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물결이 아침 안개를 밀어냈다. 전쟁이 끝난 바다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위트레흐트에서 왕들이 서명을 마친 지 사 년. 대포 소리가 멎은 대서양에는 이제 갈 곳 잃은 자들이 떠돌았다. 왕의 이름으로 적선을 뜯던 사략선원들은 하루아침에 면허를 잃었다. 손에 익은 것은 밧줄과 화약뿐. 배는 있는데 나포할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나소로 갔다.
바하마의 그 항구에는 총독의 깃발이 내려간 지 오래였다. 대신 검은 천이 돛대마다 나부꼈다. 해골도, 뼈도, 모래시계도 저마다 다른 문양. 그러나 색은 하나, 검정이었다. 럼주 냄새와 타르 냄새, 소금에 절은 땀 냄새가 부두를 덮었다.
"공화국이라." 한 늙은 선원이 침을 뱉었다. "왕도 없고 법도 없는 공화국."
그리고 요즘, 항구마다 새로운 종이가 나돌았다.
계약서였다. 항로 매입, 채무 양도, 독점 운송. 문장 하나가 붉은 밀랍으로 찍혀 있었다—물고기를 발톱으로 움켜쥔 물수리. 아는 자는 드물었고, 알아도 입을 다물었다. 그저 그 문장이 찍힌 종이가 오면 멀쩡하던 상회가 반년 안에 문을 닫는다고들 했다. 누구는 그것을 '물수리'라 불렀고, 누구는 그저 '그 회사'라 불렀다.
같은 봄, 같은 새벽. 세 척의 배가 세 항구에서 닻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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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트의 부두에는 안개가 강물처럼 깔렸다.
엘렌 뒤부아는 장부를 덮었다. 손끝이 잉크로 검었다. 밤새 숫자를 맞췄지만, 맞을 리 없는 숫자였다. 아버지의 상회를 무너뜨린 그 채권—어디에도 없던 빚이 하루아침에 생겨났다. 위조였다. 그녀는 알았다. 증명할 방법이 없을 뿐.
"아가씨." 늙은 항해장 마튜랭이 조타실 문을 두드렸다. "물때가 됐습니다."
스쿠너 이롱델. 제비라는 이름의 날렵한 배. 그녀에게 남은 전부였다.
"올려요." 엘렌이 말했다. 목소리에 떨림은 없었다. "닻을 올려요, 마튜랭."
돛이 안개를 갈랐다. 그녀는 뱃머리에서 로루아르 강을 내려다보았다. 어딘가에 그 문장을 찍은 손이 있다. 장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숫자를 따라가면, 언젠가 그 손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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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트로열의 새벽은 화약 냄새로 시작됐다.
대니얼 하트는 슬루프 페레그린의 갑판에서 권총을 손질했다. 면허는 두 달 전 만료됐다. 이제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해적 사냥꾼도, 왕의 사람도 아닌.
"선장." 포술장 조라 케인이 화약통을 등에 지고 올라왔다. "정말 놈을 쫓을 거요? 면허도 없이?"
대니얼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안의 쇠붙이를 마저 닦았다.
코맥 로치. '검은 이빨'. 옛 부하였고, 반란을 일으켜 배를 빼앗은 자. 선원 열둘을 노예상에게 팔아넘긴 자. 그중 몇은 대니얼이 이름을 부르던 사람이었다.
"면허 없이도 방아쇠는 당겨져." 대니얼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닻 올려."
슬루프가 미끄러지듯 항구를 빠져나갔다. 카리브의 물빛이 칼날처럼 번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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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미르의 항구에서는 향신료 냄새가 났다.
에민 카라는 브리간틴 세헤르—'새벽'—의 난간에 기대 수평선을 재고 있었다. 팔분의가 아침 해를 물었다. 그는 숫자를 적고, 그 아래 작은 새 한 마리를 스케치했다.
"에민 씨." 조수 니코가 표본 상자를 안고 다가왔다. "정말 대서양까지 가는 겁니까? 그 먼 데를."
"아카데미가 세 권을 원하니까." 에민이 웃었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십 년 전, 표본선 잔단호가 사라졌다. 스승 하산 선장과 함께. 대서양 어딘가에서. 아무도 이유를 몰랐다.
에민은 스케치를 접었다. 지식은 재산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재산을 감추기 위해 사람을 지운다.
"닻을 올리게, 니코." 그가 말했다. "새벽이 우리를 기다리진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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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척의 배가 세 바다를 갈랐다. 낭트의 안개, 포트로열의 화약, 이즈미르의 향신료.
엘렌은 장부를 들었고, 대니얼은 총을 들었고, 에민은 붓을 들었다. 셋은 서로의 이름조차 몰랐다. 서로의 얼굴도, 서로의 배도.
그러나 바다는 넓어도, 항로는 좁다.
같은 문장이 세 사람의 항로 위에 이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물고기를 움켜쥔 발톱. 붉은 밀랍. 세 갈래의 물길은 지금은 멀찍이 벌어져 있으나, 해류가 그렇듯, 언젠가 한 점에서 만나게 되어 있었다.
검은 수평선 너머, 물수리가 날개를 접고 기다렸다.
그리고 낭트에서, 엘렌이 아직 알지 못한 채—그녀가 없는 사이, 이롱델의 선창에는 이미 압류의 봉인이 찍히고 있었다.
낭트의 밤은 언제나 강 냄새로 시작된다. 진창과 소금, 젖은 밧줄, 그리고 상류에서 실려 온 나뭇잎 썩는 냄새. 엘렌 뒤부아는 그 냄새를 스물여섯 해 동안 맡아 왔다. 오늘 밤에는 거기에 하나가 더 섞였다. 밀랍과 낯선 사내들의 담배 냄새. 채권자들이 남기고 간 냄새였다.
그들은 해 질 무렵에 왔다가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고서야 돌아갔다. 검은 외투를 입은 대리인 셋, 서기 하나. 그리고 시청의 관리 하나. 관리는 손이 떨리는 척도 하지 않고 문설주에 종이 한 장을 붙였다.
압류(押留).
붉은 밀랍 도장이 촛불 아래에서 굳은 피처럼 번들거렸다. 엘렌은 문 안쪽에 서서 그것을 바라보았다. 소리 지르지 않았다. 울지 않았다. 그저 그 종이의 네 귀퉁이가 얼마나 반듯하게 붙었는지를 헤아렸다. 셈하는 것은 그녀가 아는 유일한 기도였다.
"엘렌 아가씨." 마튜랭이 등 뒤에서 낮게 불렀다. 늙은 항해장은 모자를 벗어 가슴에 대고 있었다. 상갓집에서처럼. "불을 끄고 좀 쉬시지요. 오늘은—"
"장부를 봐야겠어요, 마튜랭."
그녀는 이미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아버지의 서재는 냉기로 가득했다. 벽난로는 사흘째 죽어 있었고, 창밖으로는 루아르강에 정박한 배들의 등불이 점점이 흔들렸다. 그중 하나가 이롱델이었다. 뒤부아 상회에 남은 마지막 배. 낡은 스쿠너 한 척.
엘렌은 대장(大帳)을 펼쳤다. 아버지의 글씨가 거기 있었다. 반듯하고 꼼꼼한, 평생 남을 속인 적 없는 손의 글씨. 그녀는 그 손을 안다. 숫자 7의 가로획을 유난히 길게 긋던 버릇까지.
몰락은 석 달 만에 왔다.
봄까지만 해도 뒤부아 상회는 보르도 포도주와 브르타뉴 소금을 실어 나르는 견실한 중소 상회였다. 그런데 여름이 오기 전, 갑자기 세 장의 채권이 나타났다. 아버지가 진 적 없다고 맹세한 빚. 그러나 서명은 아버지의 것이었고, 인장도 아버지의 것이었다. 재판정은 서류를 믿었다. 아버지는 서류를 이기지 못하고, 심장을 이기지 못하고, 유월의 어느 밤 책상에 엎드린 채로 갔다.
엘렌은 그 세 장의 채권 사본을 다시 꺼냈다.
촛불을 바짝 당겼다. 손가락으로 종이를 쓸었다. 처음엔 서명을 봤다. 그다음엔 인장을. 백 번은 본 것들이었다. 위조라 확신했지만 증명할 길이 없던 것들.
그러다 잉크를 봤다.
세 장의 채권. 서로 다른 날짜, 서로 다른 액수, 서로 다른 채권자. 낭트, 라로셸, 보르도. 아귀가 맞지 않는 세 곳. 그런데—
엘렌의 숨이 멎었다.
세 장 모두, 날짜의 숫자 '1' 아래에 똑같은 잉크 번짐이 있었다. 펜촉이 종이에 잠깐 머물렀을 때 생기는, 아주 작은 눈물방울 모양의 얼룩. 왼쪽으로 살짝 기운 꼬리. 세 장이 똑같았다. 자로 잰 듯이.
같은 펜. 같은 잉크. 같은 손.
그리고 같은 날. 서로 다른 세 도시에서, 서로 다른 세 날짜에 쓰였다는 채권이, 실은 한자리에서 한 번에 쓰였다는 뜻이었다.
엘렌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 심장이 뛰는데 손끝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이상하게도 슬픔은 오지 않았다. 대신 아주 맑고 단단한 무엇이 명치에서부터 차올랐다.
아버지는 실패한 게 아니었다.
누군가 실패시킨 것이었다.
"마튜랭." 그녀는 문가에 여태 서 있던 노인을 불렀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이걸 봐요."
마튜랭이 다가와 촛불에 종이를 비췄다. 그는 오래 바닷바람을 읽어 온 눈으로, 이제 잉크를 읽었다. 한참 뒤, 그가 천천히 모자를 다시 썼다.
"…뒤부아 상회는 망한 게 아닙니다, 아가씨." 그의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망하게 만든 자가 있는 겁니다."
엘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창밖의 이롱델을 보았다. 돛도 없이, 등불 하나로 어둠 속에 떠 있는 낡은 배.
"우리에게 남은 게 뭐죠?"
"배 한 척입니다. 이롱델. 선원은 저까지 넷. 창고는 비었고, 현금은—" 노인이 말끝을 흐렸다.
"됐어요." 엘렌은 채권 사본을 접어 품에 넣었다. 증거였다. 언젠가 갚아 줄 빚 문서였다. "칼로 되찾을 순 없어요, 마튜랭. 나는 칼을 못 써요. 총도. 나는 셈을 하죠."
그녀는 대장을 덮었다. 먼지가 촛불 속에서 잠시 반짝였다.
"장사로 무너진 상회는, 장사로 되찾아요. 한 푼씩. 저들이 우리를 무너뜨린 그 길목에서, 정확히 그 방식으로."
마튜랭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죽은 주인의 얼굴이 딸에게서 언뜻 비쳤다. 그러나 눈만은 달랐다. 아버지의 눈은 정직했고, 딸의 눈은 정직하면서도 사냥꾼 같았다.
"어디서부터 시작하시렵니까."
엘렌은 창밖의 강을 보았다. 새벽이 아직 멀었지만, 밀물은 이미 돌아서고 있었다. 강물이 바다로 향하는 시각.
"베르나르 영감에게 갈 거예요. 보르도 포도주. 나소로 가는 배는 늘 값을 후하게 쳐 주죠." 그녀는 등불을 껐다. "날이 밝는 대로 이롱델에 짐을 실어요."
첫 화물이었다.
낭트를 벗어난 지 사흘. '이롱델'은 비스케이 만의 잿빛 물살을 남쪽으로 갈랐다.
엘렌은 갑판 난간에 장부를 펼쳐 놓고 손가락 끝으로 숫자를 짚어 내려갔다. 바람에 종이가 파닥거렸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 압류의 딱지가 붙은 문을 등지고 떠나온 배에, 지금 실린 것은 포도주 여덟 통이 전부였다.
여덟 통. 그것이 몰락한 뒤에 남은 뒤부아 상회의 전 재산이었다.
"바람이 좋습니다, 아가씨." 마튜랭이 키를 붙든 채 말했다. 늙은 항해장의 목소리는 삭구가 삐걱대는 소리와 잘 어울렸다. "이 속도면 코루냐까지 이틀."
"코루냐가 아니에요." 엘렌은 장부를 덮었다. "라로셸이요."
마튜랭의 흰 눈썹이 꿈틀했다. "라로셸은 세관이 깐깐하지요. 위그노를 쫓아낸 뒤로 항구 관리들이 이방인 냄새에 예민해졌습니다."
"바로 그래서예요." 엘렌은 옅게 웃었다. "깐깐한 항구일수록, 서류가 깨끗한 상인을 반기죠. 값을 제대로 쳐주는 곳도 거기고요."
바람에 실려 온 냄새가 코를 스쳤다. 소금, 젖은 밧줄, 그리고 통널 틈으로 배어 나오는 포도주의 시큼달큼한 숨결. 아버지라면 이 냄새만으로도 통 안의 것이 좋은 해인지 아닌지 짚어 냈으리라.
라로셸의 부두에 배를 댄 것은 다음 날 저녁이었다.
세관 사무소는 촛농 냄새와 잉크 냄새로 텁텁했다. 배불뚝이 관리가 안경 너머로 그녀를 훑었다.
"여자가 화주(貨主)라." 그가 코웃음을 쳤다. "선적 증서는?"
엘렌은 말없이 서류를 내밀었다. 원산지 증명, 통마다의 용량, 낭트 출항 기록. 관리의 손가락이 종이 위를 더듬다가 멈칫했다. 흠잡을 데가 없었다.
"세(稅)는……"
"통당 정량 기준으로 이미 계산해 왔어요." 엘렌이 먼저 숫자를 짚었다. "여기, 여기. 관리님이 다시 재실 필요도 없게요."
관리의 눈이 잠깐 커졌다. 그가 손수 재어 보았다. 숫자는 그녀가 적은 것과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았다. 코웃음이 사라졌다.
"……도장을 찍지." 그가 중얼거렸다.
밖으로 나오자 마튜랭이 나직이 물었다. "저 늙은 여우가 왜 순순히 굽혔는지 아십니까?"
"제가 자기를 속이지 않으리란 걸 알았으니까요." 엘렌이 답했다. "한 번 정확하면, 다음부터 저를 다시 재지 않아요. 그게 시간을 아끼는 거고, 시간은 그들에게 돈이죠."
포도주를 사러 온 중개상은 여우보다 더한 늑대였다.
"여덟 통? 요즘 라로셸에 포도주가 넘쳐. 통당 스무 리브르."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스무 리브르요." 엘렌은 놀란 기색도 없이 되받았다. "낭트 부두 시세가 통당 서른둘인 건 저도 아는데요. 여기까지 실어 온 운임과 세를 얹으면 서른여섯. 스무 리브르면 제가 바다에 통을 던지는 편이 낫겠네요."
"바다에 던지시든가." 늑대가 이를 드러냈다.
"그럼 마튜랭." 엘렌이 몸을 돌렸다. "짐을 다시 실어요. 부르고뉴 상관(商館)에서는 통당 서른에 받겠다고 했으니—"
"잠깐." 늑대의 손이 허공을 붙들었다. 부르고뉴 상관 이야기는 절반만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이 흔들리는 것을 엘렌은 놓치지 않았다. "……스물여덟."
"서른둘."
"서른."
"서른하나. 그리고 다음에도 제 물건을 먼저 보여 드리죠." 엘렌이 손을 내밀었다. "이번 한 통이 아니라, 다음 열 통을 사시는 겁니다."
늑대가 잠시 그녀의 손을 노려보았다. 그러다 마주 잡았다. 굳은살 박인 손아귀였다.
"……당신, 뒤부아 영감 딸이지." 그가 투덜거렸다. "그 양반도 딱 이런 식으로 사람 진을 뺐어."
여덟 통, 통당 서른하나. 이백사십팔 리브르.
운임과 세, 마튜랭의 품삯을 제하고 나면 손에 남는 이문은 얼마 되지 않았다. 몰락 전이었다면 뒤부아 상회의 하루 장부에도 오르지 못했을 푼돈이었다.
그런데도, 그 숫자를 장부에 적어 넣는 손끝이 따뜻했다.
선실로 돌아와 엘렌은 촛불을 밝히고 새 장부의 첫 줄을 그었다. '이문(利文)'. 그 두 글자 위에서 펜이 잠시 멎었다.
아버지는 늘 말했다. 상인의 진짜 자본은 금고 속 은화가 아니라, 사람들이 네 이름을 부를 때의 목소리라고. 오늘 세관의 여우도, 부두의 늑대도, 결국 '뒤부아'라는 이름 하나를 믿고 도장을 찍고 손을 잡았다.
신용이 곧 자본이다.
아버지는 그 자본을 쌓는 데 평생을 썼고, 위조된 채권 한 장에 그것을 통째로 잃었다. 엘렌은 촛불을 응시했다. 아버지는 사람을 믿어 무너졌다. 나는, 사람을 믿되 숫자로 지킬 것이다. 정확한 장부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작은 승리였다. 이백사십팔 리브르의 온기가 손가락 끝에 오래 머물렀다.
마튜랭이 선실 문에 기대어 물었다. "다음 항로는요, 아가씨?"
엘렌은 장부를 넘겼다. 아버지가 남긴 거래처 명부. 몰락과 함께 대부분이 등을 돌렸지만, 딱 한 이름에 그녀의 손가락이 멈췄다. 낡은 잉크로 적힌, 오래된 신용의 흔적.
"보르도예요."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포도주의 본향. 그리고 아버지의 옛 거래처가 있는 곳."
촛불이 흔들렸다. 그 이름 곁에, 아버지의 손글씨로 적힌 한 줄이 눈에 들어왔다. '이 사람만은, 끝까지 믿어라.'
베르나르 영감. 엘렌은 그 이름을 나직이 되뇌었다.
선창의 냄새가 먼저 그녀를 맞았다.
떡갈나무 통에서 배어 나온 술 냄새, 축축한 흙바닥, 그리고 가론강의 진흙이 뒤섞인 냄새. 엘렌은 그 냄새를 눈을 감고도 알았다. 어릴 적, 아버지의 손을 잡고 이 창고를 드나들던 시절의 냄새였으니까.
"이롱델을 여기 대다니." 베르나르 영감이 통 사이에서 걸어 나왔다. 등이 예전보다 굽었고, 손등의 검버섯이 늘었다. "낭트 뒤부아네 딸이 보르도까지 술을 사러 오다니, 세상이 뒤집혔구나."
"살 형편은 못 됩니다, 영감님." 엘렌은 솔직하게 말했다. "다만 팔 술이 필요할 뿐이에요. 나소로 가는 배엔 포도주가 금값이니까."
노인은 껄껄 웃었다. 웃음 끝이 기침으로 흩어졌다.
마튜랭이 등 뒤에서 통 하나를 손등으로 두드려 보았다. 늙은 항해장의 귀는 술통의 빈 곳과 찬 곳을 소리로 가려냈다. 그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건은 좋다는 뜻이었다.
"클라레 스무 통." 베르나르가 손가락을 꼽았다. "원래대로면 통당 마흔 리브르는 받아야지."
엘렌은 장부를 폈다. 숫자가 이미 그녀 머릿속에서 줄을 섰다. 마흔이면 이문이 얇다. 나소까지의 뱃삯, 통의 손실분, 항구세를 빼면 남는 게 없었다.
"서른둘." 그녀가 말했다.
"서른여덟."
"서른셋. 대신 다음 항차에도 영감님 걸 싣습니다. 계약서에 넣지요."
노인은 그녀를 물끄러미 보았다. 오래도록. 그 눈빛에는 셈이 아니라 다른 것이 담겨 있었다.
"서른." 마침내 그가 말했다.
엘렌은 펜을 멈췄다. 자신이 부른 값보다 낮았다.
"영감님—"
"네 아비가 이 창고에서 처음 클라레를 실었을 때가 네 나이였다." 베르나르는 통 위에 손을 얹었다. "그때도 값을 깎겠다고 덤볐지. 너처럼 눈을 똑바로 뜨고."
엘렌은 목이 메었다. 펜 끝이 종이 위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물어보자, 얘야." 노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통과 통 사이의 그늘로 잦아들 듯이. "네 아비가… 정말 그 빚을 졌느냐."
창고가 조용해졌다. 멀리서 강물이 부두 말뚝을 핥는 소리만 들렸다.
"아니요." 엘렌의 대답은 짧고 단단했다. "아버지는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적이 없어요. 평생 계산이 틀린 적 없는 분이에요. 그런데 어느 날, 본 적도 없는 채권 세 장이 나타났죠. 서명은 아버지 것이었어요. 필체까지 똑같았어요. 하지만 그 잉크에 밴 셈은… 아버지 것이 아니었어요."
"위조로군."
"증명할 방법이 없었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선."
베르나르는 한참 술통을 쓰다듬었다. 손끝이 나뭇결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그럴 줄 알았다." 그가 중얼거렸다. "네 아비만이 아니야."
엘렌이 고개를 들었다.
"이 늙은이가 술만 팔며 사는 것 같으냐. 부두엔 소문이 강물처럼 흐른단다." 노인은 주위를 한 번 살폈다. 아무도 없는데도. 그 조심스러움이 오히려 서늘했다. "요 몇 해, 낭트의 채권이란 채권은 죄다 한 군데로 흘러간다. 몰락한 상회, 저당 잡힌 배, 파산한 중개상… 그 종이들이 전부 한 손아귀로 모인다는 거야."
"어디로요."
베르나르는 대답 대신 엘렌의 장부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굳은살 박인 손가락으로, 빈 여백에 무언가를 천천히 그렸다.
날개를 펼친 새 한 마리. 아래로 뻗은 발톱. 그 발톱이 움켜쥔 것은—물고기였다.
"물수리다." 노인이 말했다. "물고기를 놓치지 않는 새지. 요즘 그 문장을 단 자들이 낭트를, 아니 항로를 통째로 사들이고 있어. 채권으로, 사고로, 소문으로." 그가 목소리를 더 낮췄다. "이 문장을 보거든, 얘야. 값을 흥정하지 마라. 도망쳐라."
엘렌은 그 서툰 그림을 내려다보았다.
발톱에 걸린 물고기. 그것이 아버지 같기도, 자신 같기도 했다.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서늘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름 모를 적의 윤곽이, 처음으로 형태를 갖추는 순간이었다. 그토록 오래 얼굴 없이 그녀를 무너뜨린 손. 그 손에 이제 문장이 있었다.
물수리.
엘렌은 장부를 덮지 않았다. 대신 그 그림 옆에, 자신의 단정한 필체로 한 단어를 적어 넣었다. 언젠가 반드시 셈을 마쳐야 할 항목처럼.
"영감님." 그녀는 펜을 놓았다. "서른셋으로 하겠습니다. 깎은 값은 받지 않아요. 그 세 리브르는… 이 이야기 값입니다."
베르나르는 오래 그녀를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창고를 나서는 길, 강바람이 그녀의 뺨을 스쳤다. 마튜랭이 곁에서 낮게 물었다. "무슨 이야길 들으신 겁니까, 아가씨."
엘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손안의 장부만 꼭 쥐었다. 그 안엔 이제 숫자가 아닌 것이 하나 적혀 있었다.
부두 끝, 정박한 어느 상선의 뱃머리에서 무언가가 햇빛을 받아 붉게 번득였다. 봉랍이었다. 밀랍으로 눌러 찍은 인장. 엘렌의 걸음이 저도 모르게 멈췄다.
그 붉은 밀랍 위에도—날개를 펼친 새 한 마리가, 발톱으로 물고기를 움켜쥐고 있었다.
검은 물이었다. 초 하나만 켜 둔 서재에서, 엘렌 뒤부아는 촛불이 유리창에 만든 제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
베르나르 영감이 두고 간 채권이 책상 위에 있었다.
낡은 양피지. 뒤부아 상회를 무너뜨린 위조 채권 중 하나. 영감은 이걸 어디서 손에 넣었는지 끝내 말하지 않았다. 다만 헤어지며 낮게 덧붙였을 뿐이다. "봉랍을 봐, 아가씨. 글자 말고 밀랍을 봐."
밀랍.
엘렌은 채권 아래쪽에 눌린 붉은 봉랍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겉면은 매끈했다. 문장 하나 없이, 뭉개진 채로. 위조범이 인장을 지운 것이다. 흔한 수법이었다. 하지만 영감은 글자가 아니라 밀랍을 보라고 했다.
그녀는 촛대를 끌어당겼다.
봉랍을 불꽃 곁으로. 아주 가까이. 밀랍이 열을 먹으면 안 된다—녹으면 증거도 녹는다. 딱 데워지기 직전, 표면이 반들거리기 시작하는 그 찰나에, 엘렌은 채권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빛이 밀랍을 스쳤다.
그리고 거기, 뭉개진 표면 아래로 그림자가 떠올랐다. 눌렀다가 지운 자리. 인장은 지워졌으나 밀랍 깊은 곳에 남은 음각의 흔적. 각도를 조금 더. 숨을 멈추고.
발톱이었다.
움켜쥔 발톱. 그 아래 파닥이는 물고기 한 마리. 날개를 접고 내리꽂는 새.
물수리.
엘렌의 손끝이 아주 잠깐 떨렸다. 그뿐이었다. 그녀는 떨림을 삼키고, 그 문장을 눈에 새겼다. 카디스의 알바로가 언젠가 흘리듯 말한 이름이 목구멍으로 올라왔다.
오스프리 상사.
물수리를 쓰는 해운 카르텔. 항로를 사들이고, 채권을 위조하고, 걸리적거리는 상회를 조용히 침몰시킨다는—뜬소문인 줄 알았던 이름. 그 물수리가 지금, 아버지의 채권 밑바닥에 발톱을 박고 있었다.
"왜 우리였지."
소리 내어 물었다. 서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뒤부아 상회는 작았다. 스쿠너 한 척, '이롱델'. 낭트와 카리브를 잇는 가느다란 항로 하나. 그게 전부였다. 이런 카르텔이 왜 이런 작은 상회를 무너뜨리는 데 위조와 뇌물을 쏟아붓나. 벼룩을 잡자고 대포를 쏘는 격이었다.
엘렌은 서가로 갔다. 아버지의 해도를 꺼냈다.
낭트에서 서쪽으로. 비스케이를 지나, 마데이라를 스치고, 무역풍을 타고 카리브로. 아버지가 삼십 년 동안 손으로 고쳐 그린 항로. 여백에 깨알 같은 글씨—어느 여울에 암초가 있고, 어느 계절에 바람이 죽는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발로 그린 지도.
그녀는 그 선을 손가락으로 짚어 나갔다.
그리고 멈췄다.
카리브의 어느 지점. 아버지의 항로가 지나는 좁은 해협. 큰 상선이 돌아가기엔 며칠을 손해 보고, 질러가기엔 해도가 없어 겁내는 길목. 뒤부아의 작은 스쿠너만이 아무렇지 않게 통과하던 곳.
