곧아 보여도 안 곧아. 남동쪽으로 갈고리처럼 휘어 있어. 사흘 전 내가 노를 저어 재 봤어. 저기로 돌아 들어오는 배는, 물이 빠지는 지금—"
"걸린다." 이네스가 속삭였다.
"걸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저 두 척을 그 갈고리 안쪽으로 유인하면 돼. 우리가 미끼가 돼서."
블라스가 침을 삼켰다. "미끼가 너무 얕게 들어가면, 우리도 걸립니다."
"안 걸려." 나는 키를 보았다. "우리 산타 페는 흘수가 얕아. 저 무거운 캐랙들보다 두 자는 얕게 뜬다. 저들이 못 지나는 물을 우리는 지나. 이네스, 다시 키를 잡아. 이번엔 눈 똑바로 뜨고."
나는 뱃머리를 돌렸다. 좌우로 갈라진 두 척 사이로, 정확히 그 한가운데로.
미끼가 되려면, 잡힐 듯이 들어가야 한다.
두 척이 우리를 물었다.
우리가 저희 사이로 뛰어드는 걸 보고, 좌우에서 동시에 뱃머리를 틀어 조여 왔다. 포문이 열렸다. 이번엔 겁주는 포격이 아니었다. 좌현 배가 현측 일제사격을 퍼부었다.
세상이 찢어졌다.
포탄 하나가 우리 뒷돛대 활대를 부쉈다. 나무 파편이 비처럼 쏟아졌다. 견습 소년이 비명을 질렀다. 밧줄이 끊어져 채찍처럼 갑판을 후려쳤다.
"침로 유지!" 나는 고함쳤다. "한 뼘도 틀지 마!"
우리는 두 척 사이를 그대로 관통했다. 등 뒤에서 두 번째 일제사격이 물을 때렸다. 빗나갔다. 우리는 이미 그들의 포각을 벗어나 남동쪽으로, 갈고리의 안쪽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두 척이 뒤를 쫓아 뱃머리를 틀었다.
바로 그 순간, 나는 물빛이 바뀌는 걸 보았다. 썰물이 반 자를 더 빼먹었다. 갈고리의 안쪽 등줄기가 물 바로 밑까지 올라와 있었다.
우리 산타 페는 그 위를 미끄러져 지났다. 용골 밑에 물 반 뼘. 심장이 멎을 듯했지만, 지났다.
뒤따르던 두 척은—
지나지 못했다.
첫 번째 배가 갈고리에 얹혔다. 기함과 똑같이. 뱃머리가 솟구치고 돛이 앞으로 무너졌다.
두 번째 배는 그걸 보고 급히 키를 틀었다. 하지만 썰물의 바다에서 무거운 캐랙은 빨리 돌지 못한다. 옆구리를 보이며 돌던 그 배가, 제 무게에 밀려 모래톱 등줄기에 옆으로 얹혔다. 가장 나쁜 방식으로. 배가 기울며 현측이 하늘을 향했다.
세 척.
바다 위에 도해방의 캐랙 세 척이 모래에 박혀 있었다. 썰물은 계속 물을 빼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저들은 더 깊이 좌초할 것이다. 다음 밀물까지, 저들은 저 모래 위에서 꼼짝 못 한다.
포 소리가 멎었다. 바다가 조용해졌다.
블라스가 갑판에 주저앉았다.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냈다. 견습 소년이 부서진 활대 옆에서 멍하니 나를 보았다. 이네스는 키를 잡은 채 손을 떨고 있었다.
넷 중 셋을 잡았다.
기함이 남았다.
가장 먼저 박힌, 가장 큰 배. 살라사르의 배.
나는 산타 페를 돌렸다. 좌초한 기함 쪽으로, 천천히. 사거리 밖에서 배를 세웠다. 물이 빠지며 기함은 이제 옆으로 기울어 가고 있었다. 갑판 위에 사람들이 개미처럼 우왕좌왕했다.
그 뱃전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유일한 자. 팔짱을 끼고, 기우는 갑판 위에 못 박힌 듯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거리가 멀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엔리케 살라사르.
배를 사고로 침몰시키는 재의 손. 산 크리스토발을 유령 여울로 몰아넣은 자. 삼 년 전 내 아버지와 형제들을 죽음으로 보낸 칼.
그가 이제 제 배와 함께 모래에 박혀, 물이 차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오래 그를 보았다.
포를 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바다가 그를 잡았다. 그가 남을 잡던 방식 그대로 — 사고로.
"마테오." 이네스가 곁에 왔다. "쏘지 않아요?"
"바다가 쏠 거야." 나는 뱃머리를 돌렸다. "밀물이 저 배를 삼킬 때까지, 저자는 제가 삼백 명을 어떻게 죽였는지 생각할 시간이 있겠지."
우리는 좌초한 세 척을 등지고, 지워진 해안을 향해 뱃머리를 세웠다.
살라사르는 끝났다.
그날 밤, 우리는 해안의 얕은 만에 닻을 내렸다.
부서진 활대를 손보고, 끊어진 밧줄을 잇고, 견습 소년의 찢어진 어깨를 이네스가 천으로 묶었다. 블라스는 럼을 한 통 꺼내 왔다. 아무도 크게 웃지 못했다. 이겼다는 실감이, 아직 몸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뱃머리에 앉아 불탄 항해일지 조각을 꺼냈다. 삼 년을 품어 온 한 조각. 아버지의 손에서 타다 남은 해안선.
이제 그 해안이 내 눈앞에 있었다. 지워진 땅. 저들이 함대를 죽여서까지 감춘 곳. 나는 그곳을 두 발로 밟았고, 그곳을 그렸고, 그곳을 지키러 온 칼 넷을 모래에 박아 놓았다.
증거는 여기 있다. 이네스가 새로 그린 해도. 내 측량. 이 땅 자체.