길목.
엘렌은 눈을 감았다. 장부를 다루는 머리가 차갑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오스프리는 항로를 사들인다. 사들인다는 건 독점한다는 것. 독점하려면 남의 길을 막아야 한다. 정확한 해도가 퍼지지 않게 지식을 사재기하고, 그 길을 아는 자를 지워야 한다.
우리는 작아서 무너진 게 아니다.
우리가 그 길을 알아서 무너진 거다.
아버지의 항로는 놈들의 지도 위에 그어진 방해선이었다. 지워야 할 선. 그래서 채권을 위조했고, 상회를 파산시켰고, '이롱델'을 항구에 묶었다. 아버지는 그 이유도 모른 채 명예를 잃고 죽었다.
분노가 명치에서 치밀었다. 뜨겁고, 붉고, 눈물이 될 뻔한 것.
엘렌은 그것을 삼켰다.
울음은 아무것도 되돌리지 못한다. 그녀가 가진 건 총도 배도 아니었다. 셈이었다. 장부였다. 그리고 지금, 방금 알아낸 하나의 사실. 놈들이 왜 우리를 죽였는가—그것을 알면, 놈들을 죽이는 법도 안다.
되찾는 법은 하나였다.
간단했다. 무섭도록 간단했다.
그 항로를, 내가 다시 연다.
놈들이 지우려 한 선을 다시 긋는다. 아버지의 해도를 세상에 되살린다. 그 길목을 다시 우리 배가 지난다. 오스프리가 항로를 사들여 만든 독점은, 그 길을 아는 배 한 척이 다시 다니는 순간부터 금이 가기 시작한다. 벽에 난 틈 하나. 그거면 된다.
엘렌은 촛불 아래에서 새 장부를 폈다.
첫 줄에 적었다. 오스프리 상사. A.G. 물수리.
두 번째 줄. 채권—위조—낭트 지점 경유 추정.
세 번째 줄에서 잠깐 펜을 멈췄다가, 눌러썼다. 사일러스 핀치. 나소. 놈들의 장부를 통째로 외운 남자.
핀치를 찾아야 한다. 그러려면 대서양을 건너야 한다. 그러려면 '이롱델'을 다시 띄워야 한다. 마튜랭이 필요하다. 선원이 필요하다. 돈이 필요하다. 항로를 열려면 항로 위에 있어야 한다.
계획이 장부의 세로줄처럼 반듯하게 정렬됐다. 칸마다 숫자가 들어차듯, 해야 할 일이 순서대로 놓였다. 분노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벼려졌다. 뜨거운 쇠가 찬물에 담겨 날이 서듯이.
그녀는 창을 열었다.
밤바다 냄새가 밀려들었다. 소금과 타르, 젖은 밧줄과 먼 항구의 냄새. 부두 어딘가에서 '이롱델'의 삭구가 바람에 낮게 울었다. 오래 묶여 있던 배가 내는, 떠나고 싶어 하는 소리.
엘렌은 항구 너머 검은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그 선 어딘가에, 아버지가 손으로 그린 길목이 있었다. 놈들이 지운 선이 있었다.
촛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 그녀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정했다.
뱃머리를 서쪽으로.
바다는 매일 같은 얼굴로 다르게 굴었다.
낭트를 떠난 지 열여드레. 엘렌은 이제 갑판의 경사만으로도 이롱델이 어느 쪽으로 기울었는지 알았다. 발바닥이 먼저 알고, 그다음에 눈이 확인했다. 육지에서 쓰던 감각이 아니었다. 배가 가르쳐 준 새 감각이었다.
"물, 오늘도 반 국자씩입니다."
마튜랭이 통 옆에서 국자를 들었다. 늙은 항해장의 손은 흔들리는 갑판 위에서도 한 방울을 흘리지 않았다. 선원 아홉이 줄을 섰다. 엘렌은 맨 뒤였다.
"항해장, 나부터 줄여요. 후계자가 앞에 서면 배급이 배급이 아니지."
마튜랭이 눈썹을 들었다. 그러나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맨 끝에 두었다. 그게 이 배의 규칙이 되었다.
장부의 여인이었다. 엘렌은 셈으로 세상을 읽어 온 사람이었다. 배 위에서도 그녀는 셈을 했다. 물통 열둘, 하루 소모량, 무풍에 갇힐 최악의 날수.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와 딱딱한 건빵, 벌레 먹은 콩. 숫자는 정직했고, 정직한 숫자는 무서웠다.
"보르도에서 실은 포도주가 이 배를 살릴지도 몰라요." 그녀가 장부를 덮으며 중얼거렸다. "물이 상하면, 저 술로 목을 축여야 하니까."
밤이 오면 별이 나왔다.
에민이라면 저 별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렀겠지. 엘렌은 이름을 몰랐다. 대신 마튜랭이 손가락으로 북쪽을 짚어 주었다.
"저 별. 저게 안 움직여요, 아가씨. 세상이 다 돌아도 저놈만 제자리요. 뱃사람은 저걸 붙잡고 갑니다."
"장부의 맨 윗줄 같은 거네요." 엘렌이 웃었다. "다 틀어져도 저 한 줄만 맞으면, 나머지는 되돌릴 수 있으니까."
마튜랭이 낮게 웃었다. 처음으로, 그가 그녀를 후계자가 아니라 뱃사람으로 보는 눈이었다.
닷새 뒤, 바람이 죽었다.
무풍대였다. 돛이 축 늘어져 헝겊 쪼가리가 되었다. 태양이 갑판을 달구고, 물통 하나가 상하기 시작했다. 시큼한 냄새. 엘렌은 그 통을 따로 표시하고, 남은 날수를 다시 셈했다. 손이 떨렸다. 숫자가 붉게 보였다.
선원 하나가 뱃전에 침을 뱉었다. "이 여자가 우릴 죽음으로 데려가는 거요."
침묵이 흘렀다. 엘렌은 그를 똑바로 보았다.
"당신 이름이 뤼카죠. 아내가 낭트에서 셋째를 배고 있고. 나는 당신을 그 아이 앞에 데려다 놓을 셈으로 이 배를 몰아요. 내 장부에 당신 목숨값이 적혀 있어요. 아직 한 줄도 안 지웠어요."
뤼카가 입을 다물었다. 그가 고개를 돌렸다. 엘렌은 그날 밤 오래 혼자 앉아 있었다. 아버지가 죽고, 상회가 무너지고, 이제 그녀 곁엔 낯선 사내 아홉과 늙은 항해장 하나뿐이었다. 외로움은 짠물처럼 목구멍에 고였다.
그러나 삼킬 수는 있었다.
바람이 돌아왔다. 그리고 이레째, 바다가 색을 잃었다.
수평선에 납빛 벽이 섰다. 마튜랭의 얼굴이 굳었다. "옵니다. 큰 놈이."
엘렌은 갑판에 섰다. 장부를 접고, 셈을 접고, 처음으로 순전한 명령의 자리에 섰다.
"윗돛 내려요! 화물 다시 묶고, 상한 물통부터 고정해! 밧줄, 몸에 감아요, 전부!"
첫 파도가 이롱델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세계가 기울었다. 바닷물이 벽처럼 쏟아졌고, 갑판이 발밑에서 사라졌다 돌아왔다. 뤼카가 미끄러졌다. 엘렌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자기 손목의 밧줄이 살을 파고들었다.
"놓지 마! 셋째가 기다린다며!"
비가 채찍이었다. 번개가 돛대를 하얗게 태웠다. 마튜랭이 키를 붙들고 소리쳤다. "파도에 정면을! 옆구리 내주면 뒤집힙니다!"
엘렌은 셈했다. 폭풍 속에서도 셈했다. 파도의 간격, 배의 복원력, 사람 하나가 버틸 수 있는 초. 그녀는 숫자가 아니라 목숨을 세고 있었다. 한 줄도 지우지 않겠다고.
밤새 이롱델은 검은 산맥을 넘었다. 넘고, 또 넘었다.
그리고 새벽.
바람이 뚝 멎었다. 비가 그쳤다. 지친 태양이 젖은 갑판 위로 기어올랐다. 아홉 명 전원. 한 명도 잃지 않았다. 물통 하나가 깨졌을 뿐. 뤼카가 갈라진 입술로 엘렌을 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엘렌은 난간을 붙잡고 서 있었다. 온몸이 소금과 물이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후계자가 아니었다. 이제 이 배의 사람이었다. 외로웠고, 그래서 단단해졌다.
마튜랭이 그녀 옆에 섰다. 말없이 수평선을 가리켰다.
폭풍이 갠 자리, 아침 안개가 걷히는 그곳에.
검은 기 두 장이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엘렌은 새벽의 회색 빛 속에서 돛대 끝을 올려다보았다.
바람이 북동에서 안정적으로 밀려왔다. 어제 지나온 폭풍의 꼬리가 아직 수평선에 걸려 있었지만, 이롱델호는 그 잔물결을 가르며 순조롭게 나아갔다. 갑판은 밤새 씻겨 소금기로 하얗게 말라 있었다.
"돛 세 개."
마튜랭의 목소리가 낮았다. 늙은 항해장은 눈을 가늘게 뜨고 우현 뒤편을 보고 있었다.
엘렌은 셈을 멈추고 망원경을 들었다. 슬루프 한 척. 외돛대 위로 삼각돛을 팽팽히 세운, 빠른 사냥배였다. 뱃머리가 이쪽을 향해 비스듬히 파고들었다.
"우리를 쫓는 건 아니에요." 엘렌이 렌즈를 조정했다. "저 배는… 다른 걸 보고 있어요."
슬루프 너머, 더 먼 수평선에 또 하나의 돛이 있었다. 그쪽은 검은 스쿠너였다. 도망치는 쪽과 쫓는 쪽. 그리고 그 사이에 하필 이롱델호가 있었다.
"장부상으로는 나쁜 자리예요." 엘렌이 중얼거렸다. 화물칸엔 보르도 포도주와 서인도 설탕, 그리고 베르나르 영감이 맡긴 편지 꾸러미. 싸움에 휘말릴 이유가 없는 짐이었다.
슬루프가 방향을 틀었다. 검은 스쿠너를 놓아주고, 이롱델호 쪽으로 뱃머리를 돌린 것이다.
"마튜랭, 흰 기를."
교전 의사가 없다는 신호. 엘렌은 도망치지 않았다. 도망치는 상선은 반드시 뒤를 잡히고, 뒤를 잡힌 상선은 값을 두 배로 치른다. 그녀는 장부를 아는 사람이었다. 셈이 맞지 않는 싸움은 시작하지 않는다.
슬루프가 사정거리 밖에서 속도를 줄였다. 갑판 위, 큰 키에 팔짱을 낀 남자가 보였다. 그 옆으로 포문이 조용히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
위협이자 예의였다. 쏠 수 있지만 쏘지 않겠다는.
"이롱델호!" 물 위로 목소리가 건너왔다. "포트로열의 대니얼 하트다. 나는 저 검은 배를 쫓는다. 지나가는 길을 막을 뜻은 없다."
엘렌은 뱃전으로 나섰다. 바람이 그녀의 외투 자락을 때렸다.
"낭트의 엘렌 뒤부아예요. 뜻은 알겠어요, 선장. 그런데 당신 배는 지쳤군요."
건너편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정확한 지적이었다. 슬루프의 삭구는 헐거웠고, 돛에는 기운 자국이 여럿이었다. 오래 쫓았고, 곧 놓칠 참이었다.
"저 스쿠너는 코맥 로치의 배죠." 엘렌이 던졌다. "검은 이빨."
남자의 팔짱이 풀렸다. 그것만으로 충분한 대답이었다.
"어떻게 아나."
"저는 배가 아니라 이름을 쫓는 사람이거든요." 엘렌은 뒤를 돌아 마튜랭에게 손짓했다. "당신에겐 빠른 배가 있고, 지친 삭구가 있어요. 제겐 여분의 삭구와 물, 그리고 로치가 어느 항구에서 짐을 부리는지에 대한 셈이 있고요."
"거래를 하자는 건가."
"호위 계약이에요." 엘렌이 또박또박 말했다. "정식으로. 당신은 이롱델호를 저 검은 배와 그 부류로부터 지켜요. 나소 앞바다까지. 대가는 은화로 치를게요. 절반은 지금, 절반은 도착해서."
바다가 두 배 사이에서 출렁였다. 신뢰라기엔 아직 얇고, 거래라기엔 이상하게 팽팽한 무엇이 그 위를 건너다녔다.
"조건이 있다." 대니얼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돈 말고."
"들을게요."
"네가 로치를 아는 방식. 그 셈. 그걸 나눠라."
엘렌은 웃을 뻔했다. 사냥꾼이 셈을 탐낸다.
두 배가 나란히 붙었다. 널판이 걸쳐지고, 대니얼 하트가 이롱델호로 건너왔다. 가까이서 본 그는 생각보다 젊었고, 눈매가 지쳐 있었다. 허리춤엔 손질 잘 된 권총 두 자루. 뒤로 포술장인 듯한 여자가 그를 따랐다. 눈이 매서웠다.
엘렌은 그를 선실로 들이지 않았다. 갑판 위, 밧줄 궤짝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섰다. 아직은 그 정도의 거리였다.
"먼저 물을게요." 엘렌이 말했다. "로치를 왜 쫓죠? 현상금 때문만은 아닌 것 같은데."
대니얼의 턱이 굳었다.
"내 배를 훔쳤다. 부하 열둘을 노예상에 팔았고." 짧고 건조한 문장이었다. "그건 증언할 수 있는 일이다. 재판정에서든, 갑판에서든."
증언. 엘렌은 그 단어를 붙잡았다.
"그럼 우린 각자 조각을 가진 셈이네요." 그녀는 품에서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펼치지는 않았다. "저한테는 위조된 채권이 있어요. 낭트의 우리 상회를 무너뜨린 서류. 아래쪽 서명은 A.G. 그리고 종이 상단엔… 물수리 한 마리가 물고기를 움켜쥔 문장이 찍혀 있죠."
대니얼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물수리." 그가 되뇌었다. "로치가 짐을 부리는 항구. 그 창고 문에도 같은 게 걸려 있었다. 발톱에 물고기를 쥔 새."
바람 소리가 잠시 멀어졌다.
"정보는 화물보다 비싸요, 선장." 엘렌이 조용히 말했다. "저는 이걸 원가로 얻지 않았어요. 상회 하나가 통째로 값이었죠. 당신 증언도 헐값은 아닐 테고요."
"그래서."
"반값에 바꿔요." 엘렌은 종이를 궤짝 위에 놓았다. "제가 아는 물수리의 절반을, 당신이 아는 물수리의 절반과. 서로 전부를 내놓진 말죠. 아직은. 대신 각자 값을 절반씩 깎는 거예요. 그게 공평해요."
대니얼은 오래 그녀를 보았다. 사냥꾼의 눈이 장부를 읽는 눈을 재고 있었다.
그가 궤짝 위에 은화 한 닢을 올렸다. 계약금이자, 대답이었다.
"좋다. 절반씩."
그가 말을 이었다. 로치가 마지막으로 짐을 부린 곳. 호송 없이 들어온 플류트선 한 척. 창고를 관리하던 회계사의 이름.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엘렌의 손끝이 종이 위에서 멎었다.
"사일러스 핀치." 엘렌이 나직이 말했다. "그 이름, 저도 알아요. 오스프리의 장부를 통째로 외운다는 사람."
이번엔 대니얼이 멈췄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상인과 사냥꾼. 장부와 총. 전혀 다른 길을 걸어온 두 사람이, 방금 같은 문 앞에서 마주쳤다는 것을 동시에 깨달았다.
"당신도… 오스프리를 쫓고 있었군요." 엘렌이 말했다.
대니얼은 대답 대신, 먼 수평선의 검은 스쿠너를 돌아보았다. 로치의 배는 이미 점이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놓친 사냥감이 아니었다. 훨씬 더 큰 무언가로 이어지는, 첫 번째 실마리일 뿐이었다.
"나소로." 대니얼이 은화를 궤짝에 마저 밀어 놓으며 말했다. "핀치가 거기 숨어 있다면, 우리가 먼저 그를 찾아야 한다. 놈들이 그 장부를 태워 없애기 전에."
엘렌은 종이를 다시 접어 품에 넣었다. 나소 항의 크레인들이, 아직 보이지 않는 그 부두가, 이미 그녀의 셈 속에서 삐걱대기 시작했다.
검은 물이 부두에 찰싹였다. 새벽 안개가 브리지타운 위로 낮게 깔려, 창고 지붕들이 회색 짐승의 등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엘렌은 이롱델의 뱃전에 서서 장부를 펼쳤다. 설탕 백사십 통. 럼주 스물. 계약은 어제 이미 서명을 마쳤고, 오늘 아침 하역만 하면 됐다. 마튜랭이 곁에서 파이프에 불을 붙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바람은 좋소, 아가씨. 정오 전에 실을 수 있겠어."
엘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손끝이 시렸다. 그녀는 잉크가 마르지 않은 숫자들을 다시 훑었다. 호위 계약을 맺은 뒤로 셈은 빡빡해졌지만, 이번 항차만 무사히 넘기면 낭트의 빚 한 줄을 지울 수 있었다.
부두로 내려섰다. 짐꾼들이 밧줄 더미 위에 앉아 있었다. 일어서지 않았다.
"설탕 백사십 통이오. 창고 셋째 칸."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모자를 만지작거렸다.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오늘은 이 배, 못 실어드립니다."
"계약서가 있어요. 어제 서명했고—"
"압니다. 아는데……" 사내가 침을 삼켰다. "위에서 도장이 내려왔소."
그가 턱짓한 곳에, 창고 문에 새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엘렌은 다가가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밀랍 도장. 물고기를 움켜쥔 발톱. 물수리.
가슴 밑바닥에서 서늘한 것이 올라왔다. 그녀는 이 문장을 안다. 낭트에서, 아버지의 상회가 무너지던 그 겨울에도 이것이 있었다.
"오스프리." 그녀가 낮게 말했다.
"이름은 모릅니다. 그냥…… 이 도장 붙은 배엔 손대지 말라고. 어기면 우리 조합이 다음 계절 하역권을 잃는다고 했소." 사내의 목소리가 떨렸다. "미안하오, 아가씨. 우린 먹고살아야 하니."
엘렌은 종이를 뜯어내고 싶은 충동을 눌렀다. 뜯어봐야 소용없다. 종이가 문제가 아니라 종이 뒤의 손이 문제였다.
그녀는 뒤돌아섰다. 냉정하게. 화를 내면 지는 거다. 장부를 다루는 자는 감정을 숫자 아래 묻는 법을 안다.
돌아서는 그녀의 소맷자락을, 짐꾼 하나가 슬쩍 잡았다. 젊은 사내였다. 그가 목소리를 죽였다.
"아가씨. 낮에만 그렇소."
"……무슨 뜻이죠."
"도장은 '아침 하역'을 막으랬지, 밤에 오는 배까진 말이 없었소." 그가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명령이 급하게 내려온 거요. 구멍이 있단 뜻이지. 완벽하게 짜인 방해가 아니오."
엘렌은 그 말을 곱씹었다. 손끝의 시림이 사라졌다. 대신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또각또각 맞물리기 시작했다.
방해에는 비용이 든다. 오스프리는 조합에 다음 계절 하역권을 걸었다. 겨우 스쿠너 한 척, 설탕 백사십 통을 막자고. 수지가 안 맞는다.
그렇다면 이건 설탕 문제가 아니다.
그녀가 호위 계약을 통해 무엇에 발을 들였는지—그걸 막으려는 거다. 방해가 클수록, 감추려는 게 크다. 방해는 냄새다. 증거가 가까이 있다는 냄새.
"마튜랭." 그녀가 배로 돌아오며 말했다. "밤 물때가 언제죠."
"자정 넘어 두 점. 왜—" 늙은 항해장이 파이프를 입에서 뗐다. "설마 밤에 실을 셈이오?"
"아뇨." 엘렌은 장부를 덮었다. "실을 수야 있겠지만, 그건 저들 판에서 노는 거예요. 한 번은 빠져나가도 다음엔 밤까지 막겠죠." 그녀는 안개 낀 항구를 바라보았다. "저는 종이 뒤의 손을 잡고 싶어요."
베르나르 영감을 만난 건 그날 오후, 부둣가 선술집에서였다. 보르도 포도주를 중개하는 노인은 카리브의 소문을 술처럼 담아 두는 사람이었다. 엘렌이 물수리 도장 이야기를 꺼내자, 영감은 잔을 내려놓고 한참 침묵했다.
"조심하게. 그 발톱은 상회 하나 무너뜨리는 데 겨울 한 철도 안 걸리니."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한데…… 자네, 나소 소문은 들었나."
"나소요?"
"거기 사내 하나가 숨어 산다더군." 영감이 손가락으로 탁자에 원을 그렸다. "오스프리에서 회계를 보던 자야. 회사 장부를 통째로 외우고 나왔다지. 종이 한 장 안 들고, 머릿속에 다 넣어서."
엘렌의 심장이 한 박자 크게 뛰었다.
"장부를…… 외웠다고요."
"그렇다니까. 위조 채권이 어디로 흘렀는지, 어느 해적에게 무슨 '사고'를 주문했는지—전부 그 머리 안에 있단 거지. 그래서 오스프리가 그자를 못 잡아 안달이라더군.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하고." 영감이 쓴웃음을 지었다. "핀치라던가. 사일러스 핀치."
엘렌은 자기 손안의 장부를 내려다보았다. 종이와 잉크. 증거는 언제나 종이에 남는다고 믿어 왔다. 그런데 그 모든 종이를 머릿속에 넣고 걸어 나온 사내가 있다.
물수리가 두려워하는 단 하나의 장부.
그녀는 천천히 잔을 밀어냈다. 부두의 방해는 더 이상 손해가 아니었다. 그건 화살표였다. 오스프리가 무엇을 무서워하는지, 그 방향을 가리키는.
밖으로 나오니 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이롱델의 돛대가 저녁 빛 속에서 붉게 물들었다. 마튜랭이 뱃전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어디로 갑니까, 아가씨. 설탕은—"
"창고에 그대로 둬요. 며칠 썩지 않아요." 엘렌은 갑판에 올라섰다. 바람이 서쪽에서 불어왔다. 나소 쪽에서.
"닻을 올려요, 마튜랭."
"어디로."
그녀는 검은 수평선을 향해 눈을 좁혔다. 그 너머, 해적 공화국의 부서진 부두 어딘가에, 장부 없는 회계사가 숨 쉬고 있었다.
"나소로."
럼 냄새가 먼저 왔다.
발효된 사탕수수, 젖은 나무통, 그 아래 깔린 곰팡이. 나소의 뒷골목은 낮에도 축축했고, 엘렌은 마튜랭의 등을 앞세워 좁은 통로를 걸었다. 널판 사이로 스며든 햇빛이 먼지를 갈랐다.
"여깁니다." 마튜랭이 낮게 말했다. "핀치라는 자를 만나려면, 밤이어야 한다더군요. 낮엔 절대 얼굴을 안 비친답니다."
밤을 기다렸다.
창고는 부두에서 세 골목 안쪽, 간판도 없는 이층 건물이었다. 아래층엔 럼 통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사다리를 오르자, 문 하나. 두드리기도 전에 안에서 목소리가 났다.
"장부는 두고 왔소?"
엘렌은 잠시 멈췄다. "장부는 없습니다. 셈은 제 머릿속에 있고요."
문이 열렸다.
촛불 하나. 그것뿐이었다. 창은 널판으로 막혔고, 빛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문틈마다 헝겊을 쑤셔 넣어 두었다. 사내는 마르고 창백했다. 손가락 끝이 잉크로 검게 절어 있었으나, 방 안엔 종이 한 장 없었다. 펜도, 잉크병도.
"사일러스 핀치." 엘렌이 말했다.
"이름은 아는군." 사내는 앉으라는 시늉도 없이 촛불 앞에 웅크렸다. "오스프리에서 삼 년 회계를 봤소. 그리고 삼 년째 이렇게 숨어 살지."
"왜 종이가 없죠? 회계사인데."
핀치가 웃었다. 이가 드러났다.
"종이는 태우면 그만이오. 그레일링이 제일 잘하는 게 그거요. 불." 그가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렸다. "그래서 난 여기다 넣어 뒀소. 태울 수 없는 곳에."
엘렌의 심장이 한 박자 건너뛰었다.
"계정 사천사백십칠." 핀치가 눈을 감았다. "아바나 지점, 유령 계좌. 무너뜨릴 상회의 채권을 여기로 흘려 위조 어음으로 바꿨소. 어음마다 결재 코드가 붙지. 에이 점 지."
A.G.
앰브로즈 그레일링.
"낭트의 뒤부아 상회도 그 계정을 거쳤을 거요." 핀치가 눈을 떴다. 촛불이 그의 눈동자에서 흔들렸다. "석 달 치 어음을 위조해 채무를 부풀렸지. 액수까지 말해 줄까? 나는… 지우질 못하오. 한 번 본 숫자는."
엘렌은 숨을 멈췄다.
아버지의 상회가 무너지던 그해, 어디서도 찾지 못한 그 숫자. 위조된 채권의 출처. 태워진 원장. 그 모든 재가 지금, 초 한 자루 앞에 앉아 숨을 쉬고 있었다.
살아 있는 장부.
"당신은," 엘렌의 목소리가 낮게 갈렸다. "증거 그 자체군요."
"증거는 사람을 죽게 하지." 핀치가 어깨를 움츠렸다. "그레일링은 종이만 태우는 게 아니오. 나를 아는 자들이 하나씩 사라졌소. 나소가 해적 소굴이라 다행이지. 여기선 아무도 남의 이름을 안 물으니까."
마튜랭이 문가에서 침묵을 지켰다. 엘렌은 무릎을 굽혀 촛불 너머 핀치와 눈높이를 맞췄다.
"법정에 서 주세요."
핀치의 얼굴이 굳었다.
"장부 없이 무너뜨릴 순 없어요. 종이는 위조라 우기면 그만이지만, 사람은 달라요. 당신이 외운 걸 판사 앞에서 말하면, 그레일링의 항로가 통째로 드러나요." 엘렌은 한 자 한 자 눌러 말했다. "신변은 제가 보장합니다. 재판 그날까지, 당신을 살려 두겠어요. 이롱델의 선원 절반을 붙여서라도."
침묵이 길었다. 촛농이 흘러 촛대에 굳었다.
"조건이 하나 있소." 핀치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에 처음으로 온기 비슷한 게 스쳤다. 아니, 온기가 아니라 굶주림이었다.
"뭐든."
"그 회사가 무너지는 걸." 그가 촛불을 응시했다. "내 눈으로 보게 해 주시오. 소식으로 듣는 것 말고. 그레일링이 제 손으로 세운 게 제 발밑에서 꺼지는 걸, 이 두 눈으로. 삼 년을 그것만 상상하며 버텼소."