이겼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이네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테오. 우리가 이걸 어디로 가져가죠."
나는 그녀를 보았다.
"세비야요."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이 해도를, 이 증거를, 세비야 통상원에 가져가서 파드론 레알 앞에 세워야 도해방이 무너져요. 안 그러면 이건 그냥… 우리 손 안의 종이일 뿐이에요."
블라스가 럼잔을 내려놓았다. 웃음기가 가셨다.
세비야.
통상원. 파드론 레알을 지키는 곳. 세계의 원본 해도가 잠긴 방.
그리고 그 방의 열쇠를 쥔 자.
돈 암브로시오 벨라스코. 도선사장. 도해방의 숨은 수장. 내 스승.
세비야는 그의 도시였다. 통상원의 모든 문, 모든 위병, 모든 서기가 그의 손안에 있었다. 우리가 이 증거를 들고 그 문으로 걸어 들어가는 순간—
무법자 마테오 카브레라가, 죽은 자가, 도해방의 심장 한복판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었다.
나는 어두운 수평선을 보았다. 북동쪽. 세비야가 있는 방향.
바다는 이겼다. 살라사르도 이겼다.
하지만 진짜 사자의 아가리는, 아직 열리지도 않았다.
해안선의 마지막 못이 모래에 박히던 소리가 아직 손끝에 남아 있었다.
나는 이네스가 말아 든 해도를 내려다보았다. 갓 그린 잉크가 마르지 않아 밤바람에도 미미하게 번들거렸다. 이 종이 한 장이 세계였다. 그리고 이 종이 한 장이 우리를 죽일 것이었다.
"닻을 올린다." 내가 말했다.
블라스가 나를 보았다. 늙은 갑판장의 눈에 든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셈이었다. 물통, 건빵, 돛폭, 사람 수. 여기서 세비야까지. 죽은 자를 산 자로 만들 수 있는 거리인지 아닌지.
"북동으로, 곧장." 나는 덧붙였다. "카나리아를 들르지 않는다."
"미쳤군." 블라스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는 이미 밧줄로 걸어가고 있었다.
카나리아를 들르면 죽는다. 그건 도해방이 가장 먼저 이빨을 심어 둔 항구였다. 우리가 물을 채우러 들어가는 순간, 물수리 문양을 단 배 한 척이 조용히 우리 뒤로 미끄러져 나올 것이다. 항구는 사자가 목을 축이는 웅덩이다. 나는 웅덩이를 피해 사막을 가로지르기로 했다.
산타 페가 신음하며 뱃머리를 돌렸다. 지워진 땅이, 우리가 두 발로 밟았던 그 해안이, 검은 물 너머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돌아가는 길이었다.
사흘째, 물이 반으로 줄었다.
나는 갑판에 서서 하늘을 읽었다. 서쪽에서 부는 바람이 우리를 밀어 주고 있었다. 신의 은총 같은 순풍. 그러나 나는 신을 믿지 않았고, 순풍은 더더욱 믿지 않았다.
순풍은 우리만 미는 게 아니니까.
"이네스." 내가 낮게 불렀다. "살라사르가 지워진 땅에서 우리를 놓쳤을 때, 그자는 어디로 뱃머리를 돌렸을까요."
이네스가 해도 조각 위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손은 늘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지금은 우리가 지나온 물길을, 바람을, 해류를.
"우리처럼 생각했겠죠." 그녀가 말했다. "이 증거를 어디로 가져가야 하는지. 답은 하나뿐이에요. 세비야."
"그럼 그자는 우리를 쫓지 않아요." 내가 말했다. "우리를 기다리죠."
침묵.
살라사르는 바보가 아니었다. 재의 손. 배를 사고로 침몰시키는 자. 그자는 넓은 바다에서 작은 카라벨 하나를 뒤쫓는 헛수고를 하지 않는다. 그자는 모든 길이 모이는 한 점, 물병의 목처럼 좁아지는 그곳에 먼저 가서 그물을 친다.
과달키비르 강. 세비야로 들어가는 단 하나의 물길.
산루카르에서 시작해 굽이굽이 상류로 올라가야 통상원의 부두에 닿는다. 강폭이 좁고, 얕은 여울이 많고, 밀물을 기다려야 배가 뜬다. 대양에서 우리를 잡지 못한 자가, 그 강에서는 우리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는다.
"우리는 사자의 아가리로 걸어 들어가는 게 아니에요."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빨 사이를 지나서, 그다음에 아가리로 들어가는 거죠."
블라스가 럼 냄새 나는 숨을 뱉었다. "위로가 되는 소리군, 도련님."
닷새째 밤, 견습 소년이 돛대 위에서 소리쳤다.
"돛! 남쪽 수평선에, 돛이요!"
나는 뛰어 올라갔다. 어둠 속, 별빛을 등지고 검은 삼각형 하나가 떠 있었다. 멀었다. 아주 멀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와 같은 침로를 잡고 있었다. 북동으로. 세비야로.
"살라사르?" 이네스가 올라와 물었다.
나는 오래 보았다. 돛의 폭. 선체가 물에 잠긴 깊이. 속도.
"아니요." 내가 말했다. "저건 전령선이에요. 빠르고 가볍고, 화포가 없어요."
"전령선이 왜—"
"우리보다 먼저 세비야에 닿으려고." 나는 이를 물었다. "누가 우리 뒤를 밟고 있었어요. 지워진 땅에서부터. 저 배는 싸우러 온 게 아니라, 소식을 나르러 온 거예요. '죽은 자가 증거를 들고 돌아온다'는 소식을."
만약 저 전령선이 우리보다 먼저 산루카르에 닿으면, 벨라스코는 우리가 강어귀에 나타나기도 전에 모든 준비를 끝낸다. 위병, 서기, 봉인 명령. 그리고 우리를 무법자로 잡아 조용히 목 졸라 죽일 교수대까지.