엘렌은 손을 내밀었다.
"약속하죠."
핀치의 잉크 절은 손이 그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마른 종이 같은 손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 든 것은—항로 하나를 통째로 사들인 카르텔을, 아버지의 상회를 재로 만든 위조를, 그 모든 걸 무너뜨릴 열쇠였다.
엘렌은 사다리를 내려오며 밤바람을 들이켰다. 럼 냄새가 이제는 다르게 느껴졌다. 발효되는 것은 언젠가 터지는 법이니까.
머릿속에서 계산이 돌기 시작했다. 증언, 항해장, 대니얼의 총, 에민의 해도. 흩어져 있던 세 갈래가 하나의 이름으로 모이고 있었다.
물수리.
이제 필요한 건 법정. 그리고 그날까지, 이 살아 있는 장부를 살려 두는 일이었다.
바다 냄새가 나지 않는 방이었다.
낭트의 변호사 사무실은 종이와 봉랍, 식은 난롯재 냄새로 가득했다. 엘렌은 오랜만에 육지의 냄새 속에 앉아 있었고, 그것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이롱델'의 갑판에서는 늘 소금과 타르가 코를 찔렀는데.
"뒤부아 양, 준비되셨으면."
변호사 라퐁이 안경을 고쳐 썼다. 마르고 신중한 남자였다. 그가 탁자 위에 서류를 한 장씩 펼쳤다.
첫 장은 위조 채권이었다.
엘렌은 그것을 안다. 3년 전, 아버지의 상회를 목 졸라 죽인 종이. 낯선 서명, 낯선 날짜, 존재한 적 없는 빚. 오스프리는 이 한 장으로 뒤부아 상회를 '채무 불이행'으로 몰아 압류했다.
이제 그 종이가 다시 탁자에 올랐다. 이번엔 죽이려는 자가 아니라, 죽인 자를 겨누기 위해.
"핀치 씨의 각서입니다."
라퐁이 두 번째 서류를 밀었다. 사일러스 핀치. 오스프리의 전 회계사. 나소의 눅눅한 뒷방에서 장부를 통째로 외우던 사내. 지난 화의 그 밤, 촛농이 흘러내리는 탁자에서 그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각서에는 그의 손으로 적은 문장들이 빼곡했다. 어느 채권이 위조인지, 누가 지시했는지, 서명 'A.G.'가 누구의 것인지.
엘렌의 손끝이 종이 위에서 잠시 멈췄다.
"증언은 강력합니다." 라퐁이 말했다. "하지만 증언일 뿐이지요. 핀치 씨는 도망자이고, 오스프리는 그를 '앙심 품은 해고자'라 부를 겁니다."
"압니다."
"필요한 건 물증입니다. 위조를 위조라 증명할, 흔들리지 않는 기준."
엘렌은 고개를 들었다. "기준이라면."
"진본. 뒤부아 상회의 진짜 장부입니다." 라퐁이 위조 채권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이 서명이 가짜임을 증명하려면, 아버님의 진짜 필적과 진짜 인장이 나란히 있어야 합니다. 위조는 원본 앞에서만 무너집니다."
방이 조용해졌다. 난롯재가 사각, 하고 주저앉았다.
원본 장부. 아버지의 글씨.
엘렌은 그 장부를 안다. 두꺼운 송아지 가죽 표지. 아버지가 매일 밤 촛불 아래 숫자를 적어 넣던 책. 페이지마다 눌러쓴 필적, 페이지 끝마다 찍힌 붉은 밀랍 인장. 뒤부아라는 이름이 종이 위에 살아 있던 유일한 곳.
"그 장부는," 엘렌이 천천히 말했다. "압류 경매 때 사라졌습니다."
라퐁이 서류철을 뒤적였다. 그의 손가락이 한 줄에서 멈췄다.
"사라진 게 아닙니다. 팔렸지요." 그가 목록을 짚었다. "압류 물품 경매 기록입니다. 가재도구, 가구, 서적…… 그리고 '상업 장부 일괄'. 낙찰자는 한 명. 카디스의 골동품상, 알바로."
엘렌은 그 이름을 소리 내지 않았다. 대신 속으로 되뇌었다. 알바로. 카디스.
아버지의 삶이 통째로 경매대에 올랐던 날. 엘렌은 그날 그 자리에 없었다. 낭트에 있지도 못했다. 그리고 누군가는 아버지의 장부를 헐값에, 낡은 종이 뭉치의 무게로 사들여 카디스의 먼지 낀 진열대에 처박아 두었다.
"되살 수 있습니까."
"골동품상은 사는 것도 파는 것도 업으로 삼는 자들입니다." 라퐁이 어깨를 으쓱했다. "값만 맞으면요. 다만……"
"다만."
"그자가 장부의 진짜 값어치를 안다면, 부를 값도 달라지겠지요. 이건 그저 낡은 회계책이 아니니까. 오스프리를 겨누는 칼입니다. 그리고 이 도시에서 그걸 아는 자가 우리뿐일 거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엘렌은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루아르강 어귀로 회색 빛이 내려앉고 있었다. 저 물길을 따라 내려가면 비스케이만, 그리고 남쪽으로 스페인 해안. 카디스.
가슴 한구석이 씁쓸하게 저렸다.
아버지의 글씨를 되사야 한다.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필적을, 그것이 통째로 팔려 나간 값보다 훨씬 비싸게. 도둑맞은 자가 도둑질의 결과물을 다시 돈 주고 사 오는 일. 세상은 이런 식으로 사람을 두 번 벗겨 먹는다.
한 번은 위조 채권으로.
두 번은 되사기로.
엘렌은 손끝으로 위조 채권을 톡, 하고 건드렸다. 이 가짜 한 장 때문에 아버지의 진짜 한 권이 카디스로 흘러갔다. 그 진짜 한 권을 되찾지 못하면, 이 가짜는 영원히 가짜인 채로 남는다. 증명되지 못한 진실은 거짓과 같은 무게다.
그녀는 안다. 장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누군가 나란히 놓아 주기 전까지, 진실은 스스로 말하지 못할 뿐이다.
"라퐁 씨." 엘렌이 일어섰다. 치맛자락에서 마른 종이 냄새가 흩어졌다. "핀치 씨의 각서와 이 위조 채권, 사본을 세 부씩 만들어 각기 다른 곳에 보관해 주세요. 원본은 절대 한 곳에 두지 마시고."
"현명하십니다. 그럼 카디스는……"
"제가 갑니다."
문가에서 마튜랭이 기다리고 있었다. 늙은 항해장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엘렌의 얼굴만 보고도 뱃길이 정해졌음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낡은 삼각모를 눌러쓰며 짧게 말했다.
"'이롱델'에 짐을 실을깝쇼."
"남풍이 자면 곧장."
계단을 내려서자 항구의 냄새가 밀려왔다. 소금, 타르, 젖은 밧줄. 비로소 숨이 트였다. 엘렌은 외투 안주머니를 눌러 보았다. 그 안엔 아버지의 옛 서한 한 통이 들어 있었다. 필적을 대조할, 유일하게 남은 한 조각.
3년 전, 그들은 위조 한 장으로 아버지의 모든 것을 앗아 갔다. 장부도, 이름도, 필적까지.
엘렌은 부두 끝에 서서 남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회색 구름 아래, 보이지 않는 카디스가 있었다.
그때 그들은 훔쳐 갔다.
이번엔, 제값에 사 온다.
아버지의 유해는 낭트의 성당 마당에 묻혔지만, 아버지의 필체는 카디스에 남아 있었다.
엘렌은 그 사실을 골동품상 알바로의 서고에 들어선 순간 직감했다. 오래된 종이와 아마인유, 쥐똥과 밀랍이 뒤섞인 냄새. 이롱델의 갑판에서 사흘을 달려온 코에 그 정체된 공기가 낯설게 눌러왔다.
"뒤부아 상회의 후계자라." 알바로가 안경 너머로 그녀를 훑었다. 카디스 골동품상 특유의, 물건보다 사람을 먼저 감정하는 눈이었다. "닮았군. 아버지를."
"그 장부, 보여주세요."
알바로는 서두르지 않았다. 늙은 손이 서가의 그늘에서 가죽 표지 하나를 끄집어냈다. 물때에 절어 모서리가 부푼 원장. 엘렌의 심장이 한 박자 어긋났다. 이롱델 침몰 전,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카디스 지점에 맡겼다던 그 회계 장부.
"어제 한 신사가 다녀갔소." 알바로가 표지를 손바닥으로 쓸며 말했다. "물수리 반지를 낀 사람이었지. 발톱으로 물고기를 움켜쥔 문장. 값은 자기가 먼저 부르겠다더군. 얼마든."
물수리. 엘렌의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오스프리.
"먼저 부르는 게 값이다." 그녀는 낮게 되뇌었다. "그건 사겠다는 게 아니라, 태우겠다는 뜻이에요."
알바로의 눈썹이 움찔했다. 장사꾼은 이런 종류의 침묵을 안다. 물건이 위험해질 때의 침묵.
"증명해 보시오." 그가 원장을 탁자 위로 밀었다. 그러나 손은 떼지 않았다. "이게 당신 아버지 것이라는 걸. 반지 낀 신사도 서류를 내밀었소. 오스프리 상사 명의의 채권 양도증. 인장까지 완벽했지. 나는 어느 쪽이 진짜 주인인지 알아야 장사를 하오."
위조. 언제나 위조였다. 그들은 종이로 사람을 죽인다.
엘렌은 원장을 펼쳤다. 그리고 숨을 골랐다. 열에 하나는 위조범도 흉내 낼 수 있는 것들이다. 서명, 인장, 필체. 하지만 흉내 낼 수 없는 게 하나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페이지의 오른쪽 아래 여백을 짚었다.
거기, 잉크로 그린 작은 밀 이삭 하나가 있었다.
목이 메었다.
"보세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 여백."
알바로가 안경을 고쳐 썼다.
"아버지는 흉년에 창고를 여신 분이에요. 열여섯 해 전, 낭트에 기근이 들었을 때. 밀값이 세 배로 뛰었고, 다른 상회들은 곳간을 걸어 잠갔죠. 아버지만 열었어요. 손해를 보면서." 그녀는 이삭의 낟알을 하나하나 눈으로 셌다. "그해부터였어요. 결산이 이문으로 끝나는 페이지마다, 여백에 밀 이삭을 그리셨죠. '굶는 이가 없었다'는 표시로. 아버지만의 표시."
그녀는 페이지를 넘겼다. 이문의 장에는 이삭이, 손실의 장에는 여백이 비어 있었다. 넘기고, 또 넘겼다. 이삭, 여백, 이삭, 여백. 규칙은 한 번도 어긋나지 않았다.
"위조범은 서명을 봅니다." 엘렌이 고개를 들었다. "인장을 보고, 필체를 봐요. 하지만 여백은 안 봐요. 여백엔 값이 없으니까. 아버지에겐 여백이 전부였는데."
손끝의 낟알이 아버지의 목소리처럼 만져졌다. 셈은 차갑지만, 셈하는 이유는 따뜻해야 한다. 그가 늘 하던 말. 이 밀 이삭이 그 말의 서명이었다.
서고가 조용했다. 밖에서 카디스 항구의 갈매기가 울었고, 짐수레 바퀴가 자갈을 갈았다.
"…삼십 년을 이 장사를 했소." 알바로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손이 원장에서 천천히 떨어졌다. "반지 낀 신사는 인장을 내밀었지. 당신은 여백을 내밀었고." 그는 쓴 미소를 지었다. "인장은 만들 수 있어도, 굶주린 해에 곳간을 여는 건 만들 수 없지."
"정가에 넘기겠소." 그가 원장을 그녀 쪽으로 밀었다. 이번엔 손을 완전히 뗐다. "반지 낀 신사가 부른 값의 절반도 안 되는 값에. 나는 진짜 주인에게 파는 장사꾼이지, 태우려는 자에게 파는 놈이 아니오."
엘렌의 손이 원장을 끌어안았다. 물때에 부푼 가죽에서 아버지의 서재 냄새가 났다. 낭트의 이층, 창밖으로 루아르 강이 흐르던 그 방. 아버지가 펜을 내려놓고 여백에 이삭을 그리던 그 저녁들.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십 년 만에, 아버지가 등 뒤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알바로의 다음 말이 그 온기를 얼렸다.
"서두르시오." 그가 창밖 골목을 흘긋 보았다. "그 신사, 오늘 아침에 또 사람을 보냈소. 값을 두 배로 올리겠다고. 나는 이미 팔렸다 했지만."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런 자들은 못 산 물건을 그냥 두지 않소. 못 사면 없애지."
엘렌은 원장을 품에 넣고 외투 앞섶을 여몄다. 마튜랭이 이롱델을 대어 놓은 부두까지는 좁은 골목 여섯 개. 그 사이에 물수리의 눈이 몇이나 박혀 있을지.
"고맙습니다, 알바로." 그녀는 문고리를 잡았다. "이 은혜, 뒤부아 상회의 장부에 적어 두죠. 여백이 아니라, 이문의 장에."
노인이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문을 나서기 전, 엘렌은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 신사, 어떤 얼굴이었죠?"
알바로의 웃음이 걷혔다. 그는 한참 만에 대답했다.
"빈손으로 돌아갈 얼굴은 아니었소."
골목의 빛이 창백했다. 부두 쪽에서 짠 바람이 밀려왔고, 그 바람에 낯선 냄새가 섞여 있었다. 화약과 타르, 그리고 서두르는 발소리. 엘렌은 원장을 더 깊이 끌어안았다.
오늘 밤. 그자는 오늘 밤 출항한다.
먼저 닻을 올리는 쪽이, 카디스를 살아서 벗어난다.
낭트 해사법원의 정문은 아침 여덟 시가 되기도 전에 밀려든 사람들로 삐걱거렸다.
엘렌은 이롱델의 갑판에서보다 이곳에서 더 멀미를 느꼈다. 나무 벤치가 가득 찬 방청석. 카디스에서, 보르도에서, 라로셸에서 배를 타고 온 상인들. 얼굴마다 오스프리의 위조 채권에 한 번쯤은 목을 졸린 이력이 있었다.
베르나르 영감이 앞줄에서 손을 들어 보였다. 그 곁, 창백하지만 꼿꼿한 등을 세운 사내—사일러스 핀치.
"떨고 있어요, 아가씨." 마튜랭이 낮게 말했다.
"손이 아니라 장부가 떨고 있는 거예요, 항해장." 엘렌은 무릎 위 가죽 표지를 눌렀다. 아버지의 상회 장부. 잉크가 바랜 마지막 장까지, 그녀는 전부 외우고 있었다.
법정이 열렸다.
오스프리 낭트 지점의 변호인은 은단추가 달린 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는 채권 다발을 흔들며 말했다. "적법하게 인수된 부채입니다, 재판장님. 뒤부아 상회는 스스로 무너졌을 뿐."
엘렌은 그 문장을 오래 기다려 왔다. 이제 반박할 차례였다.
"증인을 부르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고요했다. "사일러스 핀치. 오스프리 상사 전 회계사."
방청석이 술렁였다. 핀치가 일어섰다.
"저는 삼 년간 오스프리의 채권을 만들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마른 종잇장 같았지만, 문장은 또렷했다. "만들었다, 라고 말씀드립니다. 인수한 게 아니라.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부채를, 날짜를 거슬러 적어 넣었습니다."
변호인이 벌떡 일어섰다. "증거가—"
"필적입니다." 엘렌이 끊었다.
그녀는 두 장의 종이를 나란히 법대 위에 올렸다. 하나는 뒤부아 상회를 무너뜨린 채권. 다른 하나는, 핀치가 방금 이 법정에서 받아 적은 같은 문구.
"보십시오. 'A.G.'의 서명이 아니라, 본문의 글씨입니다." 그녀의 손가락이 두 종이 사이를 오갔다. "'e'의 꼬리가 아래로 말립니다. 'trois'의 't'가 가로줄을 두 번 긋습니다. 같은 손이에요. 채권을 쓴 손과, 오스프리 장부를 쓴 손이."
필적 감정인이 확대경을 들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법정은 물속처럼 조용했다.
"동일한 필적으로 사료됩니다." 감정인이 말했다.
핀치가 고개를 돌려 엘렌을 보았다. 삼 년치 죄책감과, 그것을 이제야 내려놓는 얼굴이었다.
"저는 오스프리 낭트 장부를 통째로 기억합니다." 그가 재판장을 향해 말했다. "원하시는 계정, 원하시는 날짜, 말씀만 하십시오. 숫자는 거짓말을 못 합니다. 사람이 시킬 뿐이지요."
재판장이 봉을 들기까지, 오후의 해가 높은 창을 두 뼘 넘게 지나갔다.
"본 법정은 판결한다."
엘렌은 숨을 멈췄다.
"뒤부아 상회에 대해 오스프리 상사가 보유한 채권 일체—무효로 한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간주한다."
방청석에서 누군가 흐느꼈다.
"뒤부아 상회의 명의를 후계자 엘렌 뒤부아에게 회복한다. 오스프리 상사 낭트 지점의 자산을 압류하며, 피해 상회들에 대한 배상을 명한다."
봉이 떨어졌다. 딱, 하는 소리가 뼛속까지 울렸다.
밖으로 나오자 부두의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소금과 타르와 갓 구운 빵 냄새. 살아 있는 항구의 냄새.
사람들이 이미 모여 있었다. 낡은 목판 하나가 밧줄에 묶여 올라가는 중이었다. 오스프리의 인부들이 뜯어냈던, '뒤부아 & 피스' 간판.
엘렌이 직접 밧줄을 잡았다. 마튜랭이 반대쪽을 잡았다. 간판이 삐걱이며 원래 자리로 올라갔다. 오래된 못자국에, 오래된 글씨가 다시 걸렸다.
그녀는 오래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이 항구를 떠난 날, 이 간판은 이미 반쯤 떼여 있었다.
"아가씨." 마튜랭의 눈가가 붉었다.
"장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항해장." 엘렌은 손등으로 눈을 훔쳤다. "오늘 자로—전부 결산됐어요."
베르나르 영감이 포도주 병을 땄다. 핀치가 처음으로 옅게 웃었다. 부두 위로 상인들의 환호가 갈매기처럼 퍼졌다.
그날 밤, 엘렌은 회복된 상회의 책상 앞에 앉아 새 장부의 첫 장을 폈다. 깨끗한 백지. 잉크를 찍었다.
그리고 손이 멈췄다.
낭트 지점은 무너졌다. 회계사는 증언했고, 자산은 압류됐고, 간판은 다시 걸렸다. 이 도시에서 오스프리는 끝났다.
하지만 물수리의 몸통은 여기 있지 않았다.
앰브로즈 그레일링. A.G. 그 손은 지금도 런던의 유리창 뒤, 안개 낀 템스강을 내려다보며 다음 항로를 사들이고 있을 것이다. 낭트의 발톱 하나를 잃은 것도 아직 모른 채.
엘렌은 백지 위에 한 줄을 적었다.
*런던.*
잉크가 마르기 전에, 그녀는 이미 그곳의 물길을 셈하고 있었다.
검은 물마루가 뱃전을 두드렸다. 엘렌은 '이롱델'의 고물 난간에 팔을 얹고, 서쪽으로 눕는 해를 바라보았다.
몇 달이었다. 낭트의 법정을 나선 뒤로.
바람이 좋았다. 스쿠너의 두 돛이 팽팽하게 부풀어 남서쪽을 물어뜯었다. 갑판 아래에서는 후추와 소금에 절인 대구 냄새가 올라왔다. 정직한 화물의 냄새였다.
"엘렌 아가씨." 마튜랭이 접힌 종이를 내밀었다. 늙은 항해장의 손마디가 소금에 절어 굵었다. "베르나르 영감 편으로, 런던발입니다. 사흘 묵은 소식이지만."
엘렌은 봉랍을 뜯었다.
읽었다.
한 번. 그리고 다시 한 번.
*오스프리 상사, 파산.*
바다 소리가 잠시 멀어졌다.
"오스프리가," 그녀는 소리 내어 읽었다. "무너졌어."
글자들이 손안에서 떨렸다. 그녀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을 그녀는 곧 알아차렸다.
낭트의 판결이 먼저였다. 위조 채권의 '수법'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어떻게 서명을 흉내 내고, 어떻게 배서를 겹쳐 찍고, 어떻게 멀쩡한 상회를 하룻밤에 빚더미로 앉혔는지. 판사는 그것을 조서에 남겼고, 조서는 필사되어 항구마다 퍼졌다. 오스프리의 '수법'이 지워졌다.
그러나 편지는 더 말하고 있었다.
*카리브의 한 법정에서 증언과 주문서가 나왔다고 한다.*
엘렌은 눈을 가늘게 떴다. 주문서. 해적에게 '사고'를 주문한 종이. 누군가가 그 종이를 법정에 세웠다. 코맥 로치 같은 자에게 배를 부수라 명한 손, 그 '손'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손이라."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장부를 다뤘다. 숫자와 서명, 수법. 하지만 총으로 그 손을 붙든 누군가가 따로 있었다.
*그리고 어느 박물지가 전면 공개되었다.*
엘렌은 그 대목에서 멈췄다.
박물지. 오스프리의 마지막 상품은 지식이었다. 정확한 해도가 퍼지지 않게 사재기한 항로, 감춰 둔 여울과 물길. 그것이 통째로 인쇄되어 세상에 풀렸다는 것이다. 아카데미의 이름을 달고. 누구든 살 수 있는 한 권의 책으로.
감춘 물길이 만인의 것이 되면, 그것을 팔던 회사는 팔 것이 없다.
수법이 지워지고, 손이 붙들리고, 마지막 상품이 사라졌다.
투자자들은 쥐처럼 달아났다. 채권값이 무너졌다. 런던과 암스테르담의 사무실에 자물쇠가 걸렸다. 회사는 한 달을 못 버텼다고, 편지는 담담히 적고 있었다.
"그레일링은," 마튜랭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자는요?"
엘렌은 마지막 줄로 눈을 내렸다. 그리고 웃음이 났다. 소리 없는, 오래 참았던 웃음이었다.
"야반도주했대. 아바나 지점의 금궤를 싣고, 밤에."
"그런데요?"
"자기 회사가 위조한 여울에 얹혔어." 그녀는 편지를 접었다. "'접근 금지'라고 거짓 해도에 그려 넣은 그 여울에. 배가 좌초했고, 아침에 관헌이 그를 끌어냈다는군."
물수리는 물고기를 움켜쥔 채 물에 빠졌다.
자기 발톱에 자기가 걸려서.
엘렌은 난간을 짚고 오래 서 있었다.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파산 선고를 받던 날, 낭트의 서재에서 조용히 고개를 숙이던 그 어깨가. 몰락한 상회의 문에 붙던 압류 딱지가. 그녀가 열아홉에 삼킨 모든 숫자가.
이제 그 장부의 마지막 줄이 닫혔다.
*대변과 차변이 맞았다.*
"마튜랭."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상하지 않아? 나 혼자 한 일이 아니야, 이건."
"무슨 말씀이신지."
그녀는 편지를 톡톡 두드렸다. "나는 낭트에서 수법을 파헤쳤어. 장부로. 그런데 손을 붙든 사람이 카리브에 따로 있었어. 총을 든 누군가가. 그리고 물길을 만천하에 푼 사람이 또 따로 있었지. 책을 쓴 누군가가."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훑고 지나갔다.
"우린 서로를 몰라. 얼굴도, 이름도. 그런데 같은 물수리를 겨눴어. 같은 바다에서."
셋. 장부와 총과 지식.
그녀는 그 세 갈래가 어디선가 만났을 것이라 어렴풋이 느꼈다. 어쩌면 아주 오래전, 어느 항구의 문장 하나에서. 물고기를 움켜쥔 그 발톱에서.
마튜랭이 담뱃대를 물고 조용히 웃었다. "그거 아십니까, 아가씨. 원한이든 정의든, 큰 짐승은 늘 여러 창에 쓰러지는 법입니다."
엘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가 수평선에 닿았다. 바다가 붉게, 그리고 검게 물들었다.
그녀는 오래 그 검은 선을 바라보았다.
복수는 끝났다. 오스프리는 없다. 아버지의 원한도, 낭트의 치욕도, 이제 조서와 함께 봉인되었다. 후련했다. 텅 빈 후련함이 아니라, 무언가를 다 갚고 난 사람의 후련함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끝이 아니었다.
'이롱델'의 선창에는 후추와 대구가 실려 있었다. 정직한 화물이었다. 위조 채권이 아니라, 진짜 물건. 사고팔고, 이문을 남기고, 다음 항구로 가는.
엘렌 뒤부아는 상인이었다. 복수자이기 전에, 그녀는 장부를 쥔 상인이었다.
"마튜랭." 그녀가 몸을 돌렸다. 눈에 다른 빛이 들어 있었다. 슬픔이 아니라, 셈이었다. "카디스의 알바로가 골동품을 부탁했지. 그리고 베르나르 영감이 보르도 포도주를 카리브에 대 달라고 했어."
"항로를 잡을까요?"
"잡아." 그녀는 젖은 갑판을 성큼 밟았다. "이제 진짜 장사를 하러 가는 거야."
마튜랭이 키를 잡았다. 돛이 방향을 물었다.
엘렌은 이물로 걸어 나가, 어두워지는 수평선을 마주 보았다.
검은 선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그녀는 아직 몰랐다. 새로운 항구, 새로운 장부, 새로운 이름들. 어쩌면 카리브 어딘가에서, 총을 든 그 사람과, 책을 쓴 그 사람과, 스칠지도 몰랐다.
그녀는 그것이 궁금했다.
바람이 남서쪽으로 불었다.
'이롱델'이 뱃머리를 돌렸다. 검은 수평선 너머로.
제비 한 마리가, 저녁 바다를 가르며 앞서 날았다.
그날 총독부의 공기는 잉크와 봉랍 냄새로 텁텁했다.
대니얼 하트는 문지방에서 삼각모를 벗었다. 좁은 창으로 든 포트로열의 빛이 서기의 책상 위, 두 장의 종이를 갈랐다. 밖에서는 부두의 도르래가 삐걱였고, 짐배의 럼주 통이 굴러가는 둔탁한 소리가 벽을 타고 들어왔다.
서기는 안경 너머로 그를 한 번 훑고, 종이 두 장을 손끝으로 밀었다.
"하트 선장. 한 장은 통지, 한 장은 위임이오."
첫 장에는 총독의 인장이 절반쯤 지워진 채 찍혀 있었다. *사략 면허 만료.* 위트레흐트 이후 왕은 더 이상 카리브의 사냥개들에게 서명을 내주지 않았다. 전쟁이 끝났으니 사냥개도 필요 없다는 뜻이었다.