시간. 결국 이건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블라스." 나는 아래로 소리쳤다. "돛을 전부 펴요. 활대 하나도 남기지 말고."
"이 바람에 다 펴면 돛대가 부러져—"
"부러지기 전에 도착하면 돼요."
우리는 미친 듯이 달렸다.
산타 페는 늙은 배였다. 이네스의 아버지가 압류당했던, 도해방이 부두에 묶어 썩히려 했던 배. 그러나 이 배는 이네스의 아버지가 손수 골조를 짠 배였고, 골조에는 그 사람의 고집이 박혀 있었다. 배는 신음하고 비명을 질렀지만, 부러지지 않았다.
이레째, 우리는 전령선을 시야에서 놓쳤다. 앞섰는지 뒤처졌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게 나를 미치게 했다.
물이 바닥났다. 우리는 빗물을 받았다. 소년이 열이 올라 갑판 아래 누웠다. 이네스가 밤새 그 아이 곁을 지켰고, 나는 밤새 별을 읽었다. 북극성의 높이. 그것 하나로 위도를 잡고, 부서진 항해일지 조각의 기억으로 침로를 다듬었다.
스승이 가르쳐 준 것이었다, 이 모든 게.
별을 읽는 법. 해류를 읽는 법. 바다의 침묵 아래 흐르는 것을 읽는 법. 돈 암브로시오 벨라스코. 그가 내 손에 아스트롤라베를 쥐여 주었고, 그가 내 눈을 열어 주었고, 그가 나를 한 세대에 한 번 나올 도선사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가 아버지의 함대를 유령 여울로 보냈다.
나는 밤바다를 보며 생각했다. 스승님, 당신은 나를 너무 잘 가르쳤어요. 당신이 준 눈으로, 나는 이제 당신을 봅니다.
열하루째 새벽, 물빛이 바뀌었다.
푸른 대양의 물이 흐려지고, 누레지고, 진흙 냄새가 섞였다. 강물이 바다로 밀려 나오는 냄새. 육지의 냄새.
"산루카르." 블라스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과달키비르 강어귀예요, 도련님."
나는 뱃머리에 섰다. 안개 너머로 낮은 해안선이 떠올랐다. 흰 모래톱, 소나무 숲, 그리고 그 뒤로 강이 열리는 어귀. 세비야로 가는 단 하나의 문.
그리고 그 문 앞에.
"이네스." 내 목소리가 말라붙었다.
그녀가 내 곁에 섰다. 그리고 보았다.
강어귀 여울 곁에, 배 두 척이 닻을 내리고 있었다. 화포가 열린 현측. 돛에 감긴 물수리. 발톱에 물고기를 움켜쥔, 도해방의 표식.
살라사르가 먼저 와 있었다.
전령선은 우리보다 빨랐다. 벨라스코는 알고 있었다. 그물은 이미 쳐져 있었다. 우리가 대양에서 아무리 미친 듯이 달려도, 마지막 물길의 목은 저들이 쥐고 있었다.
"돌아가요." 이네스가 숨죽여 말했다. "다른 항구로—"
"다른 항구는 없어요." 나는 그 두 척을 보며 말했다. "세비야로 가는 강은 하나뿐이니까. 저들도 그걸 알아서 여기 있는 거고요."
블라스의 손이 칼자루로 갔다. 소년은 열에 들뜬 눈으로 갑판 난간을 붙잡았다. 이네스의 손안에서 해도가 떨렸다.
우리 배 한 척. 저들 배 두 척. 우리에겐 낡은 팔콘 화포 두 문. 저들에겐 열린 포문이 스무 개.
정면으로는 못 지난다. 정면으로 부딪치면, 우리는 3년 전 아버지의 함대처럼 '사고'로 이 강어귀에 가라앉는다. 그리고 이 해도는, 이 증거는, 진흙 바닥에 영원히 묻힌다.
나는 안개를 보았다. 밀물의 시각을 셈했다. 여울의 위치를 읽었다. 얕은 곳, 깊은 곳. 큰 배가 지날 수 없는 곳, 작은 배만 지날 수 있는 곳.
3년 동안 부서진 채였던 기억 하나가, 그 순간 이가 맞물리듯 제자리를 찾았다.
과달키비르. 나는 이 강을 안다. 견습 시절, 스승을 따라 수백 번 오르내린 강. 밀물과 썰물, 여울과 물골, 그 모든 것이 내 손금처럼 새겨져 있었다.
스승이 가르쳐 준 강으로, 나는 스승의 그물을 빠져나갈 것이다.
"블라스." 나는 조용히, 그러나 또렷하게 말했다. "밀물을 기다립니다. 저들이 못 들어오는 여울로, 우리만 들어갑니다."
밀물이 들었다.
우리는 돛을 반쯤 접고, 노를 저어, 안개 낀 강어귀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살라사르의 두 배는 깊은 물골 한복판에 닻을 내리고 있었다. 큰 배는 큰 물을 따라야 하니까. 나는 그 반대로 갔다. 모래톱을 스치듯, 용골 아래 한 뼘의 물만 남기고, 여울의 등을 타고 넘었다.
"저기다!" 살라사르의 배에서 고함이 터졌다. 안개 사이로 우리를 본 것이다. "카라벨이다! 카브레라다!"
포문이 불을 뿜었다. 물기둥이 우리 우현에서 솟았다. 빗나갔다. 저들은 깊은 물에 발이 묶여 있었다. 우리를 겨눌 수는 있어도, 우리를 따라올 수는 없었다.
"저어! 저어라!" 블라스가 목이 터져라 외쳤다.
두 번째 포성. 활대 하나가 부러져 갑판으로 떨어졌다. 소년이 비명을 질렀다. 이네스는 몸으로 해도를 감싸 안았다.
우리는 여울을 넘었다. 강이 굽어졌다. 소나무 숲이 우리와 저들 사이를 가렸고, 포성이 멀어졌다.
빠져나왔다.
살라사르는 강어귀에 묶였다. 밀물이 다 차기 전엔 그 큰 배들을 여울 위로 띄울 수 없었다. 그 사이 우리는 강을 거슬러 올랐다.
블라스가 노에 엎어져 숨을 몰아쉬었다. 소년이 울음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이네스가 나를 보았다. 그녀의 눈에 처음으로, 두려움이 아닌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웃지 않았다.
강은 굽이굽이 상류로 이어졌다. 진흙빛 물, 낮은 둑, 올리브 밭, 그리고 저 멀리, 안개 위로 서서히 떠오르는 것.
히랄다의 탑.
세비야였다.
우리는 밀물을 타고, 사흘을 강을 거슬러 올랐다.
살라사르는 뒤에 있었다. 그러나 그자는 이제 소식을 나르는 자가 아니라 사냥에서 놓친 짐승을 쫓는 자였다. 벨라스코에게 이미 전갈이 갔을 것이다. '카브레라가 강으로 들어왔다'고.
세비야가 가까워질수록 강 위의 배가 많아졌다. 향신료를 실은 카라크, 은을 나르는 갤리언, 통상원의 깃발을 단 순찰선. 세계의 부가 이 진흙빛 강 하나로 흘러들고 흘러 나갔다.
그리고 그 세계의 부를 지키는 방. 파드론 레알이 잠긴 방. 세계의 원본 해도가 사슬에 묶인 방.
통상원.
나는 뱃머리에 서서 그것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강가에 늘어선 흰 건물들. 부두. 창고. 그리고 그 한복판, 알카사르의 붉은 성벽 곁에 웅크린, 낮고 육중한 석조 건물.
죽은 자를 만든 곳. 아버지의 함대를 유령 여울로 보낸 명령이 서명된 곳. 내 스승이 앉아 있는 곳.
블라스가 내 곁에 섰다. "정말 저기로 걸어 들어갈 거요, 도련님. 위병이 문마다 열둘씩 서 있는 곳으로."
이네스가 해도를 가슴에 안았다. "잡히면, 우린 재판도 없이 사라져요. 저 안엔 벨라스코의 사람뿐이니까."
소년은 열이 내렸지만 창백했다. 그 아이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세 사람을 보았다. 그리고 그 낮고 육중한 석조 건물을 보았다. 3년 전 죽어서, 3년을 이름 없이 표류하다, 이 종이 한 장을 위해 돌아온 나를.
증거는 여기 있다. 이네스의 해도. 내 측량. 지워진 땅을 밟은 내 두 발. 그리고 갑판 아래 사슬에 묶인, 재의 손 살라사르에게서 뜯어낸 증언—
아니. 살라사르는 강어귀에 있었다.
내가 가진 건 종이와 사람, 그리고 진실뿐이었다. 그것으로 사자의 심장을 열어야 했다.
밀물이 밀어 올린 산타 페가, 통상원의 부두에 뱃전을 댔다.
나는 해도를 이네스에게서 건네받아 품에 넣었다. 칼을 풀어 블라스에게 맡겼다. 무기를 지니고 들어가면 그 자리에서 베일 테니까. 나는 맨손으로, 죽은 자의 얼굴로, 걸어 들어갈 것이었다.
부두에 발을 디뎠다. 돌바닥이 3년 만에 발밑에 닿았다.
통상원의 문이, 내 앞에 있었다.
검은 참나무. 무쇠 못. 그 위에 새겨진 카스티야의 문장. 그리고 문 양옆에, 미늘창을 든 위병들.
나는 그 문을 향해 걸었다.
죽은 자 마테오 카브레라가, 도해방의 심장으로, 사자의 아가리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
문이 열렸다.
안에서 밀려 나온 건 냉기였다. 밀랍과 양피지, 오래된 잉크의 냄새. 통상원의 대회의청은 성당처럼 높았고, 성당처럼 서늘했다.
위병들이 미늘창을 교차했다.
"멈춰라."
나는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죽은 자로 남는다. 나는 걸으면서 품에서 접힌 양피지를 꺼내 머리 위로 들었다.
"파드론 레알에 이의를 제기한다!"
목소리가 돌벽을 때리고 되돌아왔다. 회의청 안의 얼굴들이 일제히 돌아섰다. 긴 참나무 탁자. 그 끝에 왕실 감독관의 붉은 인장. 그리고 상석에—
돈 암브로시오 벨라스코.
스승이 나를 보았다. 3년 전 나를 바다로 보낸 그 눈이,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놀라지 않는 것. 그것이 그가 가장 두려운 이유였다.
"이 자를 끌어내라." 벨라스코의 목소리는 낮고 평온했다. "미친 부랑자다. 무기를 지녔을 수 있다."
"무기는 없소." 나는 두 팔을 벌렸다. 위병의 손이 내 옷을 훑었다. 칼은 블라스에게 있었다. 나는 맨손이었다. "규정을 아시잖소, 도선사장. 파드론 레알에 이의가 제기되면, 통상원은 그것을 심리해야 한다. 왕의 법이오."
붉은 인장의 사내—왕실 감독관 데 로하스가 손을 들었다.
"…멈춰라." 그가 벨라스코를 곁눈질했다. "규정은 규정이다. 이 자가 누구냐."
나는 후드를 벗었다.
3년의 소금과 흉터가 드러난 얼굴. 회의청이 술렁였다. 늙은 서기 하나가 펜을 떨어뜨렸다.
"마테오 카브레라." 내가 말했다. "산 크리스토발 원정 부도선사. 3년 전 유령 여울에서 함대와 함께 죽었다고 기록된 자."