대니얼은 그 문장을 소리 없이 읽었다. 표정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건."
서기가 두 번째 장을 손톱으로 톡 쳤다. *해적 사냥 위임장.* 현상이 걸린 선장을 잡아 총독부에 넘기면, 배와 화물의 몫을 받는다. 면허가 아니라 청부였다. 나라의 개가 아니라, 삯을 받는 사냥꾼.
"전쟁 영웅께 어울리는 일이오. 사면장을 원하시면 그것도 흔들어 드릴 수 있고."
"필요 없소."
대니얼은 두 번째 장을 집어 접었다. 종이가 손안에서 딱딱하게 각을 세웠다.
"면허는 만료됐지." 그는 낮게 말했다. "빚 받을 권리는 만료되지 않았소."
서기의 펜이 잠깐 멈췄다. 대니얼은 이미 등을 돌리고 있었다.
*
부두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바다가 열렸다.
포트로열의 만은 오후 햇살에 청동처럼 굳어 있었다. 정박한 상선들 사이, 새로 타르 칠을 마친 슬루프 한 척이 물살을 따라 가볍게 흔들렸다. *페레그린.* 매(隼)의 이름을 붙인 배였다.
갑판에서 조라 케인이 포문을 닦고 있었다. 포술장. 말수가 적고, 손이 정확한 여자였다. 그녀는 대니얼이 다가오는 것을 곁눈으로 보고, 걸레를 어깨에 걸쳤다.
"면허는?"
"죽었다."
"그럼 우린 뭐지."
"사냥꾼." 대니얼은 접힌 위임장을 난간에 올려놓았다. "삯 받는."
조라는 그 종이를 한참 보았다. 그러곤 포신을 손바닥으로 툭 쳤다. 잘 벼린 쇠가 낮게 울었다.
"정비는 끝냈어. 밑창 다시 발랐고, 삭구도 새로 꼬았고. 화약은 마른 걸로 채웠어. 이 배는 이제 새것보다 나아."
"알아."
대니얼은 삭구를 따라 시선을 올렸다. 팽팽하게 당겨진 밧줄, 접힌 돛, 정갈하게 감긴 매듭. 손이 근질거렸다. 오래 쉰 손이었다.
*
밤이 되자 선실에서 그는 낡은 항해일지를 펼쳤다.
이 년 전 페이지. 잉크가 번진 그 자리에서 손이 멈췄다. *코맥 로치.* 옛 부하. 함께 백 번은 포문을 열었던 사내. 대니얼이 열병으로 사흘 앓는 사이, 로치는 배를 빼돌렸다. 선원 열둘을—함께 밥을 먹고 함께 노래하던 열둘을—카르타헤나의 노예상에게 팔아넘겼다.
그중에는 열여섯 난 갑판소년도 있었다.
대니얼은 그 열둘의 이름을 지금도 순서대로 욀 수 있었다. 잊으려 애쓴 적이 없으니까.
로치는 지금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검은 이빨.* 부러진 앞니 자리에 흑단을 박아 넣었다는 소문. 나소 남쪽 얕은 물목에서 소형 상선을 뜯어먹으며 산다고 했다.
대니얼은 일지를 덮었다. 원한은 이 년 동안 식지 않았다. 다만 뜨겁지도 않았다. 그것은 이제 차게 벼려진 쇠처럼, 손에 익은 무게로만 남아 있었다.
증오만으로 사냥하는 자는 죽는다. 그는 그것을 안다. 그래서 서두르지 않을 것이다.
*
새벽, 갑판에 서서 그는 만 밖의 검은 수평선을 보았다.
이 년을 뭍에서 썩었다. 손도, 조준도, 배를 읽는 감도 무뎌졌을 것이다. 로치는 영악한 사내였다. 무딘 칼로 덤비면 되레 잡아먹힌다.
"조라."
포술장이 어둠 속에서 대답했다. "말해."
"먼저 잔챙이부터 잡는다. 현상 걸린 놈들, 작은 것부터. 손을 되찾을 때까지."
"실력을 벼린 다음—"
"로치를 잡는다."
대니얼은 위임장을 안주머니에 넣었다. 종이의 각이 가슴께에서 단단했다.
돛이 새벽바람을 받아 처음으로 배를 부풀렸다. *페레그린*이 뱃머리를 만 밖으로 돌렸다.
로치. 바다는 넓어 보이지만, 사냥꾼에게는 좁다.
이제 곧, 그 좁은 바다에서 마주칠 것이다.
검은 물결이 슬루프의 뱃전을 핥았다. 대니얼 하트는 뒷돛대 그늘에 몸을 붙인 채, 반 마일 앞에서 느릿하게 흔들리는 작은 스쿠너를 바라보았다.
"돛이 낡았습니다." 조라 케인이 낮게 말했다. 포술장의 손은 이미 이물 대포의 도화선 곁에 있었다. "선체도 물을 먹었고요. 잔챙이입니다, 선장."
"잔챙이라도 입은 붙어 있지." 대니얼은 망원경을 접었다. "쏘지 마라. 침몰시키면 아무것도 못 듣는다."
페레그린은 바람을 훔쳐 조용히 거리를 좁혔다. 면허가 만료된 사냥꾼에게 사냥터는 좁았지만, 이 배는 달랐다. 사흘 전 포트로열의 부둣가에서 주운 소문 하나. 코맥 로치의 부하가 이 해역에서 소금에 절인 대구를 팔고 있다는 것.
대구 상인이 총을 여섯 자루나 싣고 다닐 리 없었다.
거리가 백 야드로 줄자 대니얼은 뱃머리로 나섰다. 회색 새벽빛 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물 위를 굴렀다.
"돛을 내려라. 페레그린의 하트다. 순순히 하면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
스쿠너 위에서 짧은 소란이 일었다. 누군가 화승총을 들었고, 조라의 회전포가 그자의 발치 널판을 박살 냈다. 나뭇조각이 튀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돛이 힘없이 접혔다.
갈고리가 걸리고, 대니얼의 부하 넷이 건너뛰었다. 저항은 없었다. 여섯 명, 모두 굶주린 눈에 굳은 손. 해적이라기보다 해적이 되다 만 자들이었다.
우두머리라는 자는 뺨에 흉터가 있는 젊은 사내였다. 대니얼은 그를 갑판 한복판에 앉히고, 자기도 통 하나를 끌어와 마주 앉았다. 심문은 서두르지 않는 편이 낫다.
"이름."
"...핀턴입니다."
"핀턴. 이 배는 로치 밑에서 뛰지."
사내의 눈이 흔들렸다. 대답이 곧 자백이었다.
"로치가 요즘 어디 있나."
"모릅니다. 정말입니다." 핀턴이 침을 삼켰다. "그자는 이제 혼자 안 다녀요. 늘 다른 배들하고 같이 움직입니다. 한 척이 아니라... 선단처럼요."
대니얼의 눈썹이 미미하게 좁혀졌다. 로치는 겁쟁이이자 배신자였다. 그런 자가 무리를 이끈다? 그럴 위인이 못 됐다.
"누구 밑에서."
핀턴은 대답 대신 제 소매를 걷었다. 팔뚝 안쪽, 검은 잉크로 조악하게 새긴 문신 하나. 물고기를 움켜쥔 발톱. 물수리였다.
"이 깃발 아래서 일합니다." 사내가 속삭였다. "우리 같은 것들한테도 일감을 줘요. 어느 상선단을 호위할지, 어느 배를... '사고' 나게 할지. 명령이 위에서 내려옵니다. 종이에 적혀서요. 물수리 문장이 찍힌 종이에."
대니얼은 오래 말이 없었다.
해적이 상선단을 호위한다. 해적이 명령서를 받는다. 그가 아는 바다에서 그런 일은 없었다. 해적은 훔치고, 사냥꾼은 쫓는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이 굶주린 사내는 지금 회사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장부와 도장과 종이의 이야기를.
"'사고'라는 게 뭐냐."
"배가 사라지는 겁니다. 화물째로. 그런데 이상한 건..." 핀턴이 목소리를 낮췄다. "우리가 털 배를 우리가 정하는 게 아니에요. 위에서 골라줍니다. 어떤 배는 절대 건들지 말라고 하고, 어떤 배는 꼭 없애라고 하고. 마치 누가 바다 전체를 장부처럼 들여다보는 것 같았습니다."
바다 전체를 장부처럼.
대니얼은 문득 자기가 쫓던 원한의 크기가 잘못됐다는 걸 느꼈다. 그는 로치 한 놈의 목을 원해서 여기까지 왔다. 부하 열둘을 노예상에 팔아넘긴 그 배신자. 그런데 로치는 표적이 아니라 손가락 하나였다. 방아쇠를 당기는 손 뒤에, 총을 겨눈 자가 따로 있었다.
물수리. 그 발톱이 쥐고 있는 건 물고기가 아니라 바다 자체였다.
"선장." 조라가 곁으로 왔다. "이자들은 어쩝니까."
"뭍에 내려준다. 배는 태운다." 대니얼이 일어섰다. "총은 우리가 가져간다."
핀턴이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살려준다는 걸 믿지 못하는 눈이었다. 대니얼은 그 눈을 잠깐 마주했다. 굶주림이 사람을 이런 데까지 끌고 온다. 오스프리는 그 굶주림을 사서, 총알로 바꿔 쏘고 있었다.
"핀턴. 마지막으로 하나." 대니얼이 몸을 돌리다 멈췄다. "명령서는 어디서 받나. 그 종이."
사내는 한참 망설였다. 그러다, 살려준 값을 치르듯 입을 열었다.
"나소요. 해적들이 술 마시는 데. 거기 회사 사람이 앉아 있습니다. 손님 행세를 하면서요. 진짜 이야기는 다 거기서 오갑니다."
동쪽 하늘이 붉어지고 있었다. 대니얼은 페레그린의 방향타를 떠올렸다. 자메이카가 아니라, 북쪽. 나소.
"조라. 침로를 잡아라." 그가 낮게 말했다. "답은 나소에 있다. 가서 직접 듣는다."
검은 이빨. 대니얼은 그 이름을 입안에서 굴리지 않았다. 이 사이에 낀 모래처럼, 씹으면 소리가 났다.
나소의 밤은 불에 그을린 냄새가 났다.
지난 사냥에서 뺏은 화약이 아직 손끝에 배어 있었다. 화약과 피와 젖은 밧줄. 그 냄새를 달고 그는 부두를 걸었다.
무너진 요새가 검은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스페인군이 버린 뒤 누구도 다시 세우지 않은 성벽. 그 그을린 돌과 돛천 천막 사이, 궤짝과 뒤집힌 보트 위에 널빤지를 얹은 술집이 있었다.
간판은 없었다. 간판이 필요한 자들은 여기 오지 않았다.
럼 냄새, 땀 냄새, 그리고 오래 씻지 않은 사람들의 냄새. 대니얼은 문지방 없는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섰다.
조라 케인이 뒤를 따랐다. 그녀의 손은 허리춤 권총에서 멀지 않았다. 포술장의 눈은 방 안의 각도를 재고 있었다. 어디서 총구가 나올 수 있는지, 어디로 몸을 던질 수 있는지.
"로치를 아는 사람을 찾는다." 대니얼이 낮게 말했다.
말이 떨어지자 몇몇 얼굴이 럼잔 뒤로 숨었다.
구석에 늙은 해적이 하나 앉아 있었다. 한쪽 눈이 백태로 흐렸고, 손가락 두 개가 없었다. 그는 대니얼을 오래 올려다보았다.
"검은 이빨." 늙은이가 이 빠진 입으로 웃었다. "그 이름을 아직도 쫓는 멍청이가 있군."
대니얼은 그 앞에 앉았다. 은화 한 닢을 널빤지 위에 놓았다. 늙은이의 성한 눈이 은화에 붙었다.
"코맥 로치." 대니얼이 말했다. "어디 있나."
늙은이는 은화를 집지 않았다. 대신 럼을 한 모금 삼켰다.
"자네, 아직도 로치가 해적인 줄 아나?" 늙은이가 목소리를 낮췄다. "그놈은 이제 해적이 아니야. 사슬 묶인 개지."
대니얼의 손이 잔 위에서 멈췄다.
"무슨 소린가."
"물수리." 늙은이가 그 단어를 뱉듯 말했다. 주위의 웅성거림이 한 뼘 잦아들었다. "발톱으로 물고기를 움켜쥔 문장. 그 회사가 로치의 목줄을 쥐고 있어."
조라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대니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기다렸다.
"로치는 이제 스스로 사냥감을 고르지 않아." 늙은이가 손가락 없는 손으로 허공을 그었다. "어느 상선을 덮칠지, 회사가 정해줘. 이 배는 침몰시켜라, 저 배는 살려둬라. '사고'를 주문받는 거지. 채권이 걸린 상회, 항로가 탐나는 상회… 그런 배들이 로치의 손에 '사고'를 당해."
대니얼은 오래 침묵했다.
그는 로치의 얼굴을 떠올렸다. 반란의 밤, 자신의 배를 빼앗고 부하 열둘을 노예상에게 팔아넘긴 그 웃음. 그 원한은 개인의 것이었다. 로치의 목을 따면 끝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칼끝이 겨누던 곳 뒤로, 더 큰 그림자가 서 있었다.
로치는 손이었다. 방아쇠를 당기는 손가락. 그 손을 부리는 것은 따로 있었다.
"회장이 있어." 늙은이가 속삭였다. "앰브로즈 그레일링. 런던, 암스테르담, 아바나에 지점을 둔 자. 로치는 그자의 사냥개일 뿐이야."
"증거는." 대니얼이 물었다.
"증거?" 늙은이가 캭 하고 웃었다. "여기 있는 놈 절반이 그 회사 물건을 나른 적 있어. 아무도 입을 안 열 뿐이지. 입을 열면 다음 '사고'는 자기 배니까."
조라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로치를 어디서 찾나."
늙은이의 성한 눈이 그녀를 훑고, 다시 대니얼에게 돌아왔다.
"보름달." 늙은이가 말했다. "보름달마다 그놈이 아바나 근해에 나타나. 회사 지점에서 다음 '주문'을 받으러. 뱃사람들 사이에선 아는 얘기야. 물수리한테 목줄 잡힌 개가 달을 보고 아바나로 간다고."
그는 마침내 은화를 집었다. 이 빠진 잇새로 깨물어 진짜인지 확인했다.
"충고 하나 하지." 늙은이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로치를 죽여봐야 회사는 다른 개를 사. 개는 얼마든지 있어. 자네가 정말 뭔가를 끝내고 싶다면… 목줄을 쥔 손을 봐야 해."
늙은이는 천막 사이로 사라졌다. 그을린 요새의 그림자 속으로.
대니얼은 럼잔을 비우지 않았다. 그저 손안에서 돌렸다.
복수. 그는 지난 몇 년, 그 단어를 로치 한 사람의 얼굴로만 그려왔다. 그놈만 죽이면. 그 목만 따면.
이제 얼굴이 흐려지고 있었다. 로치 뒤로 회사가, 회사 뒤로 항로가, 항로 뒤로 무너진 상회들이 줄지어 섰다. 엘렌 뒤부아의 몰락한 상회도, 어쩌면 그 줄 어딘가에 있을 것이었다.
원한이 개인에서 구조로 번졌다. 이건 한 사람을 죽이는 일이 아니었다. 손 하나를 자르는 일도 아니었다. 목줄을, 그 목줄을 쥔 손을 끊는 일이었다.
"페레그린을 정비해." 대니얼이 조라에게 말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물이랑 화약, 넉넉히."
조라가 그를 보았다. "어디로."
대니얼은 문밖을 보았다. 그을린 성벽 너머, 검은 수평선이 달빛을 받고 있었다. 다음 보름까지 며칠이 남았는지 그는 이미 세고 있었다.
"아바나."
그는 럼잔을 널빤지 위에 내려놓았다. 가득 찬 채로.
"사냥은 지금부터야."
항해장 조라 케인이 야간 당직을 넘겨받으러 올라왔을 때, 대니얼은 이미 갑판 위에 있었다.
아바나 앞바다. 달은 반쪽. 물빛이 검은 유리처럼 미끄러지고, 저 멀리 항구의 등불이 낮게 깔려 흔들렸다. 육지 냄새가 났다. 담뱃잎, 설탕 끓이는 단내, 진창. 그 아래로 언제나처럼 소금과 타르.
"또 안 주무십니까."
조라의 목소리는 낮고 무뚝뚝했다. 손에는 식은 커피 두 잔. 하나를 대니얼에게 내밀었다.
대니얼은 잔을 받았다. 손바닥에 온기가 겨우 남아 있었다.
"자는 놈이 사냥을 하나."
"사냥은 낮에 하고요. 밤엔 사람이 자야 사람이지요."
조라는 그의 옆 삭구에 기대섰다. 두 사람 사이에 말이 끊겼다. 나쁜 침묵은 아니었다. 페레그린에서 조라와의 침묵은 대화의 한 종류였다. 반년을 같은 갑판에서 굶고, 젖고, 화약 연기를 나눠 마신 사이. 대니얼은 이 사내가 등 뒤에 있으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핀치 영감 말입니다." 조라가 커피를 홀짝였다. "오스프리 회계 장부를 통째로 외운다는 그 노인. 정말 나소에 있을까요."
"있어."
"확신하시네."
"그런 종류의 인간은 숨을 곳이 뻔해. 사람 많고, 술 많고, 아무도 서로 이름을 안 묻는 곳." 대니얼은 항구 불빛 쪽으로 턱을 까딱였다. "저런 데."
바람이 방향을 틀었다. 돛이 낮게 울었다.
대니얼은 잔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입술을 대지 않았다. 밤이면 늘 이랬다. 낮의 사냥꾼은 계산하고 조준한다. 밤의 사냥꾼은 셈이 끝난 자리에 혼자 남는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늘 하던 것을 했다.
이름을 셌다.
톰 애슈. 리틀 네드. 갑판장 위컴. 대장장이 후. 쌍둥이 형제 조엘과 마커스. 늙은 셰이머스. 벙어리 핍. 요리사 오벨. 소년 선원 대니 — 저와 이름이 같아 웃곤 했던 아이. 그리고 팔 하나가 없던 포수 롱, 마지막으로 갑판을 밟았던 클레이.
열둘.
로치가 팔아넘긴 사람이 열둘이었다. 반란의 밤, 대니얼이 열병으로 선실에 누워 사경을 헤매던 사이, 코맥 로치는 배와 사람과 그 모든 이름을 노예상에게 넘겼다. 술값 계산하듯. 화물 넘기듯.
"또 세십니까." 조라가 조용히 물었다. 묻는 게 아니라 아는 목소리였다.
"버릇이야."
"열둘, 다 외우세요?"
"안 외우면." 대니얼은 목소리가 갈라지는 걸 느꼈다. "그놈들이 진짜로 사라지니까."
조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이 사내의 방식이었다. 위로하지 않고, 그저 곁에 서 있는 것.
로치. 검은 이빨.
한때 대니얼은 그자를 형제라 불렀다. 진심으로. 스페인 놈들 함포 아래서 서로를 물 밖으로 끌어냈고, 한 담요를 덮고 잤고, 마지막 비스킷을 반으로 쪼갰다. 로치의 웃음소리는 컸다. 대니얼은 그 웃음이 좋았다.
그런데도.
회한이 원한을 어지럽혔다. 대니얼이 미워하는 건 로치인가, 아니면 로치를 형제라 믿었던 스스로인가. 그가 죽이고 싶은 건 그 검은 이빨인가, 아니면 그 밤 선실에 누워 아무것도 못 한 자신인가.
밤바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밤바다는 원래 대답이 없다. 그래서 사냥꾼의 밤은 늘 혼자다.
"대장." 조라가 갑자기 몸을 세웠다. "북동쪽."
대니얼은 눈을 떴다.
수평선 위, 등불의 무리. 하나, 둘… 넷. 다섯. 일렬로 이어진 불빛이 아바나 항로를 따라 미끄러지고 있었다. 선단이었다. 그것도 규모가 있는.
대니얼은 삭구를 잡고 몸을 끌어올렸다. 야간경을 눈에 댔다. 렌즈 안에서 어둠이 뭉그러지고, 선두 배의 돛대 꼭대기가 잡혔다.
깃발.
물고기를 움켜쥔 발톱. 물수리.
오스프리 호송기였다. 회사의 상선 선단. 낮에는 저 정직한 깃발을 달고 항구를 드나들 것이다. 세금을 내고, 통관을 하고, 신사인 척.
"호송선단입니다." 조라가 낮게 말했다. "무장했겠는데요."
"그래."
대니얼은 렌즈를 후미 쪽으로 천천히 옮겼다. 선단의 맨 뒤. 등불 하나 없이, 어둠에 몸을 숨긴 배 한 척이 따라붙고 있었다. 돛이 검었다. 아니 — 검게 칠했다. 그리고 그 돛대 위에서, 반쪽 달빛을 받아, 다른 깃발이 펄럭였다.
검은 기.
대니얼의 손끝이 야간경 위에서 굳었다.
낮엔 회사 깃발. 밤엔 검은 기. 같은 선단이, 같은 물 위에서, 얼굴을 둘 가지고 있었다.
호송선단이 곧 해적선단이었다.
"조라." 그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다. "저 맨 뒤 배 돛대 좀 봐."
조라가 야간경을 받아 들었다. 한참을 들여다보던 사내의 어깨가 굳는 것을, 대니얼은 어둠 속에서도 알아보았다.
"저건…"
"오스프리가 해적한테 '사고'를 주문한다더니." 대니얼은 식은 커피를 뱃전 너머로 쏟아버렸다. "주문할 게 뭐 있어. 자기가 해적이면."
선단은 아무것도 모른 채, 검은 물 위를 미끄러져 갔다. 그 맨 뒤에서 검은 돛이 숨을 죽이고 따라붙었다.
대니얼은 야간경을 접었다. 심장이 낮고 무겁게 뛰었다. 원한도, 회한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뒤로 물러났다.
저 선단 어딘가에, 로치가 있을지도 몰랐다.
"항해장." 대니얼이 말했다. "닻 올릴 준비. 불은 켜지 마."
사냥꾼의 밤이 끝나고 있었다.
밤바다는 검었다. 대니얼은 페레그린의 뱃전에 팔을 걸치고, 아바나의 불빛이 수평선 끝에서 흔들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닷새째다. 호송선단을 그림자처럼 뒤쫓은 지가.
플류트 세 척, 프리깃 한 척. 깃발은 스페인 상선기(旗)를 달았으나, 조라가 망원경으로 확인한 뱃머리 조각에는 발톱이 물고기를 움켜쥔 문장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오스프리. 물수리.
"사냥감이 사냥꾼 흉내를 내는군." 조라 케인이 낮게 말했다. 포술장의 손은 이미 화승에 가 있었다.
대니얼은 대답하지 않았다. 저 선단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속도를 늦추고, 등불을 하나만 밝히고, 마치 미끼처럼—
그때였다.
우현 어둠 속에서 스쿠너 한 척이 미끄러져 나왔다. 돛을 반만 편 채, 등도 없이. 익숙한 실루엣이었다. 이롱델.
대니얼의 등줄기가 곤두섰다. "전투 준비. 조용히."
"쏠까요?" 조라가 물었다.
"아니. 저 배는 무장을 절반도 안 열었어. 싸우러 온 게 아니야."
이롱델은 사정거리 안으로 겁 없이 들어왔다. 뱃전에 등불 하나가 켜지고, 그 아래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엘렌 뒤부아. 잠복 사흘 전, 나소의 술집 뒷방에서 스치듯 마주쳤던 그 장부쟁이.
"하트 선장." 물 위로 목소리가 건너왔다. 낮지만 또렷했다. "총을 아끼세요. 오늘 밤 당신이 쏴야 할 건 내가 아니니까."
대니얼은 난간을 움켜쥐었다. "그쪽이 먼저 내 사정거리로 들어왔소. 이유를 대시오. 짧게."
"저 선단이 오늘 밤 '사고'를 낼 대상—" 엘렌이 이롱델의 갑판을 가볍게 두드렸다. "바로 이 배예요. 이롱델."
바람이 돛을 훑고 지나갔다. 대니얼은 잠시 그 말을 곱씹었다.
"확신하는 근거는."
"주문서를 봤으니까요." 엘렌의 목소리에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오스프리는 사고를 서면으로 주문해요. 날짜, 좌표, 화물, 그리고 '처리할 배'의 이름까지. 저 선단의 선장이 품에 넣고 다니는 종이 한 장. 나는 그게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요. 필적도, 봉랍의 문장도."
대니얼의 옆에서 조라가 숨을 죽였다.
미친 소리였다. 상선 하나가 제 발로 나타나, 자기를 미끼로 쓰라고 한다. 함정일 수도 있었다. 오스프리가 사냥꾼을 낚으려고 던진 또 다른 미끼.
하지만—
대니얼은 저 여자의 눈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눈. 겁먹은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오래 계산하고, 그 계산 끝에 자기 목숨을 판돈으로 올린 사람의 눈이었다.
"내 배를 미끼로 쓰세요." 엘렌이 말했다. "이롱델이 저 선단 앞을 지나가면, 저들은 반드시 물어요. 주문서에 이롱델의 이름이 적혀 있으니까. 저들이 이빨을 드러내는 순간—당신이 뒤에서 문다."
"그러다 그쪽 배가 먼저 가라앉으면."
"그럼 당신은 주문서를 손에 넣을 기회를 잃는 거고요." 엘렌이 짧게 웃었다. 웃음에 온기가 없지는 않았다. "서로 손해죠. 그러니 늦지 마세요, 사냥꾼."
대니얼은 오래 침묵했다.
코맥 로치가 배와 선원 열둘을 노예상에 팔아넘긴 그날 이후, 그는 누구도 믿지 않았다. 동맹이라는 단어는 그의 사전에서 오래전에 찢겨 나갔다. 낯선 여자, 낯선 배, 낯선 계획. 경계해야 할 이유가 열두 가지는 됐다.
그런데도.
주문서. 서면으로 주문된 사고. 오스프리의 손이 종이 위에 남긴 필적. 그것 하나만 손에 넣으면, 로치의 뒤에 누가 있었는지—그가 왜 그날 반란을 일으켰는지, 그 실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잡을 수 있었다.
그것이 그를 끌어당겼다. 경계보다 더 세게.
"조라." 대니얼이 낮게 불렀다. "포문은 열되, 불은 붙이지 마. 신호할 때까지."
"선장, 저 여자를 믿습니까?"
"아니." 대니얼은 이롱델의 등불을 응시했다. "안 믿어. 하지만 저 선단은 더 안 믿지."
그는 목소리를 물 위로 던졌다.
"뒤부아 양. 조건이 하나 있소. 주문서는 내가 먼저 읽는다."