침묵이 회의청을 채웠다.
"카브레라는 죽었다." 벨라스코가 말했다. 여전히 평온하게. "이 자는 그 이름을 훔친 사기꾼이다. 감독관, 시간을 낭비하지—"
"그럼 확인하면 되겠군요." 나는 탁자로 다가갔다. 양피지를 그 위에 펼쳤다. "이것이 진짜 파드론 레알이오. 통상원 지하 금고, 세 번째 서랍. 여기 서명이 있소. 도선사장 벨라스코의 손. 그리고 여기—"
내 손가락이 서쪽 대양의 한 지점을 짚었다. 텅 빈 바다.
"—여기, 아무것도 없소. 빈 물."
데 로하스가 몸을 기울였다. "빈 바다가 무슨 증거란 말이냐."
"증거는 이거요."
이네스가 걸어 들어왔다. 위병들이 막으려 했지만 그녀는 이미 탁자 앞이었다. 품에서 두 번째 양피지를 꺼내 첫 번째 옆에 나란히 폈다. 같은 위도. 같은 경도. 그러나 이 해도에는—육지가 있었다.
해안선. 만(灣). 수심의 표기. 물길.
"이건 내가 그렸어요." 이네스의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판각사 마르틴 데 라라의 딸, 이네스. 이 측량은 마테오 카브레라의 것. 8일 전, 그가 두 발로 밟은 해안이에요."
"위조다." 벨라스코가 일어섰다. "감독관, 이건—"
"같은 손이오."
내 말에 그가 멈췄다.
"보시오, 감독관." 나는 세 번째, 네 번째 양피지를 펼쳤다. 라 소르다가 트리아나 뒷골목에서, 이네스가 압류 창고에서, 블라스가 늙은 도선사들의 궤짝에서 긁어모은 것들. 침몰한 원정들의 마지막 해도 사본.
"산 크리스토발. 라 팔로마. 도스 에르마노스. 지난 6년간 '사고'로 사라진 배 셋. 전부 서쪽으로 갔소. 전부 같은 여울에서 죽었소—'유령 여울'."
나는 손가락으로 네 장을 차례로 짚었다.
"그런데 보시오. 이 여울들의 필체를. 수심을 적은 숫자의 꼬리. 물길을 그린 선의 떨림. 넷이 전부—같은 손이오."
이네스가 다섯 번째 양피지를 꺼냈다. 그녀의 판각. 확대해 새긴 필적 대조판. 문제의 숫자 '3'과 '7'의 갈고리, 그 미세한 버릇을 나란히 새겨 놓았다.
"판각사는 필적을 읽어요." 그녀가 말했다. "이 여울들은 실제 측량이 아니에요. 한 사람이 책상 앞에서 지어낸 거예요. 존재하지 않는 여울을, 배들을 유인해 죽이려고."
회의청이 얼어붙었다.
데 로하스의 눈이 다섯 번째 판에서 파드론 레알의 서명으로 옮겨갔다. 같은 갈고리. 같은 떨림.
"이 필적은…" 그가 천천히 말했다. "…누구의 것이냐."
나는 벨라스코를 보았다.
"말해 보게, 마테오."
벨라스코가 웃었다. 처음으로. 그러나 그 웃음은 눈에 닿지 않았다.
"자네는 언제나 선을 읽는 데 천재였지. 한 세대에 한 번 나올 재능. 내가 키웠어. 내가 자네 손에 펜을 쥐여 줬다." 그가 탁자를 돌아 나왔다. "그러니 자네도 알 걸세. 필적이란 흉내 낼 수 있다는 걸. 이 딸년이 아비의 원한으로 내 서명을 베껴 이 아이를 앞세운 거라면? 죽은 자의 이름을 뒤집어쓴 사기꾼과, 몰락한 판각사의 딸. 그게 자네들의 증인인가?"
영리했다. 언제나처럼.
필적은 흔들 수 있다. 해도는 위조라 우길 수 있다. 죽은 자와 몰락한 딸의 말은—무게가 없다.
그는 회의청의 저울을 알았다. 그 저울은 언제나 그의 편으로 기울게 되어 있었다. 이 방은 그의 방이니까. 위병도, 서기도, 반쯤은 그의 사람이었다.
나는 그것을 알고 걸어 들어왔다.
그래서 나는 종이만 가져오지 않았다.
"블라스." 내가 문을 향해 말했다.
문이 열렸다. 블라스가, 사슬 소리와 함께, 한 사내를 끌고 들어왔다.
회의청의 공기가 바뀌었다.
끌려 들어온 사내는 누더기를 걸쳤고, 한쪽 다리를 절었으며, 얼굴 절반이 오래된 화상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러나 살아 있었다. 두 눈이 벨라스코에게 박혔다.
"디에고 모랄레스." 내가 말했다. "산 크리스토발의 키잡이. 나 말고 또 하나의 생존자. 3년간 카나리아의 나병자 수용소에 이름 없이 갇혀 있던 사람."
벨라스코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무언가가 무너졌다.
아주 미세했다. 눈꺼풀의 떨림. 턱의 경직. 그러나 나는 그의 얼굴을 3년간 스승으로 읽어 온 사람이었다. 나는 그 균열을 보았다.
그는 몰랐던 것이다. 모랄레스가 살아 있다는 걸. 살라사르가 처리했다고 보고했을 테니까.
"거짓말이다." 벨라스코가 말했다. 그러나 이번엔, 아주 조금, 목소리가 빨랐다.
"말하시오." 나는 모랄레스에게 몸을 돌렸다. "그날 밤, 유령 여울에서 무엇을 보았소."
모랄레스가 입을 열었다. 화상으로 갈라진 목소리가, 돌벽을 기어올랐다.
"돛이었소." 그가 말했다. "폭풍이 아니었소. 우리는 해도대로 갔소. 도선사장이 봉인해 내려보낸 침로 그대로. 그런데 여울이… 없었소. 해도의 여울이 없었소. 대신 어둠 속에서 돛이 나타났소.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소."
그의 손가락이, 사슬 밑에서, 벨라스코를 가리켰다.
"그리고 그 돛의 사내가, 우리 함장에게 소리쳤소. '벨라스코 도선사장의 안부를 전한다'고."
회의청이 폭발했다.
서기들이 일어섰다. 데 로하스가 탁자를 쳤다. 위병들의 미늘창이 흔들렸다—그러나 이번엔, 누구를 향해야 할지 몰라서.
"저 자는 나병자다!" 벨라스코가 외쳤다. 평온이 벗겨졌다. "미쳐서 헛것을 보는—감독관, 이 광대극을 당장 멈추시오! 나는 통상원 도선사장이오! 30년을 이 왕국의 바다를—"
"그 돛의 사내 이름을 아시오?"
내 목소리가 그의 말을 끊었다.
"엔리케 살라사르. 사략선장. 지금 이 순간 산루카르 강어귀에, 왕실 갤리선 세 척에 나포되어 있소." 나는 데 로하스를 보았다. "어젯밤 내가 그의 위치를 항무관에게 넘겼소. 사람을 보내시오. 그의 배 밑바닥에서, 침몰시킨 배들에서 뜯어낸 뱃머리 장식을 찾을 거요. 그리고 그의 선실에서—도해방의 표식이 찍힌 명령서를."
"도해방…" 데 로하스가 되뇌었다.
"물수리요." 내가 말했다. "물고기를 움켜쥔 발톱. 통상원 안의 결사. 진짜 해도를 감추고 가짜를 팔고, 방해되는 원정을 사고로 위장해 침몰시키는 자들. 부유한 해안을 통째로 해도에서 지워, 사사로이 차지하는 자들."
나는 다시 첫 번째 파드론 레알을 짚었다. 그 빈 바다를.
"이 빈 물이, 그 증거요. 여긴 바다가 아니오. 여긴—땅이오. 그들이 지운 땅."
벨라스코가 나를 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 스승의 눈에서 마지막 계산이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저울을 다시 재는 눈. 어느 판을 버리고 어느 판에 목숨을 걸지 고르는 눈.
그가 골랐다.
"좋다." 그가 말했다. 갑자기, 소름 끼치도록 차분하게. "도해방은 존재한다."
회의청이 숨을 멈췄다.
"존재하고, 이 왕국을 지켰다." 그가 데 로하스에게로 돌아섰다. 이제 그의 목소리는 변론이 아니라 설교였다. "감독관, 생각해 보시오. 세상의 모든 해안을 종이에 그려 세비야 부두에 걸어 두면, 그다음은 무엇이겠소? 포르투갈이, 프랑스가, 잉글랜드가 그 종이를 훔쳐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 닿소. 어떤 해안은 지워야 지킬 수 있소. 나는 그것을 지웠소. 왕국을 위해."
"함대를 죽여서 말이오?" 내가 물었다.
"몇 척의 배가," 그가 나를 향해 돌아섰다. 그 눈에, 이제 후회도 두려움도 없었다. 오직 신념뿐. "왕국의 부(富)를 지키는 값이라면, 싸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실수였다.
그는 자백한 것이다.
변론을 버리고 신념을 택한 순간, 그는 자기가 세운 거짓의 밑돌을 스스로 빼 버렸다. 나는 그를 죽은 자로 되돌릴 필요가 없었다. 그는 스스로 걸어 나와, 회의청 전체 앞에서, 산 크리스토발을 죽였다고 말한 것이다. 왕국을 위해서라고.
데 로하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도선사장." 그가 천천히 일어섰다. "방금 당신은, 국왕 폐하의 원정 함대를, 당신의 판단으로, 침몰시켰다고—이 회의청 앞에서—말했소."
벨라스코가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그의 얼굴에서 그 순간을 보았다. 30년간 저울을 지배해 온 사람이, 처음으로 저울이 자기 무게에 무너지는 것을 느끼는 얼굴. 그는 회의청을 둘러보았다. 서기들. 위병들. 반쯤은 그의 사람이었던 자들. 그러나 이제 아무도 그의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신념은 방패가 아니었다. 신념은 밧줄이었다. 그리고 그는 방금, 제 목에 그것을 걸었다.
"체포하시오." 데 로하스가 위병들에게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도선사장 암브로시오 벨라스코를. 그리고… 도해방의 이름이 적힌 자 전부를."
위병들이 움직였다. 이번엔 망설임 없이. 미늘창이 벨라스코를 향했다.
그는 저항하지 않았다.
위병들이 다가오는데도, 벨라스코는 나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가 웃었다. 이번엔 눈에까지 닿는 웃음이었다. 그래서 더 서늘했다.
"자네가 이겼군, 마테오." 그가 말했다. 낮게. 나만 들리게. "내 최고의 제자가. 내가 가르친 그 눈으로, 나를 읽었어."
"당신이 가르쳤소." 내가 말했다.
"그래. 내가 가르쳤지." 위병의 손이 그의 팔을 잡았다. 그는 뿌리치지 않았다. 다만 마지막으로, 탁자 위의 두 해도를—빈 바다와, 이네스가 그린 해안을—내려다보았다. 오래 그은 사람이 마지막으로 자기 선을 보듯이.
"자네는 그 땅을 세상에 걸겠지." 그가 중얼거렸다. "모두가 보도록. 모두가 닿도록." 그가 고개를 저었다. 슬픔인지 경멸인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자네는 그게 자유라고 믿는군. …나는 그게 두려워서 평생을 지웠는데."