"좋아요." 엘렌이 대답했다. "단, 읽고 나면 돌려주세요. 그 종이엔 나도 볼 게 있으니까."
두 배 사이의 어둠이 잠깐, 팽팽하게 당겨졌다.
멀리 선단의 등불이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대니얼은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심장이 오랜만에, 사냥 전의 그 서늘한 박동을 되찾았다.
오늘 밤, 미끼와 매복.
달빛이 없는 쪽에서 대니얼 하트는 자기 배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돛을 반쯤 접은 페레그린은 어둠에 몸을 담근 채 표류하듯 떠 있었다. 등불 하나 켜지 않았다. 갑판의 사내들은 숨소리마저 삼켰다. 대니얼은 뱃전에 손을 얹고, 반 마일 밖 물 위에 떠 있는 불빛 한 덩어리를 노려보았다.
이롱델.
엘렌은 미친 짓을 했다. 선미부터 뱃머리까지 등을 환히 켜고, 돛에 램프 빛을 받아 하얗게 부풀린 채, 외해 한복판을 느릿느릿 기어갔다. 낭트 선적 스쿠너. 밤바다에 던진 미끼. 살점을 발라 물 위에 흘린 피 냄새였다.
"멍청한 짓이오." 조라 케인이 낮게 말했다. 포술장의 손은 이미 도화선 옆에 놓여 있었다. "저 여자가 정말 물릴 줄 알고 저러는 거요?"
"물지." 대니얼은 짧게 답했다. "물수리는 낭트 배를 좋아하니까."
바람이 방향을 틀었다. 소금과 타르 냄새 사이로, 대니얼은 기다렸다. 사냥꾼의 시간은 늘 이랬다. 화약을 재고, 심지를 다듬고, 그 다음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오직 기다리는 것.
자정이 지났을 무렵, 물렸다.
어둠 속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미끄러져 나왔다. 등불 하나 없이, 검은 기를 단 채로. 슬루프 한 척과 그 뒤를 따르는 작은 브리간틴. 이롱델의 밝은 불빛을 향해 늑대처럼 붙어 들었다. 선두 함의 뱃머리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프랑스 말도 영국 말도 아닌, 그저 사냥의 고함이었다.
"조라." 대니얼이 속삭였다.
"보고 있소."
선두 함이 이롱델의 뒤꽁무니에 사정거리를 좁혔다. 놈들은 미끼만 봤다. 어둠 속에 웅크린 사냥꾼은 보지 못했다.
"돛 펴라." 대니얼의 목소리가 갑판을 훑었다. "전부.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페레그린이 깨어났다. 접혔던 돛이 바람을 삼키며 부풀었고, 슬루프의 날렵한 선체가 검은 물을 갈랐다. 매복한 곳에서 튀어나온 매. 놈들의 무방비한 옆구리를 향해.
"거리 좁혀라. 현측을 붙여."
거리가 줄었다. 백 야드. 오십. 이제 선두 함의 갑판에 선 그림자들이 보였다. 그중 하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뒤늦게, 너무 늦게, 어둠에서 튀어나온 두 번째 배를 보았다.
그 얼굴을 대니얼은 알았다. 검은 이빨.
"코맥 로치." 이름이 이 사이로 새어 나왔다. 삼 년 묵은 원한이 목구멍에서 쇳물처럼 끓었다. 배와 선원 열둘을 노예상에 팔아넘긴 손. 지금 그 손이 키를 잡고 있었다.
"조라, 지금이다. 키를 부숴라."
"현측 일제사격 준비!" 조라 케인의 외침이 밤을 찢었다.
페레그린의 옆구리가 선두 함의 선미와 나란히 섰다. 여섯 문의 포가 검은 아가리를 벌렸다.
"쏴라!"
밤이 무너졌다.
여섯 문이 동시에 불을 뿜었다. 화염이 갑판을 대낮처럼 밝혔다가 곧 화약 연기에 삼켜졌다. 쇳덩이가 물을 넘어 선두 함의 선미를 짓이겼다. 키가 박살 났다. 나무 파편과 비명이 함께 튀어 올랐다. 방향타를 잃은 슬루프가 물 위에서 멋대로 돌기 시작했다.
"갈고리! 붙여라!"
두 번째 배는 뒤에서 머뭇거렸다. 선두 함이 무너지는 꼴을 보고, 브리간틴은 바람을 안고 방향을 틀었다. 도망쳤다. 대니얼은 쫓지 않았다. 오늘 밤 그가 원한 건 저 배였다.
갈고리가 날았다. 나무가 나무를 물었다. 페레그린의 사내들이 고함과 함께 건너뛰었다. 교전은 짧고 사나웠다. 방향타를 잃고 절반이 화약 연기에 눈이 먼 자들에게, 매복에서 튀어나온 사냥꾼을 막을 힘은 없었다. 칼날이 부딪히고, 몇 번의 총성이 터지고, 그리고 조용해졌다.
대니얼은 마지막으로 건너갔다. 부서진 갑판을 지나, 연기와 피 냄새를 헤치고. 코맥 로치는 없었다. 혼란 속에 작은 보트를 내려 어둠으로 사라진 뒤였다. 대니얼은 이를 악물었지만, 쫓지 않았다.
로치는 도망쳐야 한다. 겁에 질려서. 다음을 위해.
그는 선실로 내려갔다.
선실은 좁고 눅눅했다. 깨진 램프가 바닥에서 마지막 기름을 태웠다. 대니얼은 그 빛으로 서랍을 뒤졌다. 해도, 나침의, 값나가는 것들. 그의 손이 멈춘 건 기름 먹인 가죽 주머니였다. 안에서 접힌 종이 한 장이 나왔다.
봉랍. 물수리 문장. 물고기를 움켜쥔 발톱.
대니얼은 그것을 펼쳤다.
*대상: 낭트 선적 스쿠너. 처리 후 잔금 지급. — A.G.*
램프 불이 흔들렸다. 대니얼 하트는 오랫동안 그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분노가 아니었다. 그가 느낀 건, 서늘한 확신이었다. 얼음물이 뼛속으로 스미는 것 같은.
낭트 선적 스쿠너. 이롱델. 엘렌의 배.
이건 우발적인 습격이 아니었다. 주문이었다. 누군가 돈을 주고 시킨 살인이었다. 그리고 서명이 있었다. A.G. 앰브로즈 그레일링. 오스프리의 회장.
"찾았군." 조라 케인이 뒤에서 물었다. "뭐요, 그게?"
"밧줄." 대니얼이 종이를 접으며 말했다. "그레일링의 목에 걸 밧줄."
그는 종이를 가슴 안쪽에 넣었다. 심장 위에.
로치를 잡는 것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그는 알았다. 검은 이빨의 목을 베어도, 오스프리는 또 다른 로치를 살 것이다. 항로를 사고, 채권을 위조하고, 낭트의 배들을 밤바다에서 지울 것이다. 로치는 손이었다. 손을 잘라도 몸통은 남는다.
이 서명이 법정에 서야 한다.
봉랍 한 조각이. 물수리 문장 하나가. 판사 앞에서, 증인들 앞에서, 그레일링의 얼굴 앞에서.
대니얼 하트는 부서진 갑판 위로 올라섰다. 동쪽 하늘 끝, 밤의 검은 수평선 너머로 아직 달은 뜨지 않았다. 그러나 며칠 뒤면 보름이었다. 그리고 보름달 아래에서, 그는 이 종이를 손에 쥔 채, 처음으로 칼을 뽑아야 할 상대와 마주해야 할 것이었다.
법정으로 가는 길은, 결코 조용하지 않을 테니까.
바다는 은빛으로 얼어붙어 있었다.
보름달이 수평선 위에 걸리자, 외해는 한 장의 두들겨 편 백랍판처럼 매끄러워졌다. 대니얼 하트는 페레그린의 뱃머리에 서서 그 빛을 노려보았다. 손잡이가 손에 익은 청동 망원경. 렌즈 안에서 달이 흔들렸다.
"각서는 여기라고 했지." 그가 낮게 말했다.
핀치가 통째로 외운 항로. 오스프리가 '사고'를 주문하던 밀회의 바닷길. 미끼의 밤에 놓친 실 한 오라기가, 이 은빛 판 위로 그를 끌고 왔다.
"북동쪽." 조라 케인이 포갑판에서 올라왔다. 화약 냄새를 몸에 밴 여자. "돛 하나. 검은색입니다."
대니얼은 망원경을 그쪽으로 돌렸다.
검은 브리간틴. 두 개의 마스트, 앞 것은 가로돛, 뒤 것은 세로돛. 달빛조차 삼키는 타르 먹인 선체. 뱃전에 걸린 초롱 하나가 붉게 흔들렸다.
가슴 밑바닥에서 무언가 천천히 데워졌다.
5년이었다. 코맥 로치가 배와 선원 열둘을 노예상에게 팔아넘긴 지. '검은 이빨'. 그 이름을 5년간 씹어 삼켰다.
"거리 좁혀. 바람 안고 붙는다." 대니얼의 목소리는 평평했다. 분노는 안쪽에서만 탔다. 겉은 얼음이어야 조준이 흔들리지 않는다.
페레그린이 물살을 갈랐다. 슬루프의 날렵한 삼각돛이 바람을 물고, 두 배 사이의 은빛이 좁아졌다.
그때, 검은 배에서 소리가 건너왔다.
확성 나팔. 쇠를 긁는 듯한 웃음.
"페레그린이냐! 그 낡은 관짝을 아직도 못 버렸군, 하트!"
로치의 목소리였다. 5년 전과 똑같은. 기름때 묻은 조롱.
"열둘의 값은 잘 받았다! 사내 하나에 여덟 냥, 계집은 열두 냥. 셈은 맞더냐?"
대니얼의 턱이 굳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대답 안 하나! 벙어리가 됐어? 그때 갑판에 두고 온 네 배짱은 어디 두고!"
케인이 곁에서 그를 살폈다. 대꾸는 없었다. 대니얼은 그저 망원경을 접었다. 딸깍, 청동이 맞물리는 소리.
"조라." 그가 말했다. "뒷돛대. 아래쪽 활대 이음매. 거기만 노려."
"쏘라는 신호는요."
"내가 준다."
페레그린이 사각으로 파고들었다. 로치의 브리간틴이 방향을 틀며 현측을 보이려 했다 — 그 반 박자, 뒷마스트가 달을 등지고 검게 솟은 그 찰나.
"지금."
포성이 밤을 찢었다.
네 문의 포가 동시에 토했다. 페레그린이 반동으로 옆으로 밀렸다. 화약 연기가 달빛 속에서 하얗게 피어올랐다. 대니얼은 눈을 감지 않았다. 연기 너머를 뚫어보았다.
우지끈.
나무가 비명을 질렀다. 검은 브리간틴의 뒷마스트가, 활대 이음매에서 꺾였다. 세로돛이 통째로 기울며 갑판으로 쏟아졌다. 밧줄이 채찍처럼 튀고, 로치의 선원들이 흩어지는 게 보였다.
"명중." 케인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열이 실렸다.
대니얼은 숨을 뱉었다. 이제 붙는다. 갈고리를 걸고, 갑판을 넘고, 5년을—
검은 배에서 무언가 터졌다.
포탄이 아니었다. 통이었다. 뱃전 너머로 던져진 역청과 젖은 짚의 통들이, 수면에 닿자마자 회색 연기를 토했다. 짙고 끈적한 연막. 순식간에 달빛이 지워지고, 검은 배가 그 뒤로 삼켜졌다.
"연막이다!" 누군가 외쳤다.
"쫓아!" 대니얼이 키잡이에게 손을 뻗었다. "저 안으로—"
"선장!" 항해장이 그의 팔을 붙들었다. "이 바다입니다. 여기, 각서에 적힌 그 여울. 눈먼 채로 들어가면 우리가 걸립니다."
대니얼은 멈췄다.
연막 속으로, 물 밑에 이빨을 숨긴 암초의 여울이 있었다. 로치는 알고 들어갔다. 제 손금처럼 아는 바다. 눈먼 추격자만 삼키는 함정.
연기가 걷혔을 때, 검은 배는 없었다.
수평선 한 귀퉁이, 절뚝이는 돛 하나가 멀어지고 있었다. 뒷마스트를 잃고, 앞돛만으로 비틀비틀. 상처 입은 짐승의 걸음.
대니얼은 그 뒤를 오래 노려보았다. 손아귀가 하얗게 되도록.
놓쳤다.
분함이 목구멍을 태웠다. 갈고리 코앞에서, 5년을 코앞에서. 그러나 그는 소리치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대신 그 절름발이 항적을 읽었다.
이상했다.
"항해장." 대니얼의 목소리가 다시 얼음으로 돌아왔다. "저 배, 어디로 가고 있지."
마튜랭 대신 케인이 나침반과 달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미간을 좁혔다.
"…외해입니다. 뭍이 아니라."
그랬다. 상처 입은 배라면 가장 가까운 뭍으로, 수리할 부두로 기어가야 옳다. 그런데 로치는 뱃머리를 육지에서 돌렸다. 텅 빈 외해로, 무언가에 이끌리듯.
대니얼은 그 항적의 각도를 머릿속에 새겼다. 냉정하게. 분함을 연료로 바꾸어.
"사슬 묶인 개는." 그가 중얼거렸다. "제 집으로 돌아간다."
케인이 그를 보았다.
"뭍의 부두가 집이 아니야." 대니얼이 망원경을 다시 폈다. 절름발이 돛이 향하는 그 빈 수평선. "저 바깥 어딘가에, 로치가 기어드는 굴이 있어. 오스프리가 '사고'를 접수하는 곳. 로치는 지금 상처를 안고 주인에게 보고하러 가는 거다."
그는 접힌 청동을 손안에 꽉 쥐었다. 달빛이 그 위에서 차게 미끄러졌다.
놓친 게 아니었다. 실을 놓지 않았을 뿐. 로치가 제 발로 굴의 위치를 그려주고 있었다.
"항로 유지. 거리 두고 따라붙어. 등불 다 꺼." 대니얼이 돌아섰다. 갑판의 사내들이 그의 얼굴을 보았다 — 얼음 밑에서 타는 무엇을.
"다음엔 쫓지 않는다."
페레그린은 등불을 끄고, 어둠에 몸을 담근 채 절름발이 항적을 삼켰다. 보름달이 두 배를 은실로 이었다.
"그 집 문 앞에서." 대니얼이 나직이 못 박았다. "기다린다."
검은 물 위로 안개가 낮게 깔렸다. 아바나의 밤은 럼과 타르 냄새로 걸쭉했다.
대니얼은 부둣가 창고 그늘에 서서, 조라가 펼친 종잇조각을 보고 있었다. 등불은 켜지 않았다. 달빛만으로 충분했다.
"사흘을 뒤졌습니다." 조라 케인의 목소리는 화약처럼 낮고 건조했다. "항만 관리소 장부에도 없고, 어느 해도에도 없어요. 그런데 있습니다."
손끝이 종이 위 한 점을 짚었다. 아바나 만 동쪽, 맹그로브 늪 뒤편. 어부도 밀수꾼도 얼씬 않는 구석.
"유령 부두." 대니얼이 나직이 되뇌었다.
"오스프리 전용이랍니다. 보름달마다 배가 든답니다. 짐을 부리고, 새벽 전에 빠져나간다고. 그리고—" 조라가 잠시 멈췄다. "호위선이 붙습니다. 프리깃급 한 척."
물수리 발톱. 대니얼은 속으로 그 문장을 떠올렸다. 코맥 로치가 그 아래로 기어들어 갔다는 건 이제 확실했다.
낮 동안, 그는 뭍에서 벽을 만났다.
회사 변호사 셋. 프릴 소맷단에 은반지를 낀 사내들이 총독부 응접실에서 웃으며 서류를 내밀었다. 소유권, 통행권, 사면장 사본. 종이 뒤에 또 종이. 대니얼이 로치의 이름을 꺼내자, 그중 하나가 물었다.
"증거가 있으십니까, 하트 선장? 없다면 이건 명예훼손입니다."
뭍에서는 놈을 건드릴 수 없었다. 종이의 성(城)이었다. 엘렌이라면 그 성벽을 장부로 허물었겠지. 하지만 대니얼의 무기는 종이가 아니었다.
그는 창고를 나와 만을 바라보았다. 방파제 너머, 검은 수평선.
거기서 답이 왔다.
"조라." 대니얼이 입을 열었다. "부두는 뭍이지. 변호사도 뭍에 있고. 총독의 병사도 뭍에 있어."
"예."
"그런데 부두 '앞바다'는?"
조라 케인이 고개를 돌렸다. 달빛에 그의 눈이 번득였다.
"공해입니다." 포술장의 입가가 천천히 굳어졌다. "누구의 뭍도 아닌."
"그리고 공해에서 해적기를 단 배를 잡는 건—" 대니얼은 페레그린이 정박한 쪽을 흘긋 보았다. 낡았지만 이빨은 성한 슬루프. "사냥꾼의 일이야. 면허가 만료됐어도, 세상 어느 법정도 검은 깃발을 든 배를 편들진 않아."
침묵. 파도가 방파제를 핥는 소리.
"놈이 깃발을 올리는 순간." 대니얼이 말했다. "그 순간이 법이 허락하는 순간이다."
덫을 놓는 자의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분노는 이미 오래전에 식어 단단한 쇠가 되었다. 이제 필요한 건 뜨거움이 아니라 정확함이었다. 언제, 어디서, 어느 각도로.
"호위선이 문젭니다." 조라가 현실을 짚었다. "프리깃 대(對) 슬루프. 정면으로는 무리예요."
"정면으로 안 붙어." 대니얼이 고개를 저었다. "호위선은 부두 안쪽을 지키겠지. 짐을 실은 배가 나오는 걸 지키느라. 하지만 로치가 짐을 부리고 '나올' 때—그때 놈은 바다 위에 혼자다. 앞바다, 좁은 수로, 밀물."
그는 조라의 종잇조각을 다시 짚었다. 맹그로브 사이 가느다란 물길.
"여기. 프리깃이 못 따라 들어오는 얕은 목. 여기서 기다린다."
조라 케인이 오래 그 점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열둘." 포술장이 말했다. 팔려 간 선원들의 수. 그 말 한마디로 충분했다. 두 사람 사이에 더 필요한 말은 없었다.
대니얼은 다시 수평선을 보았다. 그 어딘가, 지금 이 순간에도 로치는 자기 안전을 믿고 있을 것이다. 회사의 종이 성 안에서. 뭍의 변호사들 뒤에서.
그러나 짐을 부리러 가려면, 놈은 반드시 물 위로 나와야 한다. 종이는 바다까지 따라오지 못한다.
"준비할 게 많군." 대니얼이 중얼거렸다. 화약, 사슬탄, 얕은 물을 읽을 사람, 밀물 때를 아는 사람. 조라의 대포, 그리고 인내.
멀리 아바나 대성당의 종이 울렸다. 자정이었다.
대니얼은 부두를 등지고 걸었다. 발밑에서 널판이 삐걱였다. 그는 오늘 밤 처음으로, 아주 옅게, 웃었다.
다음 보름. 유령 부두 앞바다.
거기서 검은 이빨은 자기 무덤 위로 검은 깃발을 올릴 것이다.
달이 밝았다.
대니얼은 그 빛이 싫었다. 보름달은 사냥꾼의 편이 아니다. 물 위에 은빛 길을 깔아 배를 드러낸다. 그래서 그는 등불을 다 껐다. 페레그린은 불 하나 없이, 파도 속에 배를 눕히듯 엎드려 있었다.
돛은 절반만 접혔다. 선체는 유령 부두의 검은 그늘에 몸을 붙였다. 부두의 무너진 말뚝들이 물 밖으로 손가락처럼 솟아, 달빛을 잘게 부수었다. 그 부서진 그림자 속에 페레그린이 숨었다.
"장어처럼 조용히." 조라 케인이 낮게 읊조렸다. 포술장의 손은 이미 도화선 위에 있었다. "회장님, 손가락이 근질거립니다."
"쏘지 마라." 대니얼이 말했다. "포탄은 이름을 부르지 못해."
조라가 그를 흘긋 보았다. 무슨 뜻인지 묻지 않았다. 그저 손을 도화선에서 뗐다.
물결이 뱃전을 핥았다. 갯내와 썩은 밧줄 냄새. 멀리 나소 쪽에서 개 짖는 소리가 한 번, 그리고 침묵.
대니얼은 기다렸다. 기다림은 그의 오래된 기술이었다. 면허가 만료된 뒤로 그가 가진 것이라곤 이 슬루프 한 척과, 지워지지 않는 이름 열둘뿐이었다.
열둘.
그는 그 이름들을 세지 않으려 했다. 세면 밤을 넘길 수 없으니까. 하지만 오늘 밤은 셌다. 하나씩, 손가락 마디를 접듯이. 갑판장 윌, 어린 톰, 쌍둥이 형제, 노인 개러티… 코맥 로치가 반란의 대가로 노예상에게 팔아넘긴 사람들. 배와 함께 넘긴 게 아니라, 사람을 짐짝처럼 넘겼다.
"자정입니다." 마스트 위에서 견시가 속삭였다.
부두 안쪽에서 삐걱, 하고 큰 것이 움직였다.
브리간틴 한 척이 그림자를 밀며 나왔다. 두 개의 마스트, 앞은 가로돛, 뒤는 세로돛. 달빛이 뱃머리를 훑자 대니얼의 숨이 멎었다. 뱃전에 새겨진 이빨 자국 같은 흠집. 저 배를 그는 안다. 한때 그의 배였으니까.
그리고 그 순간이 왔다.
마스트 꼭대기에서 깃발 하나가 스르륵 내려갔다. 물수리 문장 ― 오스프리 상사의 회사기. 로치는 그 밑에서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회사의 개로.
그 자리에, 다른 깃발이 올라갔다. 달빛에도 새까만 천. 검은 기.
회사의 얼굴을 벗고, 해적의 얼굴을 쓴다. 자정을 넘겼으니 이제 사냥철이라는 뜻이었다.
"이제야 본색을 보이는군." 대니얼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온 배가 듣도록 말했다. "닻줄 풀어. 쐐기로 붙는다. 접현할 때까지 아무도 총을 쏘지 마라."
"아무도?" 조라가 되물었다.
"그자를 죽이면 이 밤은 끝나. 나는 이 밤이 끝나길 바라지 않아. 아침까지 이어지길 바라지. 법정 아침까지."
페레그린이 그늘에서 미끄러져 나왔다. 무음의 사냥개처럼.
로치의 배는 뒤늦게 그들을 보았다. 검은 물에서 검은 배가 솟았으니, 볼 수 있을 리 없었다. 고함이 터지고, 종이 울렸다. 하지만 늦었다.
페레그린은 쐐기꼴로 파고들어 브리간틴의 옆구리를 물었다. 나무가 나무를 씹는 굉음. 갈고리들이 밤하늘로 날아올라, 밧줄 끝에서 별처럼 반짝이다가, 상대의 뱃전을 콱 물었다.
"당겨!"
두 배가 신음하며 붙었다. 대니얼은 갈고리 밧줄을 밟고 건너뛰었다.
발이 로치의 갑판에 닿는 순간, 세상이 쇳소리로 가득 찼다. 검과 검, 도끼와 방패. 조라의 부하들이 함성을 지르며 쏟아졌다. 대니얼은 오직 한 사람만을 보았다.
갑판 뒤쪽, 조타륜 옆. 코맥 로치. 검은 이빨. 웃고 있었다. 이빨 사이가 정말로 검었다.
"하트 선장." 로치가 검을 뽑으며 말했다. "죽은 줄 알았는데."
"살려두더군. 네가 나까지 팔 시간이 없어서."
두 검이 부딪쳤다. 불꽃이 튀었다. 로치는 여전히 빨랐다. 하지만 대니얼은 더 오래 화가 나 있었다. 분노는 오래 묵을수록 차가워지고, 차가운 분노는 손을 떨게 하지 않는다.
밀고, 받고, 흘리고. 대니얼의 검이 로치의 손목을 스쳤다. 피가 달빛에 검게 번졌다. 로치가 비틀거리며 조타륜에 등을 붙였다. 검끝이 아직 대니얼을 겨누고 있었지만, 팔이 떨렸다.
대니얼은 그 목에 검을 겨눴다. 찌르면 끝이었다. 열두 번, 찔러도 모자랄 목이었다.
배 전체가 조용해졌다. 싸움이 멎었다. 로치의 부하들도, 조라의 부하들도,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로치가 씩 웃었다. "해. 이게 네가 온 이유잖아. 배 되찾으러."
대니얼은 검을 거두지 않았다. 하지만 찌르지도 않았다.
"배 때문이 아니다."
침묵.
"윌. 톰. 개러티. 브래넌 형제." 그는 이름을 불렀다. 하나씩, 자정의 파도 위에 올려놓듯이. "네가 짐짝처럼 팔아넘긴 열두 사람. 나는 그 이름을 여기서 끝내려고 온 게 아니야."
로치의 웃음이 흔들렸다.
"그 이름들을 법정에서 부르게 하려고 왔다. 판사 앞에서. 서기의 펜 아래서. 너는 죽는 게 아니라, 대답하게 될 거다." 대니얼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검을 버려라, 로치."
로치의 눈이 움직였다. 부하들, 붙은 배, 겨눠진 검. 셈이 끝나가고 있었다.
"죽여." 로치가 쉰 소리로 말했다. "차라리 죽여, 하트. 법정은… 재미없잖나."
"재미로 온 게 아니야."
긴 침묵이 흘렀다. 파도가 두 배를 밀었다 당겼다. 부러진 말뚝 사이로 달빛이 흘러들어, 로치의 얼굴을 비췄다. 처음으로, 그 얼굴에서 두려움이 보였다. 죽음이 아니라, 대답해야 한다는 두려움.
그리고 쨍― 하는 소리.
로치의 검이 갑판에 떨어졌다. 손잡이가 두어 번 튀고, 멈췄다.
"밧줄." 대니얼이 말했다. "손목부터. 상처는 싸매고. 이자는 살아서 나소를 지나 킹스턴까지 간다. 한 명이라도 이자를 몰래 죽이면, 내가 직접 그자를 목매단다."
조라 케인이 밧줄을 들고 다가오며, 처음으로 낮게 웃었다. "이름값 하시는군요, 회장님."
대니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갑판에 떨어진 로치의 검을 주워 뱃전 너머 검은 물에 던졌다. 첨벙, 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로치가 묶이는 동안, 대니얼은 내려진 회사기를 보았다. 물수리. 물고기를 움켜쥔 발톱. 로치는 톱니 하나에 불과했다.
그는 핀치의 말을 떠올렸다. 오스프리의 모든 서류에는 한 서명이 있다고. A. G.
물수리를 부린 손. 채권을 위조하고, 해도를 사재기하고, '사고'를 주문한 손.
대니얼은 묶인 로치를 내려다보았다. 이 입은 이제 그의 것이었다.
서명의 주인에게, 증언할 입이 필요하다.
검은 물이 창을 두드렸다. 밤새 내린 비가 포트로열의 지붕을 적시고, 법정 안의 촛불은 습기 먹은 심지 위에서 흔들렸다. 대니얼 하트는 피고석 맞은편, 함장 자리에도 방청석도 아닌 애매한 자리에 앉아 무릎 위에 두 손을 포갰다.
증인이자 원고. 사냥꾼이자 사냥당한 자.
법복을 걸친 판사가 서류를 넘겼다.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대니얼은 그 소리를 들으며 지난 보름달의 밤을 떠올렸다. 조라 케인이 포문 옆에서 했던 말. "이번엔 화약 없이 이기는군요, 함장." 그때는 웃지 못했다. 지금도 웃을 수는 없었다.
코맥 로치가 끌려 나왔다.
쇠사슬이 바닥을 긁었다. '검은 이빨'—그 별명을 만든 썩은 앞니가 촛불에 검게 번들거렸다. 한때 대니얼의 갑판에서 밧줄을 당기던 손. 열두 명을 노예상에게 팔아넘긴 손.
대니얼은 그 손을 보았다. 미움이 올라오길 기다렸다. 그러나 올라온 건 피로에 가까운 무엇이었다.
"피고는 반란과 인신매매 혐의를 인정하는가."
로치가 입을 열었다. 대니얼은 몸을 굳혔다. 발악을, 저주를, 침묵을 각오했었다.
"인정합니다."
방청석이 웅성였다. 대니얼조차 눈을 좁혔다.
로치의 목소리는 낮고 빨랐다. 살길이 그것 하나뿐임을 아는 자의 목소리. 교수대의 밧줄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자만이 낼 수 있는, 계산된 순순함.
"반란은 내 죄요. 선원 열둘을 판 것도 내 손이오." 그가 침을 삼켰다. "허나—주문한 건 내가 아니오. 물수리요."
법정이 얼어붙었다.
"물수리?" 판사가 안경 너머로 보았다.
"오스프리요. 발톱에 물고기를 쥔 문장." 로치가 쉰 소리로 웃었다. "'사고'를 주문했소. 하트 선장의 배가 항로에서 사라지도록. 값은 스페인 은화로 쳐서 받았고."
대니얼의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서기가 앞으로 나섰다. 사일러스 핀치가 넘긴 문서 뭉치—오스프리 전 회계사가 통째로 외웠다가 손으로 옮겨 적고, 엘렌 뒤부아가 장부와 대조해 진본임을 밝힌 그 종이들이었다.
"본 법정은 증거 문서를 낭독한다."
서기의 목소리가 방을 채웠다.
"'페레그린호의 항로 이탈 건. 처리 비용 계상. 승인, A.G.'"
A.G. 앰브로즈 그레일링.
방청석이 다시 술렁였다. 이번엔 소리가 더 컸다. 항구의 상인들, 선주들, 뱃사람들. 오스프리에게 항로를 빼앗기고, 채권을 위조당하고, 이유도 모른 채 무너진 사람들. 그들의 웅성거림 속에 대니얼은 자기 이름이 섞여 도는 걸 들었다.
대니얼은 눈을 감았다.
열둘. 조라 말고, 지금 이 법정에 앉지 못한 열둘. 어느 밤 갑판에서 사라진 얼굴들. 그동안 그는 그 밤을 자기 잘못으로 지고 다녔다. 방심했다고. 부하를 못 읽었다고.
이제 종이가 말하고 있었다. 그 밤은 사고가 아니라 주문이었다고. 값이 매겨진 거래였다고.
죄가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판사가 서류를 내려놓았다.
"코맥 로치. 반란과 인신매매는 명백하다. 그 죄는 교수대로 갚아야 마땅하다."
로치의 어깨가 떨렸다.
"그러나 본 법정은 피고의 증언이 더 큰 범죄의 실체를 드러냈음을 참작한다. 교수대를 면하고, 종신 노역에 처한다."
로치가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목숨을 산 자의 얼굴. 대니얼은 그 얼굴에서 승리도 패배도 읽지 못했다. 그저 살아남은 짐승이 거기 있었다.
판사가 이어 말했다. 목소리가 방 전체로 퍼졌다.
"본 법정은 오스프리 상사 카리브 지점에 대한 수사를 명한다. 아바나 지점의 장부와 서신을 압류하라. 또한—"
그가 잠시 대니얼을 보았다.
"—페레그린호에서 팔려 나간 선원들의 소재를 수색하고, 배상을 명한다. 대니얼 하트 선장의 면허와 명예를 복권한다. 문서에 기록된 그의 '항로 이탈'은 범죄의 피해였음을 법정이 인정한다."
복권.
대니얼은 그 단어를 속으로 굴려 보았다. 몇 년을 기다린 말이었다. 자메이카 총독부의 문턱에서 몇 번이나 되돌아 나왔던가. 만료된 면허장을 품에 넣고, 정박세를 못 내 항구 끝자리로 밀려나던 밤들.
그런데 막상 그 말이 떨어지자, 벅참은 폭죽처럼 터지지 않았다. 조용히, 물처럼 차올랐다.
정의는 요란하게 오지 않았다. 젖은 촛불과 긁히는 쇠사슬과 종이 넘기는 소리 사이로, 담담하게 제자리를 찾아왔을 뿐이다.
대니얼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법정 뒤편, 회색 외투를 입은 사일러스 핀치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옆으로 마튜랭 영감의 그림자도 보였다—엘렌이 보낸 눈이리라. 세 갈래의 길이 이 방에서 잠깐 겹쳤다는 걸, 대니얼은 그제야 알았다.
밖으로 나오자 비가 그쳐 있었다. 젖은 부두 냄새, 타르와 소금과 썩은 밧줄 냄새. 페레그린호가 항구 끝에서 돛을 접은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라 케인이 뱃전에 기대 서 있다가, 그의 얼굴을 보고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대신 손에 든 쪽지를 내밀었다.
"핀치가 지점 서신을 뒤지다 찾았답니다." 조라의 목소리가 낮았다. "함장. 열둘 중에—아홉의 소재가 잡혔습니다."
대니얼은 쪽지를 받아 들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홉. 카르타헤나의 설탕 농장, 아바나의 부두, 이름 모를 작은 섬. 살아 있는 아홉의 이름과 좌표가 거기 적혀 있었다.
그는 젖은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검은 물 너머, 아직 밝지 않은 새벽.
"닻을 올려라." 대니얼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데리러 간다."
검은 물마루가 이물을 두드렸다. 대니얼은 후갑판 난간에 팔을 걸치고, 소금기에 젖은 바람을 들이마셨다.
'페레그린'은 순풍을 받아 남서로 미끄러졌다. 몇 달 전과 같은 배, 그러나 같은 항해는 아니었다.
"선장."
조라 케인이 계단을 올라왔다. 포술장의 손에 접힌 종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바닷물에 절어 귀퉁이가 물러 있었다.
"나소를 지나던 상선이 넘겼습니다. 런던발 소식이라고."
대니얼은 종이를 받아 펼쳤다. 인쇄된 활자였다. 어느 상업 회보의 조각. 그는 천천히 읽었다.
*오스프리 상사, 파산 선고. 회장 앰브로즈 그레일링 체포.*
바람 소리가 잠시 멀어졌다.
그는 두 번 읽었다. 세 번 읽었다. 활자는 도망가지 않았다.
"무너졌군."
목소리가 제 것 같지 않았다. 조라가 곁에 섰다.
"포트로열의 증언이 먼저였다고 합니다. 주문서가 나왔다는군요. 누가 어느 배에 '사고'를 주문했는지, 값이 얼마였는지. 손을 드러낸 겁니다."
대니얼은 회보의 다음 줄을 짚었다. 낭트의 법정. 위조 채권의 셈이 통째로 풀렸다는 문장. 어느 여자의 장부가 재판을 이겼다.
'엘렌.' 그는 속으로 그 이름을 불렀다. 셈으로 무너뜨렸구나.
그리고 마지막 줄.
*아카데미가 출판한 「대서양 박물지」 제3권이 해당 항로의 실측 해도를 공개함으로써, 오스프리가 사재기한 '지식'의 상품 가치는 소멸했다.*
그는 낮게 웃었다. 웃음이 목에 걸렸다.
지식을 팔던 자들이, 지식이 공짜가 되자 팔 것이 없어졌다.
"에민이로군." 조라가 중얼거렸다. "그 젊은 측량사."
세 갈래였다. 장부와 총과 지식. 언젠가 물수리 문장 아래에서 얽혔던 세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같은 짐승의 목을 조른 것이다.
"그레일링은." 대니얼이 물었다.
"이게 압권입니다." 조라가 회보의 아랫단을 가리켰다. "제 회사가 위조한 해도를 믿고 도망쳤답니다. '접근 금지'라 적어 둔 여울로. 존재하지도 않을 암초를 피해 존재하는 여울에 처박혔다는군요. 배가 두 동강 났고, 젖은 채로 끌려 나왔다고."
대니얼은 회보를 내렸다. 수평선을 보았다.
제가 세상에 뿌린 거짓 해도에 제가 걸렸다. 이보다 정직한 최후가 있을까.
바람이 돛폭을 팽팽하게 당겼다.
그는 이 순간을 오래 기다렸다. 코맥 로치가 배를 훔치고 선원 열둘을 노예상에 팔아넘긴 그날 밤부터, 몇 해였던가. 원한은 그의 안에서 총알처럼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단단한 것이 손안에서 슬며시 풀렸다.
"열두 명." 그가 말했다. "전부 찾았나."
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가가 붉었다.
"아바나에서 둘, 카르타헤나에서 다섯. 킹스턴 부둣가에서 셋. 브리지타운에서 하나. 죽은 줄 알았던 놈들이 살아 있었습니다, 선장. 사슬은 풀렸고요. 오스프리 장부가 열리면서 노예상 거래까지 죄다 튀어나왔으니."
열하나였다.
"마지막 하나는."
조라가 뱃머리 너머를 눈짓했다.
"제 발로 오는 중입니다. 킹스턴에서 배를 얻어 탔다고. 사흘이면 여기 합류한답니다."
대니얼은 오래 말이 없었다.
늙은 항해사 하나가 돛대 밑에서 밧줄을 사리고 있었다. 갑판 아래에서 누군가 낮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짠 냄새, 타르 냄새, 젖은 삼밧줄 냄새. 배는 살아 있었다.
그는 조라를 보았다. 이 사내는 총을 함께 든 세월 내내 한 번도 그를 떠나지 않았다.
"조라."
"예."
"우린 뭐였지. 지난 몇 해."
포술장이 잠시 생각했다.
"사냥꾼이었습니다."
"그래." 대니얼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냥꾼이었지."
짐승은 쓰러졌다. 물수리는 제 발톱에 걸려 물에 처박혔다. 주문서가 손을 드러냈고, 판결이 수법을 벗겼고, 한 권의 책이 마지막 상품을 지웠다. 열둘은 살아 돌아온다.
사냥은, 끝났다.
그는 이 감각이 낯설었다. 이십 년을 겨눔의 자세로 살았다. 이제 겨눌 것이 없었다. 손이 텅 비었는데, 무섭지 않았다.
문득 그는 이 배가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원한이 키를 잡던 시절엔 방향이 하나뿐이었다. 로치가 있는 쪽, 오스프리가 있는 쪽. 이제 그 자리가 비었다. 그 빈자리에 바다가 통째로 밀려 들어왔다.
"선장. 이제 어디로 갑니까."
조라가 물었다. 습관 같은 물음이었다. 늘 목표가 있었으니까.
대니얼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수평선을 오래 바라보았다.
낭트의 그 여자는 지금 무엇을 셈하고 있을까. 새벽이라는 이름의 배를 몬다던 젊은이는 어느 섬의 해안선을 재고 있을까. 언젠가 세 척이 다시 한 항구에서 만난다면, 그때는 검은 깃발도 물수리 문장도 없이, 그저 바다 이야기를 하게 될까.
바람이 방향을 틀었다. 돛이 크게 부풀었다.
그는 문득, 겨눔이 아닌 다른 자세를 몸이 기억해 내는 것을 느꼈다. 팔을 뻗는 자세. 노를 잡는 자세. 키를 미는 자세.
"조라."
"예, 선장."
"닻을 올린 채로 두게. 사흘 뒤 마지막 하나가 오면—"
그는 말을 멈추고, 젖은 회보를 접어 품에 넣었다.
"그다음은 우리가 정한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조라가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웃음이었다.
수평선 끝에서 해가 기울고, 바다가 구릿빛으로 물들었다. 저 선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대니얼은 알지 못했다. 처음으로, 그 모름이 두려움이 아니라 초대처럼 느껴졌다.
사냥은 끝났다.
이제는 항해다.
그는 난간을 밀고 키 쪽으로 걸어갔다. 발밑에서 페레그린이 살아 있는 짐승처럼 물살을 갈랐다. 수평선 너머로, 아직 이름 붙지 않은 바다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즈미르의 밤은 향으로 먼저 온다.
에민은 언덕을 오르며 그 향을 하나씩 벗겼다. 부두의 소금기, 창고에 쌓인 무화과의 단내, 누군가 태우는 올리브 나무 연기, 그리고 그 아래 늘 깔린 바다의 쇳내. 도시는 등불로 얕게 빛나고, 만(灣)은 검게 잠들어 있었다.
관측소는 언덕 꼭대기, 무너진 옛 성벽 안에 있었다. 그의 것이 아니라 그가 빌린 것. 하지만 오늘 밤 별을 보는 사람은 그 하나였다.
"에민 씨." 니코가 계단 위에서 등불을 흔들었다. "런던에서 배가 들어왔어요. 아카데미 인장이 찍힌 게 왔습니다."
에민은 걸음을 멈췄다. 심장이 한 박자 어긋났다.
봉랍은 짙은 남색이었다. 그 위에 눌린 문장 — 펼친 책과 별 하나. 왕립 아카데미. 그는 손끝으로 밀랍의 결을 더듬었다. 뜯기 전에, 뜯는 순간이 지나가 버리는 게 아까워서.
"열어요?" 니코가 물었다.
"열자."
밀랍이 갈라지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현상 과제 공고. 「대서양 박물지: 해류·해안·생물의 기록」, 전 3권. 완결된 원고에 한하여 심사함. 기한은 향후 3년.*
에민은 종이를 두 번 읽었다. 세 번째는 소리 내어 읽었다. 니코가 듣도록.
전 3권. 그는 이미 두 권 분량의 관찰을 갖고 있었다. 지중해의 해류, 이즈미르에서 카디스까지의 해안선, 물고기와 새와 해초의 이름들. 하지만 대서양은 — 대서양은 여백이었다. 그가 한 번도 건너보지 못한 물.
"삼 년." 니코가 중얼거렸다. "가능해요?"
"가능하냐가 아니야." 에민은 조용히 웃었다. "가야 하냐지."
그는 창가로 갔다. 벽의 갈라진 틈으로 만이 내려다보였다. 저 아래 어딘가, 부두에 세헤르가 묶여 있었다. 브리간틴. 새벽이라는 이름의 배. 두 개의 돛대에 검은 밤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대서양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늘 그렇듯, 다른 이름 하나가 딸려 올라왔다.
하산 선장.
에민은 열두 살이었다. 스승은 표본선 잔단호를 몰고 이즈미르 항을 떠났다. 대서양의 서쪽, 아무도 제대로 그리지 못한 바다로. "여백을 채우러 간다." 그게 마지막 말이었다. 배는 돌아오지 않았다. 표본도, 해도도, 사람도. 십 년째 소식이 없다.
에민은 아직도 스승의 필체를 외운다. 표본에 붙이던 작은 종이 딱지. *미상(未詳).* 이름 모를 것에 스승은 그렇게 적었다. 부끄러워하지 않고. 모른다는 걸 적는 게 학문이라고 했다.
"에민 씨." 니코가 다가왔다. "표정이 이상해요."
"그리운 얼굴을 하고 있었나 보다."
책상 위에는 이미 짐의 절반이 나와 있었다. 육분의와 사분의, 놋쇠 나침반, 측연줄 한 타래, 기압을 재는 유리관. 그리고 잉크. 니코가 어제 항구에서 사 온 잉크 스무 병이 나무 상자 안에서 검게 빛났다.
"스무 병으로 될까요?" 니코가 물었다.
"삼 년 치 여백을 채우려면 모자랄지도." 에민은 병 하나를 들어 등불에 비췄다. "하지만 시작하기엔 충분해."
그는 다시 서한을 펼쳤다. 마지막 줄에 아카데미의 오래된 격언이 인쇄되어 있었다. 누가 처음 적었는지도 모르는 문장.
*세상은 아직 절반이 여백이다.*
에민은 그 아래 자신의 말을 얹었다. 소리 내지 않고, 마음속으로만.
여백은 겁이 아니라 초대장이다.
무섭지 않았다. 아니, 무서웠다. 대서양은 지중해가 아니다. 폭풍이 다르고, 해적이 다르고, 물의 깊이가 다르다. 하지만 무서움과 가고 싶음은 같은 자리에서 자란다는 걸, 그는 알았다. 스승도 그랬을 것이다. 잔단호의 갑판에 서서, 서쪽의 검은 수평선을 보며.
니코가 잉크 상자를 닫았다. "그럼 정말 대서양으로 가는 거예요?"
에민은 대답 대신 창밖을 오래 보았다. 만의 검은 물, 그 너머의 더 검은 바다. 별들이 하나씩 돋고 있었다. 항해자의 별. 스승이 가르쳐 준 이름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그를 붙들었다. 이제껏 놓치고 있던, 너무 단순해서 놓쳤던 생각.
십 년 전 잔단호도 이 항구를 떠났다. 같은 별을 보고, 같은 바람을 안고, 같은 서쪽으로. 스승은 아무렇게나 사라진 게 아니다. 그는 항해자였다. 항해자는 반드시 항적을 남긴다. 해류에, 해도에, 들른 항구의 장부에. 어딘가에.
에민은 책상으로 돌아가 낡은 공책을 펼쳤다. 십 년 전 스승이 남기고 간 마지막 항해 계획서. 잉크가 바랜 서쪽 항로. 그가 수백 번 들여다보고도 지도로만 읽던 선.
이번엔 다르게 읽혔다.
"니코." 그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박물지를 완성하는 길이랑, 스승님을 찾는 길이 — 같은 길일지도 몰라."
니코가 등불을 내려놓았다. "무슨 뜻이에요?"
"스승님의 항적을 따라가면." 에민은 바랜 선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서쪽으로, 대서양으로, 여백 속으로 뻗은 선. "박물지도, 진실도 — 둘 다 저 끝에 있어."
창밖에서 바람이 방향을 바꿨다. 서풍이었다. 세헤르의 돛을 부를 바람.
에민은 새벽빛 아래에서 눈을 떴다. 배 이름이 곧 시간을 말했다. 세헤르—새벽. 이즈미르를 떠난 지 여러 날, 에게 해의 물빛은 아직 익숙한 초록을 품고 있었다.
갑판에 나가자 니코가 이미 사분의를 들고 있었다. 놋쇠가 아침 해를 받아 뜨끈했다.
"선생님, 태양이 수평선을 밟기 직전입니다."
"기다려. 조급하면 눈이 거짓을 본다."
에민은 사분의를 받아 눈에 댔다. 해의 아랫자락을 수평선에 살며시 앉혔다. 숨을 멈추고, 배의 흔들림을 몸으로 세었다. 파도가 한 번 배를 들어 올렸다가 내려놓는 그 짧은 정점—거기서 각을 읽었다.
"삼십육 도 이 분."
니코가 석판에 받아 적었다. 에민은 시계와 항성표를 펼쳐 위도를 셈했다. 숫자가 손끝에서 자리를 찾아 앉을 때, 그는 언제나 작은 전율을 느꼈다. 하늘의 각도 하나가, 바다 위 자기 자리를 알려준다는 것. 신이 세상에 숨겨둔 문장을, 사람이 읽어내는 일.
"우리가 지금 여기 있다." 그는 해도의 한 점을 짚었다. "어제보다 정확하게."
해안선을 따라 항해하는 날엔 붓이 바빴다. 에민은 뱃전에 판을 걸고, 곶의 굴곡과 만의 깊이를 눈으로 재어 옮겼다. 어부의 낡은 해도엔 이 만이 그저 뭉툭한 혹처럼 그려져 있었다. 실제 해안은 손가락처럼 갈라져 작은 후미를 감추고 있었다.
"틀렸어." 그가 중얼거렸다. "이 만은 남쪽으로 더 파고들어. 얕은 여울이 여기, 그리고 여기."
니코가 측연을 던졌다. 밧줄의 매듭을 세며 수심을 외쳤다.
"세 길! ...두 길 반!"
에민은 그 숫자를 해안선 곁에 촘촘히 적었다. 언젠가 이 후미로 배를 몰 누군가가, 여울에 배를 찢지 않도록.
오후엔 바다가 선물을 주었다. 뱃전 그물에 낯선 물고기 한 마리가 걸렸다. 옆구리에 무지개처럼 번지는 비늘, 지느러미 끝이 실처럼 길게 늘어졌다.
"이런 건 처음 봐." 에민의 목소리가 아이처럼 들떴다. "니코, 색이 사라지기 전에 붓을."
그는 물고기가 숨을 놓기 전, 살아 있는 빛깔을 종이에 붙들었다. 비늘의 청록, 배의 은빛, 눈의 검은 구슬. 옆에 크기와 지느러미 수를 적고, 잡힌 위도와 수온을 덧붙였다. 죽은 표본은 색을 잃는다. 살아 있는 순간의 색은 오직 지금, 이 손만이 남길 수 있었다.
"박물지는 죽은 것들의 목록이 아니야." 그는 니코에게 말하듯, 스스로에게 말했다. "살아 있던 순간을 붙잡아 두는 거지."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 대서양으로 나섰을 때, 물빛이 바뀌었다. 초록이 물러가고, 깊고 무거운 감청이 배를 감쌌다. 에게 해의 다정함은 이제 없었다.
에민은 자기 해도첩을 펼쳐 보았다. 이즈미르에서 출발할 땐 여백이 대부분이었다. 지금은 해안선과 숫자들이, 작은 물고기 그림들이 여백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미답의 바다를 지날 때마다, 흰 공간이 줄었다. 그 줄어듦이 그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진이었다. 채워질수록 가벼워지는 종이라니.
문제는 돈이었다.
카디스에 정박했을 때, 선원들의 밀린 삯과 소금에 절인 고기값, 물통을 채울 비용이 에민의 얄팍한 지갑을 노렸다. 아카데미의 현상금은 3권을 다 완성해 심사를 통과해야 나온다. 그때까진 스스로 배를 먹여 살려야 했다.
니코가 걱정스레 물었다. "선생님, 이번 달은 어떻게 넘기죠?"
에민은 잠시 생각하다, 자기 기록을 사본으로 베꼈다. 새로 그린 카디스 앞바다의 해안선과 여울 표시, 위도표. 그는 그것을 들고 항구의 한 학자를 찾아갔다. 대학에서 나와 지도를 수집하는 늙은 사제였다.
사제는 사본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여울의 위치를 짚는 손가락이 떨렸다.
"이건... 시청 해도보다 정확하군. 얼마요?"
값이 정해졌다. 은화 몇 닢이 손에 떨어졌다. 물통을 채우고 고기를 살 만큼.
에민은 나오면서 저도 모르게 웃었다.
"지식이 밥을 사는 시대라니. 나쁘지 않아."
니코가 옆에서 눈을 반짝였다. "그럼 우리, 알아낸 만큼 부자가 되는 거네요?"
"알아낸 만큼, 그리고 나눈 만큼." 에민은 소년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었다. "숨겨두면 아무것도 아니야. 나눠야 값이 붙지."
그날 밤, 에민은 등불 아래에서 하산 선장을 생각했다. 표본선 잔단호. 10년 전, 이 대서양 어딘가에서 사라진 스승. 스승도 이렇게 여백을 채우다 어느 바다에 삼켜졌을까.
여백이 줄어드는 만큼, 스승에게 가까워지는 기분이었다.
카디스를 떠나 남서쪽으로, 마데이라 제도를 향할 때였다. 물통과 고기를 사러 잠시 들르려던 참이었다. 항구 도선사가 밧줄을 받으며, 지나가는 말처럼 던졌다.
"학자 양반, 소문 들었소? 마데이라 경매장에 물건이 나왔다더군. 난파선에서 건진 유품이라던데."
에민의 손이 멈췄다.
"난파선... 어느 배요?"
도선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나도 몰라. 다만 오래된 물건이라 하더이다. 표본 상자 같은 것도 있다던가."
표본 상자.
에민의 심장이 한 박자 늦게, 크게 뛰었다.
안개비가 걷힌 마데이라의 아침, 에민 카라는 경매장 뒤편 나무 계단에 서서 짠내와 곰팡내가 뒤섞인 공기를 들이마셨다.
푼샬의 잡화 경매장은 창고를 급히 개조한 헛간이었다. 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고, 젖은 밧줄 냄새와 타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벽을 따라 늘어선 것은 죄다 바다가 토해낸 잔해들이었다. 소금에 절어 흰 얼룩이 핀 궤짝, 이가 빠진 도자기, 녹슨 놋쇠 등불. 얼마 전 서쪽 암초에서 부서진 어느 이름 모를 배의 유물.
"난파선 물건은 값이 헐하답니다." 조수 니코가 낮게 속삭였다. "죽은 사람 손을 탄 물건이라고 뱃사람들이 꺼려서요."
에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눈이 이미 다른 곳에 붙들려 있었다.
측량 항해를 마치고 뭍에 오른 그는 표본을 담을 새 상자를 구할 셈이었다. 그저 그뿐이었다. 그런데 저 구석, 소금기에 검게 삭은 궤짝 더미 사이에서, 놋쇠 모서리 하나가 등불 빛을 되받아 둔하게 반짝였다.
심장이 먼저 알아보았다.
그는 사람들을 헤치고 다가갔다. 손바닥만 한 놋쇠 표본 상자. 경첩이 세 개, 모서리마다 덧댄 각쇠. 뚜껑에는 물결무늬 테두리. 스승이 손수 고안한 형태였다. 습기와 벌레로부터 표본을 지키려고, 하산 선장이 이즈미르의 놋갓장에게 특별히 주문해 만든 물건.
떨리는 손끝으로 소금 얼룩을 문질렀다. 뚜껑 안쪽, 작은 글씨가 드러났다.
*잔단호.*
숨이 멎었다.
십 년이었다. 표본선 잔단호가 대서양 어딘가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십 년. 폭풍이라 했다. 다들 폭풍이라 했다. 스승은 바다가 삼킨 것이고, 바다에게 이유를 묻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고.