그가 끌려 나갔다.
문턱에서, 그가 한 번 멈췄다. 돌아보지 않고, 등을 보인 채로, 그가 말했다.
"검은 수평선 너머에 뭐가 있는지 아나, 마테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몰라. 30년을 지웠지만, 나도 끝내 몰랐어. 그게—" 그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게 내가 진 이유일세."
그리고 그는 사라졌다. 통상원의 어두운 복도 속으로. 사자의 아가리 속으로. 이번엔, 그가 삼켜지는 쪽이었다.
회의청은 오래 조용했다.
데 로하스가 두 해도 앞에 서 있었다. 빈 바다와, 그려진 해안. 그의 손가락이 이네스의 해안선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만을 지나, 물길을 지나, 수심의 숫자를 지나.
"이 땅이." 그가 말했다. "실재하는가."
"내 두 발이 밟았소." 내가 말했다. "이네스의 손이 그렸소. 모랄레스가 그 바다에서 살아 돌아왔소."
데 로하스가 오래 나를 보았다. 그리고 늙은 서기에게 고개를 돌렸다.
"기록하라." 그가 말했다. "파드론 레알에 대한 이의는—인정되었다. 도해방은 이 시각부로 해체된다. 통상원 도선사장 벨라스코, 사략선장 살라사르, 그리고 명부에 오른 전원을 왕실 법정에 회부한다."
펜이 양피지를 긁는 소리가, 회의청에 가득 찼다.
이네스가 내 곁에 섰다. 그녀는 울지 않았다. 다만 탁자 위, 자기 아버지가 죽어서까지 지키려던 진실을—이제 왕실의 잉크가 공식으로 적어 내려가는 것을—지켜보았다.
"끝났어요?" 그녀가 조용히 물었다.
"아니." 내가 말했다.
그리고 데 로하스가, 서기의 손을 멈추게 하고, 마지막 한 줄을 불렀다. 그 한 줄에, 3년이 걸렸다. 함대 하나가, 사람들이, 이름 하나가 걸렸다.
"그리고 기록하라." 그가 나를 보며 말했다. "서쪽 대양, 위도 그 지점의 해안은—더 이상 봉인되지 않는다. 통상원은 그곳으로의 항로를 개방한다."
수평선의 자물쇠가, 풀렸다.
회의청을 나서는데, 데 로하스가 나를 불러 세웠다.
"카브레라."
돌아보았다. 늙은 판관이 두 해도를 든 채 서 있었다. 빈 것과, 그려진 것.
"이 빈 해도는." 그가 물었다. "어찌할까."
나는 그것을 보았다. 3년 동안 나를 죽이려 든 거짓. 도해방이 세계에 씌운 눈가리개.
"태우지 마시오." 내가 말했다. "남겨 두시오. 어떻게 바다가 지워지는지, 후세가 볼 수 있게."
데 로하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통상원의 문을 나섰다.
과달키비르 강 위로 저녁 해가 낮게 걸려 있었다. 부두는 여느 날처럼 시끄러웠다. 짐꾼들이 통을 굴리고, 상인들이 값을 다투고, 갈매기가 돛대 사이를 갈랐다. 아무도 모른다. 오늘 이 도시의 어떤 문 안에서, 세계 하나가 다시 그려졌다는 것을.
블라스가 계단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늙은 갑판장은 모자를 벗어 손에 쥔 채였다.
"어떻게 됐소, 도련님."
나는 그의 앞에 섰다. 도련님. 3년 전, 표류해 돌아온 나를 미친 유령 취급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 그가 나를 그렇게 부를 때마다, 나는 아버지의 갑판을 다시 밟는 기분이었다.
"블라스." 내가 말했다. "이름을 되찾았소."
늙은이의 눈이 붉어졌다. 그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모자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오래, 아주 오래.
"영감님." 내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울지 마시오. 아직 배를 안 띄웠소."
"압니다." 그가 젖은 목소리로 웃었다. "아는데, 이 늙은 눈이 말을 안 듣습니다."
라 소르다가 트리아나 다리 위에서 나를 기다렸다.
뒷골목의 정보상은 언제나처럼 그늘에 서 있었다. 세상의 모든 소문이 그녀의 귀를 지나갔다. 그런 그녀가, 오늘은 그늘 밖으로 한 발 나와 있었다.
"살라사르는." 그녀가 말했다. "카디스 앞바다에서 건졌다더군. 산 채로. 재판정에 세울 만큼은 성했어."
재의 손. 배를 사고로 위장해 침몰시키던 칼. 유령 여울에서 아버지의 함대를 어둠 속으로 밀어 넣은 손. 나는 그가 물속으로 사라지던 마지막 순간을 기억한다. 이제 그는 밧줄에 묶여 세비야로 돌아온다.
"벨라스코는." 내가 물었다.
라 소르다가 잠시 침묵했다.
"자기 손으로." 그녀가 말했다. "감옥에서. 어젯밤에."
나는 강물을 보았다. 검게 흐르는 과달키비르. 저 물은 산루카르를 지나 대양으로 흘러간다. 스승이 나를 데리고 처음 별을 읽던 그 대양으로.
돈 암브로시오 벨라스코. 그가 모든 걸 가르쳤다. 별을, 해류를, 바람의 결을. 침로를 잡는 법과, 사람을 읽는 법을. 그리고 마지막에는—함대 하나를 죽음으로 보내는 법까지.
"그가 뭐라도 남겼소?" 내가 물었다.
라 소르다가 품에서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낡은 양피지였다. 나는 그것을 펼쳤다.
해도였다. 스승의 손으로 그린. 서쪽 대양, 어떤 공식 파드론에도 없던 해안선. 이네스가 그린 것과 같은 땅. 다만 이건 훨씬 오래된 것이었다. 잉크가 바래 있었다. 20년은 묵은 것.
그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 땅이 실재함을. 그는 그것을 지웠고, 감췄고, 그것을 다시 그리려던 함대를 죽였다. 그리고 20년 동안, 자기 서랍 속에 이 한 장을 간직했다.
여백에, 떨리는 글씨 한 줄이 적혀 있었다.
'너는 내가 못 한 것을 했다.'
나는 그 종이를 오래 쥐고 있었다. 미움과 슬픔이 같은 강물처럼 뒤섞여 흘렀다. 스승이여. 당신은 세계를 감추려 해도를 그렸고, 나는 사람이 돌아오라고 해도를 그렸다. 우리는 같은 손을 배웠으나, 다른 바다를 향했다.
"태우지 않겠소." 내가 조용히 말했다. "이것도 남기겠소."
이네스는 조선소에 있었다.
산타 페. 그녀 아버지의 카라벨. 압류되고 버려졌다가, 우리 손으로 되살아난 배. 폭풍을 지나고, 해전을 지나고, 검은 수평선을 넘어 지워진 땅에 닿았다가 돌아온 배. 이제 그 배는 새 돛을 달고 있었다.
이네스가 뱃전에 기대 해도를 그리고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그렇게,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도해방에 아비를 잃고 몰락한 제도사.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눈과, 가장 정직한 손을 가진 여자.
나는 그녀 곁에 섰다. 그녀가 그리는 것을 보았다.
지워진 해안이었다. 우리가 밟은 그 땅. 다만 그녀는 이번엔 여백을 두고 있었다. 해안선 너머, 아직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흰 바다를.
"거긴 뭐요?" 내가 물었다.
"몰라요." 그녀가 붓을 멈추지 않고 말했다. "아직 아무도 안 가봤으니까."
나는 웃었다. 처음으로, 3년 만에, 마음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웃음이었다.
"그럼 그려야겠군." 내가 말했다.
이네스가 붓을 멈췄다. 그녀가 나를 보았다. 그 날카로운 눈 안에, 오늘은 다른 것이 있었다. 두려움도 복수도 아닌 것. 앞을 보는 눈.
"파드론에 올랐어요." 그녀가 말했다. "아버지가 지키려던 해안이. 오늘부로 공식 해도예요. 누구든—그리로 갈 수 있어요. 돌아올 수 있어요."
"당신 아버지가 옳았소."
"알아요." 그녀의 목소리가 잠깐 떨렸다. 그리고 다시 단단해졌다. "그래서 이제, 다음을 그릴 거예요."
그날 밤, 산타 페의 갑판에 사람들이 모였다.
블라스가 술통을 열었다. 견습 소년이—이제 소년이라기엔 훌쩍 자란 그가—등불을 걸었다. 모랄레스가 왔다. 유령 여울의 또 다른 생존자. 죽은 줄 알았던 사람. 살아서 증언대에 섰던 사람. 그가 내 잔에 술을 부었다.
"부도선사님." 그가 말했다.
"이젠 아니오." 내가 말했다. "부(副)는 뗐소."
사람들이 웃었다. 강물이 뱃전을 두드렸다. 세비야의 불빛이 물 위에 길게 부서졌다.
나는 잔을 들지 않고, 뱃머리로 걸어갔다. 어둠 속, 강 하구 쪽을 보았다. 저기 어딘가, 산루카르를 지나면 대양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대양 끝에, 우리가 그린 해안이 있다. 그 너머엔—아무도 모르는 바다가.
3년 전 나는 죽은 자를 쫓아 돌아왔다. 잃어버린 이름과, 침몰한 함대와, 배신한 스승을 쫓았다. 그 모든 것을 이제 이 강물에 흘려보낸다. 미움도, 유령도, 검은 수평선의 두려움도.
죽은 자는 뭍에 묻었다. 이제 나는 산 바다를 향한다.
이네스가 내 곁에 왔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함께 어둠 속 하구를 보았다. 검은 물과 검은 하늘이 만나는 자리를.
"두렵소?" 내가 물었다.
"아니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요?"
나는 대답 대신 위를 보았다. 별이 나와 있었다. 스승이 처음 읽는 법을 가르쳐 준 별. 그러나 오늘 밤 그 별은, 감추라 하지 않았다. 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블라스!" 내가 소리쳤다. "닻을."
늙은 갑판장이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오래 기다린 명령이었다.
"닻을 올려라!"
새벽이었다.
동이 트기 전, 가장 검은 시각. 산타 페가 과달키비르를 미끄러져 내려갔다. 세비야의 등불이 하나씩 뒤로 물러났다. 통상원의 탑이, 트리아나의 다리가, 내가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그 도시가—뒤로, 뒤로 멀어졌다.
산루카르를 지났다. 강이 끝나고, 바다가 열렸다.
이네스가 키를 잡은 내 곁에 섰다. 그녀의 손에 해도가 들려 있었다. 여백이 있는 해도. 아직 그려지지 않은 바다.
"침로는요?" 그녀가 물었다.
나는 앞을 보았다.
수평선이 있었다. 검은 수평선. 한때 그들이 세계의 끝이라 부르던 것. 한때 나를 삼켰던 두려움. 그러나 이제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그것은 문이었다. 누군가 돌아오라고, 누군가 처음 가보라고, 그 너머에 그려질 것을 기다리는 문.
동쪽 하늘 끝이 잿빛으로, 이윽고 젖은 장밋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첫 빛이 바다에 떨어졌다. 검던 물이 은빛으로 일어섰다.
"서쪽으로." 내가 말했다. "해가 지지 않는 바다까지."
돛이 바람을 물었다. 산타 페가 뱃머리를 들었다. 배 아래에서 대양이 깊게 숨을 쉬었다.
그리고 새벽, 산타 페가 검은 수평선을 넘어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