그런데 그 상자가, 여기, 마데이라의 눅눅한 헛간에 있었다.
"에민 님?" 니코의 목소리가 아득했다.
경매가 시작되었다. 진행인이 상자를 집어 들고 심드렁하게 외쳤다. "놋쇠 함, 작은 것 하나. 자, 서 레알부터."
"1레알." 에민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여기 둘." 뒤편에서 골동품상이 손을 들었다. 놋쇠 값을 노린 자였다.
"닷 레알." 에민이 곧장 받았다.
몇몇이 흘긋 돌아보았다. 저 하찮은 함에 왜. 진행인의 눈이 반짝였다. 값이 뛰기 시작했다. 여덟, 열, 열둘. 골동품상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러섰다. 놋쇠 무게로 따지면 벌써 곱절이었다.
"열다섯 레알, 없습니까. 없어요. 이 젊은 학자분께." 나무망치가 탁 내리쳤다.
에민은 아카데미 경비로 쓸 은화를 세어 넘겼다. 손이 떨려 동전 하나가 바닥에 굴렀다. 니코가 주워 주었지만 그는 알아채지도 못했다.
상자를 품에 안고 헛간 밖으로 나왔다. 부두의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에민은 젖은 궤짝에 걸터앉아 걸쇠를 풀었다.
빈 상자였다. 표본은 오래전에 삭아 사라졌고, 바닥엔 검은 곰팡이와 마른 해초 부스러기뿐. 실망이 명치를 눌렀다. 그저 상자였다. 스승의 유령을 붙든 값비싼 빈 함.
그러나 손끝이 뭔가에 걸렸다. 바닥이 이상하게 높았다.
이중 바닥.
그는 단검 끝을 밀어 넣었다. 얇은 놋쇠 판이 딸깍 들렸다. 그 아래, 기름 먹인 방수포에 단단히 싼 꾸러미가 숨어 있었다. 소금물도, 십 년의 세월도 뚫지 못한 방수포.
손이 얼어붙었다. 니코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방수포를 벗기자 가죽 표지의 항해 노트가 나왔다. 눅눅했지만 글씨는 살아 있었다. 스승의 필체. 각도, 수심, 조류. 에민이 어린 시절 수없이 베껴 쓰던 그 반듯한 손글씨.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떨리는 손으로 책장을 넘겼다. 관측 기록이 이어지다가, 마지막 장.
거기서 글씨가 무너져 있었다. 반듯하던 필체가 갈겨 쓴 것으로. 급히, 손이 떨린 채로.
*물수리가 항로도를 사겠다고 왔다. 거절했다.*
에민의 손끝이 그 위에서 멈췄다. 물수리. 물고기를 움켜쥔 발톱. 어디선가 본 문장.
*저들은 바다를 감추려 한다 —*
숨이 가빠졌다.
*서쪽 무역풍대에서 다시 쓰겠다.*
노트가 손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폭풍이 아니었다. 바다가 삼킨 게 아니었다. 스승은 무언가를 거절했고, 그래서 쫓겼다. 십 년 동안 그가 믿어 온 이야기가 — 자연의 변덕이, 신의 뜻이라던 그 위로가 — 통째로 거짓이었다.
누군가 스승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에민 님." 니코가 겁먹은 목소리로 물었다. "물수리가… 뭡니까?"
에민은 대답할 수 없었다. 대신 노트의 마지막 문장을 다시 읽었다. 서쪽 무역풍대. 스승이 다시 쓰겠다고 한 곳. 저들에게서 바다를 되찾겠다고 벼른 곳.
그는 부두 너머, 서쪽으로 열린 수평선을 보았다. 대서양이 잿빛으로 번들거렸다. 저 바다 어딘가에서, 십 년 전, 한 사람이 진실을 감추려는 손에 맞서 홀로 항해했다.
에민은 노트를 가슴에 품고 일어섰다.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슬픔은 나중이었다. 지금은 방향이 필요했다.
"니코."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세헤르의 돛을 손질하라 일러. 물과 식량, 넉넉히."
"어디로 갑니까?"
무역풍이 등 뒤에서 불어왔다. 서쪽으로, 언제나 서쪽으로 배를 미는 바람. 스승이 십 년 전 붙잡으려던 바로 그 바람.
"서쪽." 에민이 수평선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무역풍을 타고, 서쪽으로."
돛폭이 바람을 받아 팽팽하게 부풀었다.
무역풍은 사람을 게으르게 만든다고, 하산 선장은 늘 말했다.
에민은 세헤르의 이물에 서서 그 말을 떠올렸다. 돛은 팽팽했고, 배는 스무 시간째 같은 각도로 기울어 미끄러졌다. 손을 대지 않아도 바람이 알아서 밀었다. 대서양이 거대한 벨트처럼 배를 실어 나르는 이 위도에서는, 키를 붙든 손조차 잠이 들 것 같았다.
"게을러지면 별을 잊는다."
그가 소리 내어 중얼거리자, 뒤에서 니코가 웃었다.
"또 선생님 흉내예요?"
"흉내가 아니라 인용이지."
두 사람은 갑판에 나무 사분의를 눕혀 놓고 정오의 태양을 기다렸다. 측량은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실상은 지루한 반복이었다. 같은 계산을 세 번, 다른 손으로 두 번. 위도를 재고, 모래시계로 시간을 세고, 배 뒤로 매듭 진 밧줄을 던져 속력을 헤아렸다. 매듭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감촉. 하루에 수백 번.
"에민 씨, 이거 다 적어서 어디다 쓰죠?"
니코가 잉크가 번진 손가락을 흔들며 물었다. 조수라기엔 그는 이제 친구에 가까웠다. 밤마다 갑판에서 함께 별을 세었고, 서로의 계산이 틀리면 놀렸다.
"어디에 쓰냐고?"
에민은 수평선을 가리켰다. 검고 곧은 선. 그 너머 어딘가에.
"아무도 못 그린 해도를 그리는 데 쓰지. 정확한 해류, 정확한 계절풍. 여기 이 자리에서 배가 며칠이면 자메이카에 닿는지, 열병이 도는 계절이 언제인지."
"그게 뭐 대단하다고 사람들이 감추겠어요."
에민은 대답 대신 웃었다. 대단하니까 감춘다. 그게 문제였다.
오스프리는 지식을 사재기한다. 정확한 해도가 퍼지면, 아무 상회나 안전한 항로로 배를 띄운다. 항로가 흔해지면 오스프리의 몫이 사라진다. 그래서 그들은 측량사를 사거나 침묵시키고, 정확한 도면을 태우고, 대신 미묘하게 틀린 해도를 유통시킨다. 여울이 없는 곳에 여울을 그리고, 있는 여울을 지운다.
'접근 금지'라는 거짓말로 바다를 울타리 친다.
에민은 그 반대편에 서 있었다. 아카데미의 「대서양 박물지」 3권. 그것이 완성되어 인쇄되면, 지식은 누구의 것도 아닌 게 된다. 한번 인쇄된 진실은 태울 수 없다. 천 권을 찍으면 천 개의 진실이 흩어진다.
감추는 자와 퍼뜨리는 자. 전선은 거기 그어져 있었다.
해가 기울자 별이 돋았다. 에민은 이 시간을 사랑했다. 낮의 지루함이 밤의 경이로 뒤집히는 순간.
"저기 저 별, 보이지." 그가 북쪽 낮은 하늘을 가리켰다. "저게 흔들리는 폭만 재면, 우리가 얼마나 남쪽으로 내려왔는지 알아."
니코가 고개를 젖혔다. "선생님도 이렇게 가르쳤어요?"
"…응."
스승의 이름이 나오자 목이 뻐근해졌다. 하산 선장. 표본선 잔단호. 10년 전, 이 무역풍대 어디쯤에서 사라졌다.
에민은 스승의 버릇 하나를 떠올렸다. 새로운 섬에 닿거나 중요한 측량점을 정하면, 하산은 늘 그 자리에 돌무더기를 쌓았다. 기준점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돌 밑에, 밀랍으로 싼 종이를 묻었다. 날짜와 좌표, 그날 잰 수치.
"왜 묻어요?" 어린 에민이 물었었다.
"해도는 잃어버려. 배는 가라앉고. 하지만 돌은 안 움직인다. 언젠가 누가 이 돌을 들추면, 내가 여기 있었단 걸 알게 되지."
지식은 태워도 땅에 묻힌 건 남는다. 스승은 그렇게 믿었다.
에민은 문득 궁금해졌다. 스승이 마지막으로 쌓은 돌무더기는 어디 있을까. 그 밑에 무엇이 묻혀 있을까. 잔단호가 사라진 자리에도, 그는 습관처럼 돌을 쌓았을까.
찾을 수 있다면. 그 돌 하나만 들출 수 있다면.
"에민 씨." 니코의 목소리가 달라져 있었다. "바람 냄새 나요?"
에민은 코를 들었다. 났다. 무역풍의 마른 소금 냄새 아래, 낯선 습기. 젖은 밧줄 같은, 먼 비의 냄새.
서쪽 수평선을 보았다. 별이 거기서 끊겨 있었다. 하늘의 절반을 무언가가 지우며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 멀지만, 분명히.
늙은 항해장이라면 알아봤을 것이다. 마튜랭이 여기 있었다면. 하지만 여기엔 에민과 니코, 그리고 갑판 아래 잠든 여섯 명뿐이었다.
기압계의 유리관 속 수은이 내려앉아 있었다. 아까보다 확실히.
"사흘." 에민이 낮게 말했다. "이 냄새는 하루 이틀로 안 끝나. 사흘은 갈 거야."
"돌아갈까요? 항로를 틀어서."
에민은 고개를 저었다. 이 위도에서 무역풍은 한 방향으로만 분다. 돌아가려면 바람을 거슬러 며칠을 낭비해야 했다. 그리고 폭풍은 그 며칠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아니. 통과한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단단하게 나온 것에 스스로 놀랐다. 신념은 그런 것이었다. 불안 위에 억지로 올려 세운 판자 같은 것.
"표본 상자부터 묶어. 사분의랑 기록은 밀랍 궤에. 젖으면 다 끝이야."
니코가 뛰어 내려갔다. 에민은 홀로 서서 다가오는 어둠을 마주 보았다.
선생님. 당신은 이런 밤에 사라졌습니까.
돌무더기 하나 없이, 아무도 들출 수 없는 바다 밑으로.
그는 밀랍 궤 안에 세 권의 원고를 넣고, 뚜껑을 단단히 눌렀다. 인쇄되기 전의 진실은 이토록 약했다. 물 한 방울에 번지고, 바람 한 줄기에 날아간다. 그것을 지키는 일이 자신의 몫이었다.
첫 빗방울이 갑판을 때렸을 때, 그는 이미 밧줄을 붙들고 있었다.
폭풍은 사흘 밤낮을 울부짖었다.
닻줄이 비명을 질렀고, 세헤르는 산을 오르내리듯 물벽을 넘었다. 에민은 언제 잠들었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짠물과 기도와 니코의 고함이 뒤섞인 사흘.
나흘째 새벽, 바람이 죽었다.
거짓말처럼 고요했다. 하늘은 씻긴 듯 창백했고, 바다는 아직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지만 더는 물지 않았다. 살았다. 살아남았다.
에민은 갑판으로 기어 올라와, 소금에 절어 뻣뻣해진 눈을 들었다.
그리고 위를 보았다.
주돛대가—세헤르의 심장이었던 그 큰 기둥이—중간에서 부러져, 젖은 돛과 엉킨 밧줄을 매단 채 갑판 위로 비스듬히 무너져 있었다.
바다는 다르게 짠 냄새를 풍겼다.
에민은 갑판 위에 무릎을 꿇은 채, 부러진 앞돛대의 그림자를 세었다. 세헤르는 밤새 이빨을 잃었다. 활대가 반으로 꺾이면서 돛이 물속으로 끌려 들어갔고, 니코와 둘이 도끼로 밧줄을 끊어 겨우 배가 뒤집히는 것을 막았다. 지금은 절름발이 브리간틴이 무역풍을 등지고 옆으로 흘렀다.
"물은요?"
니코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에민은 대답 대신 통을 두드렸다. 소리가 너무 가벼웠다.
"이틀."
한 마디로 충분했다. 이틀치. 그 뒤로는 하늘이 비를 주지 않는 한, 계산이 멈춘다.
에민은 셔츠 속에서 젖은 것을 꺼냈다. 신호탄. 화약이 눅눅해져 심지에 불을 붙여도 픽, 하고 죽었다. 세 발 중 세 발이 그랬다. 그는 그것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오래 바라보았다. 지식으로 세상을 읽겠다던 사람이, 젖은 종이 하나에 발이 묶였다.
측량 궤짝만은 마른 채였다. 그는 그 안에서 스승의 공책을 꺼냈다.
하산 선장의 마지막 관측치. 10년 전, 잔단호가 사라지기 직전에 적힌 위도와 해질녘의 각도. 숫자는 또렷했다. 별의 고도, 수온, 물빛의 변화까지. 그러나 에민은 그 숫자에서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었다.
'배가 어디서 출발해 어디로 흘렀는지는, 바람만으로는 못 푼다.'
역산이 안 됐다. 관측치는 배가 있던 자리를 말해줄 뿐, 그 자리로 배를 밀어 온 해류를 말해주지 않았다. 스승이 어느 물길에 올라탔는지 모르면, 숫자는 그저 죽은 점이었다. 십 년 동안, 그는 이 점 하나를 앞에 두고 벽에 부딪혔다.
수평선에서 흰 삼각형이 자랐다.
니코가 먼저 소리쳤다. 슬루프였다. 낮고 빠른 선체가 물을 가르며 곧장 다가왔다. 에민의 손이 굳었다. 오스프리일 수도, 그보다 못한 무엇일 수도 있었다.
돛에 그려진 것은 물수리가 아니었다. 매 한 마리. 페레그린.
배가 나란히 붙자, 뱃전 너머로 굵은 목소리가 넘어왔다.
"학자 양반, 배를 그렇게 반으로 접는 재주는 어느 아카데미에서 배웠나?"
포술장 조라 케인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에민은 대꾸할 기운도 없이, 그저 밧줄을 받았다.
대니얼 하트는 말이 없었다. 세헤르의 상처를 눈으로 훑고, 물통을 두드려보고, 젖은 신호탄을 집어 손끝으로 부수었다. 그리고 니코와 에민을 페레그린으로 옮겼다. 물과 마른 빵이 먼저 왔다. 계산보다 빠른 친절이었다.
밤이 되어서야 에민은 공책을 펼쳐 보였다.
"스승의 마지막 좌표입니다. 여기 있었다는 건 압니다. 그런데 여기로 어떻게 왔는지를 모릅니다. 해류를 모르면, 출발점을 되짚을 수가 없어요."
대니얼은 숫자를 오래 보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을 침에 적셔 밤바람에 들었다. 뱃전 밖 검은 물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이 계절, 이 위도에서 물은 서북서로 흐르네. 종이엔 안 적혀 있지. 하지만 여기서 스무 해 산 사람은 발바닥으로 아네."
"발바닥으로요?"
"해류라면 종이보다 뱃사람이지."
에민은 숨을 멈췄다. 그가 십 년 동안 채우지 못한 빈칸. 관측치라는 도착점에, 대니얼은 화살표 하나를 그려 넣었다. 방향과 속도. 되짚을 벡터.
에민은 떨리는 손으로 공책 여백에 각도를 적었다. 별의 고도에서 위치를 얻고, 거기서 서북서 해류의 표류를 하루씩 거꾸로 밀었다. 하루, 이틀, 사흘. 숫자가 서쪽으로 기어갔다.
"조건이 있네."
대니얼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다음엔 자네 해도를 빌리지. 정확한 놈으로. 오스프리가 가짜로 덮어버린 물길, 자네 궤짝 안에 진짜가 있을 테니까."
"드리겠습니다."
과학과 바다 감각이 한 탁자에서 만났다. 종이는 도착점을, 뱃사람은 물길을 내놓았다. 둘을 곱하자 비로소 역산이 돌기 시작했다.
에민은 밤을 새워 세 개의 관측치를 거꾸로 밀었다. 스승의 마지막 점, 그 전 달의 점, 그 전전 달의 점. 셋을 서북서 해류로 각각 되짚자, 흩어져 있던 선들이 지도 위에서 휘어졌다.
그리고 한곳에서, 세 선이 모이기 시작했다.
에민의 연필이 멈췄다. 그 점은 어떤 해도에도 이름이 없었다. 오스프리가 굵은 글씨로 '접근 금지'라 덮어둔, 빈 바다 한가운데였다.
검은 물이었다.
에민은 뱃전에 몸을 기대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세헤르가 미끄러지는 해면은 정오의 빛을 삼킨 채 어둡게 일렁였다. 상용 해도라면 지금 이 자리에 붉은 빗금이 그어져 있어야 했다. 암초 위험. 접근 금지.
"측심줄, 다시."
니코가 납추를 던졌다. 매듭이 규칙적으로 뱃전을 두드리며 풀려 내려갔다. 하나, 둘, 셋... 에민은 손가락 끝으로 매듭을 세며 숨을 죽였다.
"바닥 안 닿습니다요. 서른 길 넘게 풀렸는데."
서른 길. 에민은 반쯤 웃었다. 웃음이 아니라 서늘한 무언가가 등줄기를 타고 올라온 것뿐이었다.
지난밤, 그는 스승의 옛 항해일지를 역산했다. 잔단호가 마지막으로 발신한 방위와 해류의 표류를 거꾸로 감아, 하산 선장이 표본을 채집하던 좌표를 되짚었다. 숫자는 정직했다. 그리고 그 숫자가 가리킨 자리를 상용 해도 위에 올려놓았을 때, 붉은 빗금이 정확히 그 위를 덮고 있었다.
암초 위험. 접근 금지.
그래서 그는 왔다. 니코의 반대를 무릅쓰고, 세헤르의 뱃머리를 붉은 칠 한가운데로 돌렸다.
그런데 바다는 잔잔했다.
"에민 씨." 니코의 목소리가 떨렸다. "여기... 아무것도 없는데요."
"없지." 에민은 난간을 짚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아무것도 없어."
물은 맑았다. 바람은 순했다. 삼각 앞돛이 부드럽게 부풀었다. 위험이라고는 그림자도 없는, 항해자라면 누구나 반길 넉넉한 수로였다. 암초는커녕 조약돌 하나 걸릴 데가 없었다.
에민은 선실로 내려가 두 장의 해도를 나란히 폈다. 왼쪽은 카디스 골동품상 알바로에게서 얻은 낡은 사략선 해도. 오른쪽은 오스프리 상사의 문장이 찍힌 최신 상용판. 같은 해역이었다.
낡은 해도에는 이 자리가 그저 비어 있었다. 깨끗한 항로. 파란 물.
상용판에는 붉은 빗금이 그어져 있었다. 물수리 문장 바로 아래에.
손끝이 차가워졌다.
"위험해서 칠한 게 아니야." 에민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오지 말라고 칠한 거지."
니코가 사다리를 반쯤 내려오다 멈췄다. "예?"
"봐라, 니코." 에민은 두 해도를 손바닥으로 짚었다. "암초가 있어서 접근 금지를 그린 게 아니야. 여긴 지름길이다. 대양을 가로지르는 넉넉한 수로. 이 길을 알면 아바나까지 사흘을 벌어."
그는 상용판을 손끝으로 툭 쳤다.
"그래서 자물쇠를 채운 거야. 해도에다."
말로 뱉고 나니 오히려 선명해졌다. 오스프리는 항로를 사들인다고 했다. 채권을 위조하고, 상회를 무너뜨리고, 해적에게 사고를 주문하고. 하지만 그건 손에 잡히는 방식이었다. 이건 달랐다. 이건 지식 자체에 빗장을 지른 것이다.
정확한 해도가 퍼지면, 누구나 지름길을 안다. 누구나 사흘을 번다. 그러면 오스프리의 배만 빠를 이유가 없어진다. 그들의 독점은 더 빠른 배가 아니라, 남들이 모르는 길 위에 서 있었다.
그래서 붉은 칠을 했다. 암초라고 거짓을 그려, 온 세상의 항해자를 이 물길에서 쫓아낸 것이다. 오스프리의 배들만이 이 잔잔한 물 위로 은밀히 미끄러지도록.
에민은 펜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무섭기 때문이 아니었다. 진실이 이렇게 차갑고 정연하게 손안에 들어온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소문도, 추측도 아니었다. 측심줄이 서른 길을 풀리는 동안, 바다가 스스로 증언했다.
물수리는 사고를 주문할 뿐 아니라, 세상의 눈을 감긴다.
"에민 씨." 니코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스승님은요?"
에민은 고개를 들었다.
그 물음이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그는 스승이 왜 이 해역에서 사라졌는지 십 년 동안 몰랐다. 폭풍이라고, 암초라고, 늙은 선장의 마지막 무모함이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하지만 여긴 폭풍의 자리도, 암초의 자리도 아니었다.
하산 선장은 표본을 채집하다 이 지름길을 발견했을 것이다. 박물학자의 눈으로, 측량사의 손으로, 바다가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본 유일한 사람으로. 그리고 그것을 세상에 알리려 했을 것이다.
물수리가 자물쇠를 채운 바로 그 물길에서.
에민은 천천히 두 해도를 겹쳐 들었다. 낡은 진실과 새로운 거짓이 빛에 비쳐 하나로 포개졌다. 붉은 빗금 아래로 파란 물길이 비쳤다.
접근 금지, 라고 그들은 썼다.
하지만 이 좌표를 읽을 줄 아는 사람에게 그것은 경고가 아니었다. 여기 무언가 감출 것이 있다는 표시였다. 여기 오지 말라는 문장은, 진실을 아는 자에게는 정확히 반대로 읽혔다.
여기로 오라.
에민은 해도를 접어 품에 넣었다. 심장이 낮고 고르게 뛰었다. 서늘한 흥분이 손끝까지 번졌다. 십 년간 닫혀 있던 문 앞에, 그는 마침내 열쇠를 쥐고 서 있었다.
"니코." 그는 갑판으로 올라서며 말했다. "돛을 더 펴라. 침로 그대로."
"이 안쪽으로 더 들어가자고요?"
"들어가자." 에민의 눈이 수평선을 훑었다. "금지된 곳일수록, 저들이 감춘 게 크다는 뜻이니까."
바람이 방향을 바꿨다. 세헤르는 붉은 칠 한가운데를, 그러나 실제로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물길 하나를 가르며 나아갔다.
그리고 정오의 빛이 기울어 오후로 접어들 무렵, 앞쪽 수면 위로 무언가가 떠올랐다. 물에 반쯤 잠긴, 부러진 마스트. 삭아 내린 삭구. 뱃전에 남은 빛바랜 글자.
니코가 먼저 그것을 읽고, 숨을 삼켰다.
에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가 없었다. 십 년 만에, 그의 눈앞에 스승의 배가 떠 있었다.
저녁 해가 환초 안쪽 물을 데워 놓아, 석호는 녹은 유리처럼 잔잔했다.
에민은 세헤르호의 보트를 모래톱에 대게 했다. 노가 바닥을 긁는 소리, 발이 젖은 산호 모래에 빠지는 소리. 니코가 측량 사슬을 어깨에 걸치고 뒤따랐다.
"선생님. 여기, 정말 배가 다닐 수 있는 물길이 있었네요."
에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제 「금지된 좌표」에서 읽어낸 그 각도, 오스프리가 해도에 '접근 금지'라 새겨 지워 버린 그 위치 위에, 지금 그의 발이 서 있었다.
물새 떼가 한꺼번에 날아올랐다. 그 아래 하얀 모래톱에, 뭔가 검고 굽은 것들이 갈비뼈처럼 솟아 있었다.
배의 늑골이었다.
반쯤 모래에 묻힌 참나무 늑재. 세월에 검게 절었지만, 곡선은 아직 살아 있었다. 표본선 특유의 넓은 선복(船腹). 화물칸을 표본 수조로 개조한 배는 늑골 사이가 유독 넓다. 에민은 그것을 도면으로만 백 번 보았다.
잔단호였다.
"……잔단." 목소리가 갈라졌다. "잔단호다, 니코."
십 년이었다. 스승 하산 선장이 표본선을 끌고 대서양으로 사라진 지 십 년. 죽었다고들 했다. 이즈미르의 아카데미조차 그 이름을 명부에서 지웠다.
에민은 무릎을 꿇고 늑재에 손을 얹었다. 나무는 차가웠다. 그러나 그 곁에서, 그의 손이 멈췄다.
돌무더기.
늑골 뱃머리 쪽에, 사람이 일부러 쌓은 돌탑이 있었다. 산호 조각을 크기순으로 세 단, 정확히 북을 가리키는 판판한 돌 하나를 꼭대기에 얹은 것.
측량 기준점.
"이건……." 니코가 숨을 삼켰다. "우연이 아니에요."
"우연일 리가." 에민의 손끝이 떨렸다. "하산 선생님의 방식이야. 표본을 채집하기 전에 반드시 기준점부터 세우셨어. '위치 없는 관찰은 소문일 뿐이다.' 십 년 전 나한테 그 돌 쌓는 법을 가르치셨어. 세 단, 북을 가리키는 돌. 똑같아."
바람도 없는데 등줄기가 서늘했다.
죽은 사람은 돌탑을 쌓지 않는다.
에민은 돌탑 아래 모래를 손으로 파기 시작했다. 니코가 삽을 가지러 뛰었지만, 에민은 기다리지 못했다. 손톱 밑으로 산호 모래가 파고들었다. 젖은 모래, 마른 모래, 그리고 손끝에 닿는 단단한 것.
도기(陶器)였다.
방수 항아리. 밀랍으로 아가리를 봉한, 뱃사람들이 화약과 문서를 바닷물에서 지킬 때 쓰는 그 항아리. 에민은 그것을 두 팔로 안아 올렸다. 무거웠다. 안에 뭔가 들어 있었다.
밀랍을 칼로 뜯었다. 퀴퀴한 공기가 새어 나왔다. 그리고 그 안에.
관측 일지.
가죽 표지가 소금기에 하얗게 바랬지만, 항아리가 종이를 지켰다. 에민은 떨리는 손으로 첫 장을 넘겼다. 잉크는 옅어졌어도 그 필체. 획 끝을 살짝 튀기는 버릇, 위도 숫자를 유난히 크게 쓰는 버릇.
하산 선생님의 손이었다.
항아리 바닥에서 뭔가 또 굴렀다. 놋쇠 단추. 표본선 제복의 단추였다. 에민은 그것을 햇빛에 비춰 보았다.
녹슬지 않았다.
십 년을 바다 곁에 있었다면 놋쇠는 시퍼렇게 녹이 슬어야 한다. 그런데 이 단추는, 최근에 누군가 손으로 닦은 것처럼 매끈했다.
"니코." 에민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차분해졌다. "누가 이 항아리를, 얼마 전까지 열어 보고 있었어."
그는 일지의 마지막 기록을 찾아 페이지를 넘겼다. 넘기고, 또 넘기고. 빈 장 직전, 마지막으로 잉크가 묻은 페이지.
날짜를 읽는 순간, 에민의 심장이 멎었다.
작년이었다.
십 년 전 사라진 배. 십 년 전 죽었다던 사람. 그런데 이 일지의 마지막 글자는, 겨우 작년에 쓰였다.
"살아 계셔." 에민은 일지를 가슴에 끌어안았다. 눈이 뜨거웠다. "살아 계신다, 니코. 선생님은 죽지 않으셨어. 여기 계셨어. 작년까지, 바로 여기에."
니코가 뭐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석호 위로 붉은 해가 내려앉고 있었다. 늑골의 그림자가 모래 위로 길게 누웠다. 마치 배가 다시 일어서려는 것처럼.
에민은 일어섰다. 손등으로 눈을 닦고, 항아리에서 꺼낸 놋쇠 단추를 주먹 안에 꼭 쥐었다.
그렇다면 지금 어디 계신가.
에민은 일지를 펼쳐, 하산이 마지막으로 적어 둔 관측 좌표와 이 환초의 위치를 머릿속에서 겹쳤다. 표본선이 좌초했다면,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헤엄쳐 나갈 수는 없다. 그렇다면 배로. 아니면 해류가 데려다주는 곳으로.
그는 서쪽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석호의 물이 좁은 물길을 통해 바깥 대양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 흐름이 향하는 방향.
"기준점을 다시 세운다." 에민이 말했다. 목소리에 십 년 만에 처음으로 확신이 실렸다. "이 환초를 격자로 나눠서 이 잡듯 뒤진다. 표본 채집하던 대로.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니코가 사슬을 풀어 어깨에서 내렸다.
"만약 이 섬에 안 계시면요?"
에민은 물길이 대양으로 열리는 그 좁은 목을 응시했다. 해류가 시작되는 곳. 해류가 끝나는 곳.
"이 환초가 아니면." 그가 놋쇠 단추를 다시 한번 꽉 쥐었다. "해류가 닿는 다음 섬이야."
붉은 해가 물길 너머로 완전히 잠겼다. 어둠이 밀려오기 전에, 에민은 첫 번째 돌을 집어 들었다.
수색이 시작되었다.
항아리처럼 부푼 만(灣)의 안쪽, 모래는 잿빛이었다.
에민은 뱃머리가 자갈에 긁히는 소리를 들으며 물속으로 뛰어내렸다. 종아리를 감는 바닷물이 서늘했다. 그는 젖는 것도 잊고 섬을 올려다보았다.
이름 없는 섬. 어떤 해도에도 점 하나 없는 곳. 오직 잔단호의 부러진 늑재(肋材)에 새겨져 있던 방위각만이 그를 이리로 이끌었다.
"니코, 표본통은 놔둬. 나중에."
"선생님, 하지만—"
"나중에."
에민은 이미 모래톱을 건너고 있었다. 발밑에서 마른 해초가 부스러졌다. 갈매기도 없이 고요한 섬이었다. 바람이 종려나무 잎을 스치는 소리만 사각사각.
그리고 냄새. 그는 걸음을 멈췄다.
탄내였다. 나무를 태운 냄새. 오래되었지만 분명한.
*여기 사람이 있었다.*
그는 냄새를 좇았다. 방풍림 안쪽, 바위 그늘에 검게 그을린 자리가 있었다. 돌로 둥글게 쌓은 화덕. 그 안에 식은 재와 숯. 에민은 무릎을 꿇고 숯 하나를 집어 손끝으로 비볐다. 부슬부슬 검은 가루가 번졌다.
*비를 맞지 않았다. 최근이다.*
"선생님!"
니코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갈라졌다. 소년은 화덕 너머 검은 현무암 벽 앞에 얼어붙어 있었다.
에민이 다가갔다. 그리고 숨을 멈췄다.
바위에 화살표가 새겨져 있었다. 돌로 긁어 판 거친 선. 그 옆에, 알파벳 하나.
**H.**
에민의 손끝이 저절로 그 홈을 더듬었다. 획의 각도, 아래로 꺾이는 습관. 십 년 전, 이즈미르의 부두에서 스승이 표본 상자마다 새기던 바로 그 'H'.
"하산 선장님…"
목이 메었다. 그는 이 알파벳 하나를 찾아 삼 년을 대서양 위에서 떠돌았다. 아카데미의 현상 과제도, 「대서양 박물지」 세 권의 꿈도, 결국은 이 순간을 위한 핑계였는지 모른다.
*살아 계셨다. 이 섬에서, 불을 피우고, 이 화살표를 남기셨다.*
화살표는 만의 북쪽, 바다 너머를 가리키고 있었다.
에민은 눈물을 삼키고 방위를 읽으려 했다. 그때 니코가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선생님. 저것 좀…"
소년의 손가락이 화덕 옆 축축한 흙바닥을 가리켰다.
발자국이 있었다.
에민은 처음엔 자기들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자기 발을 나란히 대어 보았다. 발자국이 그의 것보다 한 뼘은 컸다. 그리고 밑창. 부드러운 맨발이나 낡은 신이 아니었다. 뒤축이 깊고 각진, 굽 높은 장화였다.
*뱃사람의 것이 아니야. 선원은 갑판에서 저런 굽을 신지 않아.*
그는 발자국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화덕 주위를 돌고, 바위 앞에 오래 머물렀던 자국. 누군가 이 'H'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에민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장화 자국은 젖은 흙 위에 또렷했다. 화덕의 숯보다도 새것이었다. 하루, 길어야 이틀.
"우리보다 먼저 왔어."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낮아졌다. 니코가 겁먹은 눈으로 그를 보았다.
"누가요? 다른 표본선이…?"
"아니."
에민은 천천히 일어섰다. 손바닥에 밴 숯 가루를 바지에 문질렀다. 낭트에서 엘렌이 보여 준 위조 채권 다발, 대니얼이 말하던 물수리 문장, 지식을 통째로 사재기한다는 그 카르텔.
*오스프리.*
퍼즐이 맞물리는 소리가 머릿속에서 났다.
"저들도 스승님을 찾고 있어. 하지만 우리처럼 만나려는 게 아니야."
"그럼요?"
"지우려는 거야."
에민은 바위의 'H'를 다시 보았다. 하산 선장은 십 년 전, 오스프리가 항로를 훔치기 시작하던 그 무렵에 사라졌다. 정확한 해도를 그릴 줄 아는 사람.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사람. 회사가 '접근 금지'로 위조해 둔 바다에, 진짜가 무엇인지 아는 유일한 산 증인.
*스승님은 오스프리가 가장 없애고 싶어 하는 증거야. 살아 있는 증거.*
그래서 화살표를 남기셨다. 쫓기면서도, 다음 섬으로 흔적을 이으며. 누군가 자신을 좋은 뜻으로 찾아오기를 바라며. 아니면—추격자에게서 한 발이라도 앞서가려는 필사의 이정표.
에민의 손이 떨렸다. 초조가 명치를 조였다.
*우리가 늦었다면. 저 장화가 이미 스승님을 따라잡았다면.*
아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화살표가 아직 여기 있다. 저들이 지웠어야 할 표식이 남아 있다. 그 말은, 저들도 아직 다음 섬을 못 찾았다는 뜻. 이 흔적을 못 읽었거나—읽고도 방위를 틀렸거나.
*아직 경주는 끝나지 않았다.*
"니코." 에민의 목소리가 단단해졌다. "육분의랑 나침반, 지금 당장. 물통도 채워. 표본은 됐어."
"선생님, 세헤르호는 물때가—"
"기다려 줄 거야. 마지막 만조까지 두 시간. 그 안에 방위를 딴다."
그는 다시 화덕 옆에 쪼그려 앉아 장화 자국을 살폈다. 밑창의 각진 모서리. 뒤축에 박힌 작은 못 자국이 반달 모양으로 찍혀 있었다. 그는 그것을 눈에 새겼다. 언젠가 이 발의 주인을 만난다면, 알아볼 수 있도록.
바위로 돌아가 화살표의 각도를 육분의로 쟀다. 북북서. 손끝으로 수평선을 더듬듯, 그 선을 바다 위로 연장했다.
멀리, 아지랑이 너머. 물빛과 하늘이 만나는 자리에 희미한 얼룩 하나가 떠 있었다. 또 다른 섬. 아니면 구름. 눈을 가늘게 떠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산 선장의 화살표는 분명히 그곳을 가리켰다.
에민은 육분의를 접었다. 심장이 뛰었다. 두려움과 결의가 같은 박동 속에 뒤섞였다.
"세헤르호로. 지금."
니코가 표본통을 내던지듯 짊어지고 물가로 달렸다. 에민은 마지막으로 'H'를 손끝으로 쓸었다. 스승의 습관이 밴 그 홈을. 십 년의 침묵이 밴 그 한 획을.
*이번엔 제가 먼저 닿겠습니다.*
그는 돌아서서 뛰었다. 잿빛 모래가 발밑에서 튀었다.
브리간틴의 삼각돛이 바람을 물었다. 세헤르—새벽이라는 이름의 배가 뱃머리를 북북서로 돌렸다. 아지랑이 속 희미한 얼룩을 향해. 저들보다 먼저 닿아야 할, 세 번째 섬을 향해.
수평선 끝에서, 그 얼룩이 아주 천천히, 형체를 얻어 가고 있었다.
검은 이빨의 물길을 빠져나온 지 사흘째, 세헤르는 무역풍대의 남쪽 가장자리를 더듬고 있었다.
에민은 새벽마다 갑판에 나왔다. 습관이 아니라 예감이었다. 하산 선장이 남긴 마지막 항해 일지의 끝자락 — "세 번째 섬, 연기로 나를 찾으라" — 그 한 줄이 열흘 내내 그의 잠을 갉아먹었다.
첫 번째 섬은 새똥으로 하얗게 뒤덮인 바위였다. 두 번째 섬은 산호가 배를 씹으려 든 죽은 환초였다. 그리고 세 번째.
"니코." 에민이 낮게 불렀다. "안개 걷힌다."
조수 니코가 눈을 비비며 다가왔다. 열넷의 소년은 아직 잠이 덜 깬 얼굴이었다.
무역풍이 밤새 몰아온 안개가, 섬의 어깨 위에서 서서히 벗겨지고 있었다. 초록의 능선, 검은 현무암 해안, 그 위로—
에민의 손이 멎었다.
가느다란 연기 기둥. 곧게, 흔들림 없이, 아침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불이야." 니코가 속삭였다. "사람이 피운 불."
번개 맞은 나무의 연기는 저렇게 곧지 않다. 저건 누군가 밤새 지킨 화덕이었다. 손이 있었다. 의지가 있었다.
에민은 제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십 년. 표본선 잔단호가 대서양의 어느 이름 없는 물살 속으로 사라진 지 십 년이었다. 아카데미는 하산을 죽은 자로 기록했고, 이즈미르의 항구는 그의 이름을 잊었다.
"보트를 내려." 에민의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간다."
해안에는 배 한 척 없었다. 그러나 물가에 조약돌로 눌러 놓은 그물이 있었고, 말리는 물고기가 있었고, 오두막이 있었다.
유목으로 지은 오두막. 파도가 실어 온 판자들을 잇고, 부서진 선체의 늑재를 기둥 삼은 집. 문이 없는 입구로 에민은 들어섰다.
그리고 걸음을 멈췄다.
서가였다. 유목을 짜 맞춘 선반 위에, 소금기에 뒤틀린 책들이 등을 맞대고 서 있었다. 라틴어. 아랍어. 네덜란드어. 그리고 원고 뭉치 — 큼직한 소라 껍데기와 조개껍데기로 눌러 놓은, 손으로 쓴 종이의 산.
에민은 떨리는 손으로 맨 위 장을 들췄다.
새의 그림이었다. 부리의 각도, 날개깃의 수, 서식하는 만의 위도까지 적힌 세밀화. 그 필체를—
"이 필체를 안다." 에민이 중얼거렸다. 목이 메었다. "이건 선생님의 손이야."
"늦었구나, 에민."
목소리가 등 뒤에서 왔다.
에민은 돌아섰다.
문 앞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십 년 치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온, 볕에 그을려 가죽이 된 사내. 여윈 뺨. 그러나 그 눈은—
에민이 열넷에 이즈미르의 부두에서 처음 올려다본, 바로 그 눈이었다.
"선생님." 말이 부서졌다. "하산 선생님."
"많이 컸다." 하산이 갈라진 소리로 웃었다. "네가 올 줄 알았어. 다른 놈들은 몰라도, 너는."
에민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절을 해야 하나, 손을 잡아야 하나. 결국 그는 아이처럼 몇 걸음을 달려가 노인의 뼈만 남은 어깨를 끌어안았다. 소금과 연기와 늙은 나무의 냄새가 났다.
"살아 계셨군요. 십 년을. 여기서."
"항로를 봤거든." 하산이 그의 등을 두드렸다. "물수리 문장을 쓰는 자들이 어떻게 해도를 지우는지를. 나는 그걸 종이에 담았다. 저기 저 원고 전부가—"
노인이 문득 말을 멈췄다.
그의 눈이 에민의 어깨 너머, 문밖의 수평선에 못 박혔다.
에민은 그 시선을 따라 돌아섰다.
환초의 입구, 아침 바다 위로. 삼각돛 두 폭이 물수리처럼 미끄러져 들어오고 있었다. 뱃머리에 걸린 검은 삼각기. 발톱에 물고기를 움켜쥔 문장.
"오스프리." 에민의 입에서 피가 가시는 소리가 났다. "경비선입니다."
"연기를 봤겠지." 하산의 얼굴에서 재회의 온기가 삽시간에 걷혔다. 십 년을 숨어 산 자의 계산이 그 자리를 채웠다. "저들도 나를 십 년째 찾고 있었으니까. 원고를. 어서, 원고를 싸라. 한 장도 남기지 마."
에민은 이미 조개껍데기를 걷어내고 있었다. 소년 니코가 셔츠를 벗어 종이를 담았다.
"보트로!"
세 사람은 원고를 안고 달렸다. 물가의 자갈이 발밑에서 튀었다. 뒤에서 오두막의 화덕이, 십 년을 지켜 온 그 작은 불이, 주인을 잃고 홀로 타올랐다.
세헤르는 환초 안쪽에 닻을 내리고 있었다. 에민이 소리쳤다.
"닻을 걷어! 돛을 펴! 지금!"
브리간틴이 신음하며 깨어났다. 앞돛대의 가로돛이 바람을 물었다. 뒤돛대의 세로돛이 팽팽해졌다. 세헤르 — 새벽 — 이 환초의 좁은 수로를 향해 뱃머리를 돌렸다.
경비선은 입구를 막고 있었다. 그러나 오스프리의 항해사는 이 환초를 몰랐다. 산호의 이빨이 어디 숨었는지, 썰물의 물길이 어디로 트이는지.
에민은 알았다. 그는 측량사였다. 사흘 밤을 이 환초의 수심을 재며 보냈다.
"좌현으로 두 뼘! 저 흰 물거품 안쪽으로 붙여!"
세헤르가 산호 벽을 스치듯 지났다. 뱃전에서 한 뼘 밖, 물속에서 산호가 배를 씹으려 아가리를 벌렸다가 헛되이 닫혔다.
경비선이 쫓아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둔중한 소리. 오스프리의 슬루프가 물속의 산호에 옆구리를 들이받았다. 배가 기우뚱 멈춰 섰다.
수로를 빠져나온 것은, 좁은 물길의 경주에서 이긴 것은.
새벽이라는 이름의 배였다.
바다 냄새는 여기에도 있었다.
에민은 아카데미 대강당의 높은 창을 올려다보았다. 이즈미르의 늦여름 볕이 유리를 통과해 대리석 바닥에 길게 누웠다. 항구의 소금기와, 마당의 협죽도 냄새와, 오래된 책의 곰팡내가 한데 섞여 있었다. 낯익은 냄새였다. 열네 살에 하산 선장을 따라 처음 이 문턱을 넘던 날에도 꼭 이랬다.
강단 위에는 세 권의 책이 놓여 있었다. 초록빛 가죽으로 제본한 「대서양 박물지」. 1권과 2권은 이미 몇 해 전에 봉정했다. 오늘은 3권이었다.
"떨리나?"
곁에서 니코가 속삭였다. 조수는 예복이 어색한지 자꾸 소맷부리를 당겼다.
"떨리지 않아." 에민은 대답했다. "이상하지. 하나도."
거짓이 아니었다. 세 번째 섬에서 피어오르던 연기를, 오스프리가 태워 없애려던 표본 창고를 떠올리면 지금도 손이 서늘해졌다. 그러나 이 강당 안에서는 아니었다. 여기서는 불이 아무것도 태우지 못했다.
학감이 이름을 불렀다.
에민은 단상에 올랐다. 반대편에서 한 노인이 걸어 나왔다. 백발에, 볕에 그을린 얼굴에, 한쪽 다리를 저는 노선장.
하산이었다.
10년을 찾아 헤맨 스승이, 이제는 나란히 서서 함께 책을 든다. '잔단호'는 돌아오지 못했지만, 그 안에 실렸던 해도와 표본첩은 돌아왔다. 두 저자의 이름이 표지에 나란히 박혀 있었다.
"관례를 하나 여쭙겠습니다." 에민이 강당을 향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대리석을 타고 멀리까지 퍼졌다. "봉정된 책은 아카데미의 소유가 되고, 사본은 허가를 받아야 뜰 수 있습니다. 맞습니까?"
학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관례를, 이 책에 한해 거두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강당이 술렁였다.
"사본에 제한을 두지 않겠습니다." 에민의 말이 이어졌다. "어느 왕국의 어느 항해자든, 필사자든 인쇄공이든, 이 책을 베껴 가도 좋습니다. 값도, 허락도 필요 없습니다. 삼각주의 여울 하나까지 전부."
노학자 하나가 벌떡 일어섰다. "그건 자네들이 평생 쌓은 걸 거저 내주는 걸세!"
"압니다."
에민은 3권을 펼쳤다. 대서양의 서쪽 가장자리, 늘 흐릿하게만 그려지던 그 바다가 이제 또렷했다.
"이 해도는 여태 상품이었습니다. 누군가는 이걸 사재기해서 항로를 통째로 삼켰지요. 정확한 바다를 감추면, 감춘 자만 그 바다의 주인이 되니까."
물수리. 발톱에 물고기를 움켜쥔 문장. 에민은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올릴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만 명이 같은 바다를 알면, 그건 누구의 상품도 될 수 없습니다. 감출 수 없게 된 항로는, 더는 파는 물건이 아닙니다."
강당 뒤편에서, 작은 움직임이 있었다.
에민은 보았다. 회색 외투의 신사 하나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가락에 반지가 있었다. 물고기를 움켜쥔 물수리. 그 은반지가 창빛에 한 번 번득였다.
신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리 없이 몸을 돌려, 뒷문으로 걸어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에민은 그를 붙잡지 않았다. 붙잡을 이유가 없었다. 저 사람이 가지고 나가는 건 이제 아무 값도 없는 소식이었다. '박물지가 만인에게 풀렸다'는 소식. 그것을 아바나로, 런던으로 아무리 빨리 실어 나른들, 그가 되팔 수 있는 바다는 이 순간 이후로 세상에 없었다.
봉정이 끝나고, 사람들이 물러간 뒤였다.
하산이 3권을 손끝으로 쓸었다. 서쪽 바다의 여백이 메워진 자리를.
"기억하느냐." 노선장이 말했다. "네가 열넷일 때, 왜 빈 데를 남겨 두느냐 물었지."
"창고가 습해서 잉크가 번질까 봐라고 하셨죠."
하산이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웃음이었다.
"거짓말이었다. 여백은, 아직 못 가 본 데를 위한 자리였어."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지도는 감추려고 그리는 게 아니다, 에민. 누군가 돌아올 수 있으라고 그리는 거야. 나는 10년을 헤맸지만, 내 해도가 정확했으니 결국 돌아왔다."
에민은 대답하지 못했다. 목이 메었다.
10년. 스승을 찾아 세 대양을 건넜다. 아카데미의 현상 과제는 핑계였는지도 몰랐다. 정말 완성하고 싶었던 건 3권이 아니라, 이 재회였는지도.
밖으로 나오자 항구가 눈앞에 펼쳐졌다. '세헤르'—새벽—의 돛대가 저 아래 부두에 서 있었다.
에민은 품에서 낡은 수첩을 꺼냈다. 첫 항해 때부터 지녀 온, 여백투성이의 측량 수첩. 그 빈 데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문득 알 것 같았다.
여백은 부족한 게 아니었다. 여백은 초대장이었어. 아직 오지 않은 누군가에게, 여기까지 와서 이 다음을 채워 달라는—
그리고 초대장은, 감춰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초대장은 모두에게 보내야지.
에민은 수첩을 덮었다.
지식이 이긴 밤이었다. 오스프리가 그토록 사재기하던 바다가, 오늘 만인의 것이 되었다. 신사는 아무것도 사 가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에민은 멀어지는 회색 외투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그 반지의 주인은 앰브로즈 그레일링이 아니었다. 그저 심부름꾼이었다. 진짜 물수리는 아직 런던의 사무실에 앉아, 위조 채권을 찍어 내고 있을 터였다.
책 한 권이 풀렸다고 회사가 무너지지는 않는다. 아직은.
부두 쪽에서 니코가 손을 흔들었다. 급한 몸짓이었다. 그의 손에 봉랍 찍힌 편지 한 통이 들려 있었다. 붉은 밀랍 위로, 발톱에 물고기를 움켜쥔 문장이 선명했다.
오스프리가, 답장을 보내온 것이다.
검은 수평선을 처음 본 것은 열네 살 때였다. 그때는 무서웠다. 지금은 아니다.
에민은 '세헤르'의 이물에서 아침의 첫 빛을 받았다. 이즈미르 말로 세헤르는 새벽이라는 뜻. 배가 제 이름값을 하듯, 물마루마다 옅은 금이 번졌다.
몇 달이 흘렀다. 낭트의 법정도, 나소의 증언대도, 이제는 뒤에 있었다. 배는 남동으로 달렸다. 목적지는 없었다. 정확히는, 해도의 빈칸이 목적지였다.
"에민."
니코가 갑판을 건너왔다. 손에 젖은 신문 한 장. 지난 항구에서 산 런던발 관보였다. 소금기에 잉크가 번져 글자가 흐렸지만, 굵은 표제만은 또렷했다.
"읽어드릴까요, 아니면—"
"내가 읽지."
에민은 종이를 받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인정한다.
*오스프리 상사, 청산 절차 개시.* 그 아래로 작은 글씨들이 이어졌다. 채권단이 몰려들었고, 런던·암스테르담·아바나 지점이 문을 닫았고, 회장 A. 그레일링은—
에민은 그 줄에서 멈췄다. 오래 멈췄다.
*그레일링, 자사 발행 해도에 표기된 암초를 신뢰하지 않고 항로를 이탈, 산호초에 좌초. 뒤늦게 구조된 그는 즉시 체포되었다.*
그가 소리 내어 웃었다. 니코가 놀라 돌아봤다.
물수리는 물고기를 움켜쥐는 발톱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제 발밑의 물을 못 읽었다. 아니—읽지 않았다. 저희가 '접근 금지'로 위조해 둔 그 바다를. 세상에 거짓 암초를 뿌려 놓고, 정작 자기가 그 거짓을 믿지 못해 진짜 암초로 뛰어든 것이다.
"선실로 가자, 니코. 스승님께 보여드려야겠어."
하산 선장은 선미루 아래, 표본 상자들 사이에 있었다. 10년의 실종. 그 세월이 어깨를 굽게 했지만, 눈만은 여전히 아이처럼 맑았다. 잔단호를 삼킨 것이 무엇이었는지, 이제 우리는 안다. 항로를 사들이던 그 발톱.
에민은 젖은 관보를 스승 앞에 펼쳤다. 손가락으로 그 한 줄을 짚었다.
하산이 읽었다. 천천히. 안경 너머로 두 번 읽었다.
그리고 웃기 시작했다. 처음엔 낮게, 목 안에서. 이윽고 어깨가 흔들리고, 표본 상자 위 유리병들이 달그락거릴 만큼. 노인의 웃음은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눈가에 물이 맺혔다.
"거짓 지도는 말이다, 에민." 그가 겨우 숨을 골랐다. "결국 그린 자의 발밑에서 찢어지는 법이야."
에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문득, 엘렌과 대니얼을 생각했다. 지금쯤 각자의 바다 어디선가 이 소식을 받았을 것이다. 낭트의 장부가 '수법'을 지웠고, 카리브의 증언과 주문서가 '손'을 지웠다. 그리고 자기가 완성해 아카데미에 부친 「대서양 박물지」 3권이—공개된 지식이—오스프리의 마지막 상품을 지웠다. 감춰 두었던 항로. 사재기한 해도. 그 모든 비밀은 이제 서점 매대에 2실링짜리로 놓여 있다. 누구나 살 수 있는 지식은, 더 이상 누구도 팔 수 없다.
장부와 총과 지식. 세 갈래의 물길이 하나의 문장을 무너뜨렸다.
승리라는 말은 너무 요란하다. 이건 그저—정리된 여백에 가깝다. 오래 지저분하던 해도 한 귀퉁이를 깨끗이 지우고, 그 위에 진짜 해안선을 그려 넣은 기분.
바람이 돛을 채웠다. '세헤르'가 기수를 조금 더 남으로 틀었다.
니코가 곁에 섰다. "이제 어디로 가요?"
에민은 뱃머리 너머를 보았다. 해도에는 아직 이름 없는 물길이 남아 있다. 스승이 삼십 년 전 발을 들이려다 삼켜진 곳. 이제는 삼킬 발톱도 없다.
표본 상자 안에서 유리병들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말리다 만 해초, 낯선 새의 깃털, 이름 붙이지 못한 조개껍데기 하나. 3권은 끝났지만, 세상은 3권으로 끝나지 않는다.
에민은 문득 잉크병을 들여다봤다. 바닥이 보였다. 웃음이 났다.
"다음 여백으로 가자, 니코."
그가 잉크병을 흔들어 보였다. 거의 비어 있었다.
"잉크를 더 사자."
'세헤르'의 이물이 물을 갈랐다. 저 멀리, 아침 해가 막 넘어서는 자리에 검은 수평선이 한 줄 그어져 있었다. 한때는 세상의 끝처럼 보이던 선. 이제는 안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아직 그려지지 않은 다음 장의 여백이라는 것을.
배는 그 선을 향해 나아갔다. 지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채우기 위해서.